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다 그리고 흐르다-눈이 달린 발

김보중 회화展   2006_0705 ▶ 2006_0730 / 월요일 휴관

김보중_나무 손(木手)_변형평면에 오일과 사진_95×120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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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705_수요일_05:00pm

2006 대안공간 풀 기획초대 작가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2:00pm~08:00pm / 월요일 휴관

대안공간 풀 서울 종로구 구기동 56-13번지 Tel. 02_396_4805 www.altpool.org

중력과 은총 ● 김보중의 그림은 육체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의 무지막지1)할 만큼 육체적인 그림에서는 어떤, 살(肉)의 달콤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관능적이지 않다. 이 감각적 괴리 때문에 나는 가끔 김보중의 그림 앞에서 어리둥절하다. ● 1) 무지막지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하는 짓이 매우 무지하고 상스럽다, 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당연히 사전적 의미로 이 말을 쓴 것은 아니다. 이건 감성적으로나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이라는 의미를 좀 자극적으로 포장해 본 것인데, 이 '감각'을 더 정확히 표현해 보자면 김보중이 좋아한다고 여겨지는-그는 팜플렛에 실린 작가의 말 같은 곳에서 곧잘 김수영(金洙暎)을 언급한다-김수영 시인의 시 '폭포'가 필요하다. ● 폭포(瀑布)는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 무엇을 향(向)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도 없이 / 계절(季節)과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 고매(高邁)한 정신(精神)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 폭포(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 곧은 소리는 곧은 / 소리를 부른다. /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 취(醉)할 순간(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 높이도 폭(幅)도 없이 / 떨어진다. (김수영, 「폭포」) ● 그런데 작가 스스로는 자신의 '육체적' 그림에 관념이 결여 되었다고 느끼는 것인지, 그러니까 관념, 개념, 추상의 뼈대가 결여되었다고 생각하는지 '그것들'이라고 보여질만한 아이콘을 그려 넣는다. 그것도 "감각적으로 위화감이 들지 않도록" 매우 공들여서. 심장, 손, 사람, 비행기, 창문으로 명명된 200자 원고지, 사다리 등 등. ● 그런가 하면 작가는 또 자신의 작업이 더, 더욱 더 육체성을 획득하게 하려고 생나무 가지로 손수 만든 캔버스 프레임을 사용하기도 하며, 아예 입체적 캔버스를 만들어 보기도 한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육체에서 빠져나온 '일루젼'으로서의 그림이 아닌 아예 그것 자체에 들어가 버린 그림을 꿈꾼다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한다.(이 제스처는 '실제 행위'와 사전적 의미의 '제스처' 사이쯤에 있다. 작가들의 표현 행위란 늘 그 사이의 어디쯤에 있는 것 아닐까?) ● 버스를 기다리다가 지나가는 버스의 옆면에 이런 광고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어려울 때는 친구도 도움이 안됩니다" 그 문구 옆에는 배우 최민식이 믿음직한, 그리고 연민에 가득찬 눈빛으로, 그러면서 금방 도와줄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고. 이거 참, 재미있는 반전 아닌가? 연전에는 어느 드링크제 cf에 나와 친구의 등을 두드리며 '거치른 들판으로 달려가자 운운'하던 그 이미지를 등에 업고 바로 그 이미지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어려울 때 친구라는 건 그냥 위로나 해주는 것일 뿐이야. 진짜 도움이 되는 건 우리 사채 회사지. 안 그래?' 신뢰의 상대성, 그리고 이미지가 가진 근본적 의미에서의 윤리 부재와 방법적으로 이미지에서 윤리의식을 박탈하기.(you win! 최민식 말고 너, 그래 그 뒤에 니가 이겼어.)

김보중_아버지와 아들(父子)_캔버스에 오일과 사진_145×112cm_2005
김보중_흐르다 그리고 흐르다-분당_캔버스에 오일_161.5×130cm_2006

