섬으로 돌아가다

양대원 회화展   2004_0917 ▶ 2004_1020

양대원_전시장 설치장면_2004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가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4_0917_금요일_05:00pm

가갤러리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89번지 Tel. 02_792_8736

반복에 관하여 ● 양대원은 그림을 매우 오랜 시간동안 그린다. 아니 그림을 만든다. 그는 우선 캔버스를 만들고 밑그림을 그리고 색을 칠한다. 거기에 다시 그 캔버스를 흙색으로 염색하는데, 여기에서도 단번에 흙색이 염색되진 않는다. 칠하고 닦고, 갖가지 재료들을 섞고 다시 칠하고 닦아내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흙-바탕을 만든다. 그러고 나서 가장 나중에 더욱 지난하고 지리하고 반복적인 작업인 인두질을 한다. 양대원의 인두질과 흙색의 염색이라는 강박적 반복의 행위는 일종의 집약된 노동이거나 무관심스러운 단순한 기계적 반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복의 결실이자 강박의 증거인 그의 작품에서 그 반복의 효과는 매우 섬뜩한 것으로 드러난다. 반복이라는 행위는 규칙적이고 기계적이면서 매우 끈질긴 인내심과 동시에 일종의 무아지경을 요하는 행위다. 만일 온통 완성을 위한 강박으로만 점철된 행위를 계속해서 반복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제대로 된 정신으로선 지속하기 힘든 일이다. 그것은 양대원의 하나의 작품으로서 인생 마감하는 비운의 작가라는 극적인 운명을 타고나지 못한 불행(!)때문이다. 양대원은 지속해야한다. 그 지속이라는 더욱 지난한 여정이 있기 때문에 양대원의 반복과 지리한 시간의 견딤은 단지 지겹고 견뎌내야만 하는 것만 있을 수 없다. 반복이 만일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으로서의 반복이라면 그래서 그것이 단지 고통스러운 여정일 뿐이라면, 누가 그것을 감내하겠는가. 양대원의 반복에는 좀 특별한 것이 있다. 반복의 섬뜩한 효과라는 것은 바로 그 '특별함'에서 나타난다.

양대원_눈물Ⅱ(변신)232099_판넬에 광목천, 아교, 토분, 먹, 커피, 올리브유, 아크릴 채색_1999

양대원의 색 ● 양대원의 색은 흙이다. 양대원은 모든 바탕을 흙으로 만들어버린다. 그의 흙은 곱디곱고 바짝 말랐지만 영원히 그대로인 흙이다. 양대원의 흙색은 기나긴 시간을 통해서 다져지고 닦여지고 마르고 정지된 그것이다. 양대원의 흙은 '아직도' 그대로다. 양대원의 흙은 그래서 영원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는 보편을 담지 한다. 양대원의 색은 불안을 잠식해 들어가는 불그스름한 주홍색이다. 불길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 불길함을 잠재우는 듯한 허공에서 방향성을 상실한 수많은 날개가 달린 주홍색의 존재는 양대원 자신이다. 자화상. 파드득거리는 날개 짓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 자리인 듯한 막막함으로 부유하고 있는 초록 날개의 붉은 존재는 사실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그것의 불길한 허공은 이미 존재의 영혼 속에 잠식해 들어가 있는 '상태'일 뿐이다. 양대원의 색은 야광처럼 빛나고 묻어날 듯 소름끼치도록 발광하는 초록색이다. 초록의 날개는 발광하면서 파다닥 거리고 수없는 날개 짓을 한다. 그것은 초록 날개의 운명이다. 양대원의 색은 날카롭고 얇은 칼날이 (파충류 같은 것을) 가볍게 스쳐서 베어난 자국에서 갑자기 차갑고 섬뜩하면서 상쾌하기까지 한 선연한 푸른 피가 뚝뚝 떨어져서 만든 것 같다. 무엇이 그렇듯 섬뜩하고 투명하면서 동시에 시퍼런 날을 암시하는 파란 색의 물감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양대원이다.

양대원_섬으로돌아가다819030_광목천에 한지, 아교, 토분, 먹, 커피, 올리브유, 아크릴 채색_2003

다시 섬으로 ● 덕소는 양대원의 섬이다. 11년 전쯤일까 양대원은 자신의 고향인 양평 근처의 이곳으로 이사하였다. 그것이 양대원의 첫 번째 귀환이었다. 양대원의 첫 번째 귀환은 덕소로의 이사와 동시에 고독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었다. 11년 전부터 시작된 양대원의 덕소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비)자발적 고립과 고독 그 자체였다. 양대원의 고독은 소통의 벽에서 오는 것이자 동시에 어느 존재라도 극복할 수 없는 영원한 불안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 고독은 아직도 흙으로 염색하고 인두질로 표현된 캔버스에 바래지 않는 흔적으로 뚜렷하게 남아있다. 지금 양대원은 두 번째의 귀환을 한다. 그 귀환은 이미 있는 곳으로의 (재)회귀이자 인식적 차원이동이다... 양대원은 이제 다시 '섬으로 돌아온다.' 그 섬은 지금의 바로 여기이다. 덕소이기도 하고, 흙이기도 하고, 다시 아프게 될 발열의 시작이기도 하다.

양대원_가라사대Ⅰ613040_광목천에 한지, 아교, 토분, 먹, 커피, 올리브유, 아크릴 채색_2004

가라사대Ⅰ, 2004 모든 것이 헛되다고? ● 양대원의 귀환이 과연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도를 터득한 자'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는 지금 너무 많은 것을 얻었거나 너무 많은 것을 잃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말이 체조선수 형태의 복제된 세포 덩어리들의 향연으로 구성된 단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문장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 두 가지 모두가 아니라 헛됨이 아닌 관여를 보게 된다. 양대원의 기호는 의미 지향적이다. 사실 양대원 만의 언어는 그 언어로 매우 많은 의미를 적확하게 담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매력을 지닌다. 체조하는 세포 덩어리들이 만들어낸 기호가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것을 보면, 우선 그 기호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과정을 겪은 이미지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양대원이 적확하게 이야기하려는 바를 몇 단계의 복잡한 과정을 소거해내고 단숨에 만들어낸 '의미 지향적 이미지 언어'이다. 그래서 양대원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이미지)를 읽어낸다는 것은 그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과정을 포함한다. 그것은 일종의 미끼이다. 그 미끼는 적극적인 관여와 참관, 동반으로 이끌고 싶은 양대원의 속이 뻔히 드려다 보이는 속임수로 인해 던져졌다. ■ 이병희

Vol.20040920a | 양대원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