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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207_수요일_05:00pm
책임기획_이섭_갤러리 스케이프
갤러리 스케이프 서울 마포구 서교동 400-10 MJ 빌딩 3층 Tel. 02_3143_4675
회화는 자신에게 주어진, 복무할 목표가 뚜렷했을 때 부터, 제단화 시절부터 그림으로 삶의 진정성을 표현했었다. 그것이 유일한 존재의 의미였다. 회화가 가지는 이 영원한 테제인 삶의 진정성에 대해 쉼없는 질문을 김보중은 자신의 작품으로 취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몇 겹의 의역을 벗겨내야만 형식 안으로 숨겨진 내용을 만나게 된다.
삶의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마치 일반론으로 사용되는 이 어구는 사실 제 각각 질문이 유효하고 그에 응하는 답 또한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커다란 틀 안에서 말 그대로 진정성을 옹호 받게 된다. 그 때 우리는 입을 모아 '삶의 진정성'을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는 세계에 대한 몰입을 증명하기 위해 과도한 이론과 실증적 인식을 동원한다. 우리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과도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사용하지 않으면서도) 학문이 제공하는 엄청난 실증적(학문이기 때문에 그러하건데)이고 조작된 인식에 떠밀려 산다. 그것을 바탕으로(확실하게 알지 못한 채) 우리는 '나'를 증명하기도 하고 '너'를 이해하기도 하며 '우리'를 규정한다. 김보중은 이 지점에서 모든 것을 반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반성의 기재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일-곧 그림을 가지고 말한다. 그의 그림은 그래서 단순해 보이는 그림의 외관과 달리 깊다.
작가는, 그렇게 표현한 바 없었지만, 근대적 주관주의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서 발생한 혐오 개념인 '주체'를 그림으로 표현한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미 '주체'가 자신이 방문한 바 있는 '그곳에' 늘 그렇게 존재해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것을 일반화 시켜 '주체'를 사용하지 않는 언어로 설명하기 좋아하는데, 바로 그 충돌지점에서 자신의 그림을 가져다 놓으려 한다. 근대의 주관주의 이념은 나 속에서 어떤 진리-즉, 나의 진리, 나로부터 진리를 파악하려는 의도다. 그런데 이 근대적 기획력은 이미 '나'로서 자신이 어떤 의미에서건 이해되어 있어야 한다. '나'를 의심하면 기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김보중은 나를 의심함으로써 '나'를 통해 다다를 수 없는 세계를 알기 때문에 주체를 반성하는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낮설게 드러낸 숲 이미지나 갑자기 등장하는 비행기 그림은 그렇게 귀속된 관계 없이도 이미 있는 실체들을 나열함으로써 주체와 실체의 혼란스러운 경계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 모든 소재들은 공교롭게도 작가가 직접 현장에서 보았던 실체들일 뿐이다. 그 사이의 시공간은 작가와 감상자에게 실체와 주체의 물음을 자연스럽게 질문할 수 있도록 열려져 버린 것이다. 이 기현상은 작가에게 하나의 영감처럼 달려와 진정한 주체를 찾아가는 길을 선택하게 했는지 모른다. 그의 그림은 주체를 보여줌으로써 제 각각의 삶을 조망하게 한다. 그가 즐겨 그리는 소재는 작가에게 있어 작가의 세계를 드러내는 하나의 표상인데 그 스스로 주체적으로, 홀로 자립적으로 그 곳에 있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은 물론 현상을 통한 '자연에 질문'과 상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넘어서는 대상과 관게지을 때 역시 인간은, 더구나 삶은 주체로부터 기인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작가는 비로서 진정성을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질문은 회화적 현상과 동떨어져 보인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깊은 질문을 내포하지만 역시나 그림으로 먼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보중의 작품에서 우리가 단순하게 검은색 드로잉으로 표현된 나무와 야경만을 보고 돌아 선다면 그의 그림은 그저 그것을 기억하는 작가의 작은 표상에 닿아 있을 뿐이다.
모든 존재가 내 속에 존재한다면, 자신은 곧 신이 될 것이다. 이 술어에 대한 부정은, 작가는 이 부정을 그리면서 다시 부정을 긍정하지만, 작가가 보여주는 나무 한 그루의 온전함으로 은유되는 진정성에 가까이 가 있다. 그 전정성은 삶이 그러하지 못할 때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작가는 보다 간결한 소재로 '주체'로서 삶과 그 삶의 존재 형식인 진정성을 깊은 은유로 담아내려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안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믿는 우리의 속물적 속성은 그보다 진지하게 탐구된 실증적 이론에서 조차 건전성을 상실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지점에서 아주 단순한 메시지 하나를 던지고 있다. 그것은 어떤 자연물로 표상된 나무처럼(비행기처럼, 나무 사이에 드러나는 나체의 인물처럼), 아니면 자신의 기록 안에서 특징지워진 야경처럼(정원처럼, 풀 숲처럼) 은유된 상황처럼 서구 철학에서 쉽게 죽음을 선언한 우리의 삶을 진정성으로 길어 올리려는 것이다. ■ 이섭
Vol.20051204d | 김보중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