김보중의 작업에 에로스가 결여되어 있다는 내 느낌은 숲-정사, 같은 참 안 情事적, 안 섹슈얼한 그림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작업 전반에는 어떤 수분, 물기 같은 것이 잘 안 보인다. 유채(油彩) 특유의 끈끈함과 반복적 붓질이 만들어 낸 매우 주밀한 화면의 밀도에도 불구하고.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피와 땀과 눈물까지만, 이다. DC 폐인들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왜 질질 안 싸는 걸까, 왜? ● 월드컵이 시작 됐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현재진행 중이다. 이런 저런 분석과 시비를 떠나서 이 거대한 규모의 축구대회는 즐겁다. 단,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경기만 빼고. 한국이 경기를 할 때면 그나마 점잖다는 방송사의 중계를 보고 있어도 '이거 뭐, 도대체...' 소리가 절로 나온다. 캐스터나 해설자가 자기 나라의 선수들을 응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기에 따라 그게 다소 과하게 표현된다고 해도 그건 뭐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다 치자. 그렇지만 애국심을 팔아먹으며, 경기 자체를 왜곡하는 중계와 해설을 낄낄대며 아무 부끄러움 없이 공공의 장소에서 지껄이고 있는 걸 보면, 정말 우리의 공적 윤리라는 것은 내면에서부터 붕괴해 버렸구나, 하는 자괴감을 지울 수가 없다. 이건 중계라기보다, 시골 영감, 할매가 지 손주 운동회에 가서 술 한잔 자시고 그래도 우리 손주가 최고야, 우리 새끼가 져도 이긴거야, 라고 떼쓰기 반, 달래기 반 하고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또는 옛날 엄마들의 십팔번 레파토리 '우리 애가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해서요' 와 표현만 축구에 관한 것뿐이지 동일한 사고방식에 동일한 '뻘' 짓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것도 공중파로. 한 사회의 내면이 이렇게까지 의사 가족적이고 유치하다니. ● 이번 김보중 전시의 제목은 '흐르다 그리고 흐르다-눈이 달린 발' 이다. 몇년 전에 있었던 민정기의 전시 제목은 '본 것을 걸어가듯이' 였다.(민정기 선생께 "선생님 '본 것을 걸어가듯이' 그린다, 입니까? 하고 전시장에서 여쭤 봤더니, 선생 왈 "그렸으면,... 아닐까?" 하고 겸연쩍게 웃으셨다.) 이 두 주요한 작가들이 왜, 머리의 대칭인 발-다리에 그러니까 일종의 육체적 '행위'에 주목-기대는 것일까? 내 아전인수식 해석은 이거다. 우리시대, 공적 내면의 붕괴, 윤리의 부재, 개념의 휘발-애들 말로는 개념 상실/ 개념 탑재 요망-을 민감한 작가들이 느끼고 있다는 것. 한 10년 전쯤 유행했던, 신체, 기관, 몸 등등의 담론이 파고 들어온 그 '육체' 말고 믿을 건 이 '몸뚱이' 하나 밖에 없다, 의 이 '육체', 총체적 더듬이로서의 '내 육체'. ● 용인과 분당, 잡목림과 아파트의 숲, 잡목림의 그늘 사이에서 일렁이는 '빛나는' 빛과 아파트를 조명하는 무광의 빛, 그리고 작은 화면들의 뿌리와 같은 얽힘과 큰 화면들의 원근법적 위계로 명확히 구분되는 이번 김보중의 작업은 육체를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의 흐름에 정직하게 반응하겠다는, '흐르고'와 그 다른 감각을 종합해서 '흐르게'하고 싶다는 욕구를 드러낸다. 이성이여, 발끝에서 발과 같이 빛나라. ● 어디선가도 언급했듯이 작가는 도사가 아니다. 태극전사도 아니고, 반 태극전사도 아니다. 정치가는 더더욱 아니다. 작가는 유예된 도사이며, 유예된 반 태극전사이며, 자신만의 정치가이다, 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작가는 생명 속에서 도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이념 속에서 전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자신에게 부과된 유예된 시간에 정직한 존재다,-이다. ● 이미 유예된 시간에 붙잡힌 존재인 작가가 자신의 '감각을 유보'하고 있는 것을 느낄 때 나는 좀 답답하다. 용인의 잡목림에서 총체적 육체인 자연 속에서 흐르던 감각은, 종합적 인공인 분당의 아파트, 아케이드, 도로의 구조물 속에서는 멈칫 멈칫 흐른다. 자연에 대한 홀림이 인공에 대한 작가의 어떤 느낌을 유보 시키고 있다고나 할까? 그 '어떤 느낌의 유보'는 그것을 유보한 이유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자연 속에서 자연을 과장한다. 자연의 빛을 과장한다.

김보중_분당의 밤_판화지에 콘테_77×56cm_2005

나는 이 글을 이 단어 하나를 겨냥해서 쓰고 있다. 그 '어떤 느낌'은-내가 그의 근작인 분당 그림들을 보며, 작가가 왜 여기서 멈추어버렸을까, 라고 생각한-그 감각은, 그러니까 내가 의지하고 있는 단어는 '분노'이다. '작가는 자신의 분노를 유예 시켰구나' 라고 나는 작가의 새로운 그림들 앞에서 생각했다. 그의 이성은 분노를 통제한다. 통제관은 성숙에 대한 의지와 종합에 대한 요구이다. 그것은 / 라는 대칭 속에서 부서져 나가는 당사자의 시선이 아니라 관조자의 시선이며 그 시선의 기획일 것이다. 외람되게도, 나는 작가가 그 통제관을 해고하기를 바란다. 나는 분노가 모든 작가들의 동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김보중이 초기 작업에서 보여준 다소 관념적인, 그러나 매우 강력한 분노가 그의 작업을 이루는 커다란 동력이라고 보았었으며, 그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분당 그림을 보며 확인한다. 그것이 앞서 말한바와 같이 유보되고 멈칫대는 것이 좀 아쉬울 뿐. 당사자의 분노는 섬세하다. 분통을 터뜨리게 구조화 된 세계에서 화내지 않겠다는 것은 관조자의 모습일지언정 이 세계의 구조에 대해 분노-무수히 많은 말을 아직도 간직한 작가의 모습은 아니지 않겠는가? 물론 작가 김보중이 분노를 버리고 도사然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더 화내시라, 이념이나 관념의 도그마를 넘어 설만큼. 벗어날 수 없으므로, 벗어날 수 없을만큼은 화를 내야하지 않겠는가? ● 사회적 제반 조건에 대한 윤리적 분노가 사회의 공적 내면을 만들어 내는 동력인 시대가 행복한 시대일 수는 없다. 그러나 윤리적 분노조차 가질 수 없었던 시절-물리적 폭력과 이데올로그들의 내용없는 선전에 자신의 분노마저 저당 잡혔던 그런 시절-보다 우리가 보아야 할, 그리고 해야 할 것들은 의외로 많을 수 있다. 개인적 분노가 사회, 윤리적 분노 속에서 바로 치유될 수는 없겠지만, 공적 분노가 사적 분노의 결을 잡아주고, 질을 풍부하게 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자기 내면에서 빙빙 돌며 꼬이는 자기 억압의 물꼬는 밖에 있다. 분노로 질질 싸야한다. 그것이 우리시대의 에로스고 관능이다. 내 생각에 우리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를테면 ● 폭포(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 곧은 소리는 곧은 / 소리를 부른다. /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 취(醉)할 순간(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 높이도 폭(幅)도 없이 / 떨어진다 ● '높이도 폭도 없이,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떨어지는 것'이야말로 '곧은 소리를 부른다', 는 김수영의 전언처럼. 중력에 대한 감각과 은총에 대한 감각의 대위법으로. (오빠! 달려!) ● 중력과 은총*: 중력(重力)과 은총(恩寵)은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느 베이유의 에세이집 제목이다. 예전에 봤던 이 책(번역본의 제목은 '사랑과 죽음의 팡세' 뭐, 이런 거였다.)의 원본제목이-내용이 번역본 제목과 너무 안 맞아서 원제는 뭐야, 하는 마음에서 찾아 봤었다-마음에 들어서 언젠가 한번 써 먹어봐야지 생각하다가 글이 너무 제 멋대로인 것 같아 좀 점잖게 보일려고 써먹는다.황세준

김보중_흐르다 그리고 흐르다-용인_다양한 크기 캔버스에 오일_235×724cm_2000~6
김보중_흐르다 그리고 흐르다-분당_캔버스에 오일_130×161.5cm_2006

한 없이 불안한 '나'로부터 비롯된 풍경들 ● 보이는 것은, 사실 그렇게 보인다고 해도 보이는 것 자체로서 '사실'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현대미술을 난해한 것으로 간단하게 치부하게 만드는 좋은 빌미를 제공한다. 여기서 현대미술을 어느정도 윤곽잡아 설명해야 하겠지만 거칠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나타나는 다양한 예술형식 전부를 일컫는 것으로 놓아 두자. 우리는 그래서 김보중의 개인전에 나온 작품들을 그래서 현대미술의 범주안에 간단하게 편입시키며, 그 작품들이 비록 풍경화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보이는데로 보면서 보이는 것 자체로 받아들일 수 없다. ● 그의 작품들은, 단언하건데 풍경화다. 그러니까 보는 사람 밖에 놓여있는 풍광들을 조형적으로 압축하여 한 화폭에 고정시킨 풍경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화가가 그려 놓은데로 나무는 나무고 건물은 건물인 채로 보면 그만이다. 하지만 누가 이 정도의 '보이는 것' 안에서 만족하며 그의 작품을 보고-이해했다고 할 수 있는가. 더욱이 이해를 넘어, 작가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작가는 그럼에도 그저 자신이 그린 대상의 묘사 안에서 확정된 그 풍경만을 보아도 좋다고 할 것인가? 이해는 아무리 '아닐 것'이라고 하더라도 무엇보다 의견일치에 이르러야 한다. 그렇다면 감상자들은 그의 작품에서 어떤 의견의 일치를 끌어 당겨 자신 앞으로 가져올 수 있을까? ● 어떤 판단 기준에 대해 명확하게 선을 그어 구분하고 그 기점으로부터 분석의 틀을 방법론으로 규정할 수 없겠지만 근대미술의 명료함은 그 대상이 되는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앞선 이해 없이 보이는 것 자체로부터 이해를 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작가와 감상자 모두가 모든 예술작품을 하나의 텍스트로 간주하며 그로부터 내재된 진리가 드러날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이 확고한 신념같은 것이 작품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는 만들지만 소통의 통로를 차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작가와 감상자 모두) 텍스트로 삼은 예술작품이 단순한 이해의 목표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오히려 작가의 은폐된 의도와 작품에 내재된 사실을 넘어 감추어진 앞선 역사성까지 이해의 문제 안에 자리 잡는다. 이런 표현의 배후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해하기를 어렵게 만들고 소통의 어긋남을 항상 예비하게 한다. 그래서 작품 감상은 이제 탐구의 영역에서 해소되어야 한다. 과연 옳은 태도인가? ● 김보중의 작품에 대한 선입견 중 일치되기 쉬운 지점은 풍경 속에 이야기를 담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서 그림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 또한 이런 지점을 작품 속에 준비해두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이 말을 물고 진화하거나 단말마로 끝나면서 확연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숲-도시 주변 야산에서 발견되는 숲의 이미지는 그가 즐겨 사용하는 그림의 주제다. 그 숲들은 작가 자신만이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포착된 이미지들로 채워져 있다. 이 기록들은 작가에게만 의미있다. 그 배후의 조건들, 작가의 심리적 반응이나 주관적 도그마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유추하면서 따라 들어가 볼 뿐인데, 얼핏 세세한 묘사로 가득할 것 같은 그의 그림들이 의외로 추상적 면모를 가진 색 덩어리, 붓의 지나간 흔적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 보이는 것 이상의 해석을 요구한다. 그의 그림은 사실 상식적인 형상구분에 의해 그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구별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그림에서 형상은 형태묘사로 구성되기 보다 색채감각으로 구성되어 있는 편이 많다. 파랑은 하늘, 초록은 나뭇잎, 갈색은 땅이거나 나뭇가지, 나무등걸 따위로 말이다. 그럼에도 그의 숲 그림 안에서 우리는 미묘한 시간의 차이, 가령 점심 때 즈음이랄지 오후 늦은 햇살 등의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숲 이미지들에는 거의 그가 포착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알 수 없거나 알만한 형상들이 그림에 중첩되어 있는데 그 형상들을 연결하여 하나의 맥 안에서 우리는 도저히 무엇을 읽어 낼 수는 없다. 아마도 작가 또한 어떤 이야기를 서술적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비연속적인 단상들은 작가가 정지시키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만 '의미'를 거두어 들인다. 하지만 여전히 숲은 남아 있다. 아니 숲의 이미지만 그렇다. 그 숲은 '의미'에 갇혀있지 않다. 단순히 작가가 주변에서 선택한 그림의 주제일 뿐이다. 최신작 도시의 건물을 그린 작품 또한 이와 같이 선택의 결과로서 '모양 다름'일뿐이다. 이 의지에 의한 선택은 중요하다. 마치 연애 상대를 선택하는 것 처럼.

김보중_흐르다 그리고 흐르다-분당_2006

작가의 선택이란 단순하게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소재로서 선택에 그치지 않는다. 선택의 문제에는 늘 작가 자신이 배려되어 있기 마련이다. 자신을 배려한 그 세계를 우리는 알 길 없으나 작가가 그 세계에 빠져 있음은 알 수 있다. 자신이 선택한 세계에 빠져드는 것은 엄밀하게 지적하자면 도피다. 여기서 '도피'란 현실세계 또는 현실적인 어떤 상태로부터 비롯되지 않는다. 다만 작가 자신이 자신만의 고유함을 확인할 수 있는 세계로 몰입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생기는 관계의 의미에 한에서 그렇다. 그럼으로 이 '세계의 빠져듬-도피'에는 작가 자신이 이미 설정한 불안-자신을 배려함으로 발생한 세계가 함께 한다. 그 불안은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입장이기도 하며 자신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럼으로 작가에게 그 세계(불안과 일치되는)가 자신에게 유의미할 수 록 빠져듬은 지속되고 자신에게는 명백해진다. 작가의 현재, 여기에 있음을 자신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런 '상태의 유지'는 이미 작가 자신이 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 '숲의 이미지'는 그 불안으로부터 기인하는 자신의 모습들을 안아버린다. 작가는 주변 야산을 돌아다니면서, 거닐면서, 생각에 골똘히 빠져 듦의 장소에서 일상으로 돌아와 불연듯 아무것도 아닌 불안을 확인한다. 작가의 일상은 여기서 분명해진다. 작가가 찾아낸 일상성은 그림에서 하루의 흐름, 계절의 흐름으로 치환되어 분명한 표정으로 드러나고 얼개 없는 단독 형상들의 엇갈린 표현들은 서사 밖에서도 그래서 굳건하다. 이 불안의 근거를 우리는 알수 없다. 작가에게도 물어볼 일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작가답게, 작품을 만들게 하는 긴 끈으로 놓여 있음은 '사실'이다. ● 도시-분당 일원의 풍광들을 그린 최신작에서는 이 불안의 모습들이 더욱 구체적이다. 우리는 불안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불안이 사라진 후, 불연듯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그 '사실'을! 이 말은, 불안이 애초에 '없었다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작가의 그림에서,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있고 메마른 나뭇가지들이 어지러운 도로에 차가 달리는 이 보잘것 없는 풍경의 스침은 늘 거기에 그렇게 있어왔지만, 그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그런 성질들로 가득 채워져 있지 않은가. 이 작가의 '세계-빠져들어 있는' 그 곳에서는 이런 것 모두가 시나브로 새로워 보인다. 김보중 작품의 매력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대개, 불확실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근원적 한계를 알면서도 설명을 통해 파악된 것처럼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이 작가는 설명하는 방법으로 특정한 사태(그림에서 드러나는 상황)를 보게 하거나 '그 것'을 다시 한 번 설명할 뿐이다. 이해의 몫은 철저하게 놓아 버린다. 물론 자신의 이해방식으로 그림을 그렇게 그릴 뿐이어서 이와같은 현상적 이해는 쉽게 구해지지만 말이다. 분당의 아파트 단지를 그린 그림은 철저하게 작가의 이해방식과 설명으로만 가득한, 그 정도의 친절 이상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그럴듯하게 그려진 아파트를 보고 그럴싸한 풍경 한 점을 보게 될 뿐이다. 소통은 사라지는가? 애초에 소통할 바가 없었다면? 김보중의 작품이 놓인 자리는 그 자리가 아니다. 그가 대상을 선택하는 것, 그 의지가 자신의 세계를 보다 세계다움으로 채워주는 불안에서 비롯됨을 어떻게 소통할 수 있다 말인가. 김보중은 시시비비가 분명해지는 그런 현상적 세계 밖에서 사유하려하고 그 출발점에 불안을 두고 있다. 불안은 작가의 세계를 강고하게 하는 첫 번째 이유이고 그가 세상 밖을 바라보는 통로이다. 그 불안이 내재된 세계에서야 말로 일상성은 항상 불연듯 새로워 지고, 현상 이상의 물음을 제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작가의 세상에 대한 태도에는 본질적으로 자기를 구성한 세계에 대한 이해가 가득하다. 자신이 어디에 있음에 물음이 항상 제기됨으로써 얻어지는 이 실존적 세계는 김보중에게는 완전하지만 곁에 있음의 한에서 우리는 알길이 없다. 다만 그의 작품에서 그가 처해있는 불안이 가져다 준 섬뜩한 현실세계의 단편들을 봄으로써 그저 에둘러 그를 이해해볼 뿐이다. 이 답답한 한계를 작가는 탓하지 않는다. 이미 몇 년 동안 그는 자신이 잠식되어 있는 세계에서 너무나 많은 질문들을 물고 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풍경화가 풍경으로서 의미축소 되지 않고 회화의 한 표현 축인 한에는 작가의 그런 힘으로부터 의미세계를 가지기 시작한다. 이 세계는 김보중에게 있어 언제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분명해질 불안에 묶여져 있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보이는 그대로 '사실'을 그리지 못한다. ■ 이섭

Vol.20060717a | 김보중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