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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603_토요일
갤러리 상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9번지 Tel. 02_730_0028
틈새의 선과 감성적 색채의 조각 ● 변숙경의 야심적이면서도 조심스러운, 그리고 대담하면서도 섬세한 조각에는 작가 자신의 내밀한 감성의 세계를 객관화하고, 미니멀 아트를 대체할 조각사의 가능성을 검증 받고자 하는 옹골찬 기개가 우러나온다. ● 전시장의 공간에는 단순수조를 표방한 조각전의 형식을 빌되 설치의 미학과 회화적 디스플레이가 도입될 예정이다. 대형 철조 작품이 압도적으로 공간을 장악하면서 벽면에는 회화적 부조, 혹은 부조적 회화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이 걸릴 것이다. 그리하여 전시 작품들은 대작과 소품이 설치미술에서 발견될 수 있는 장력의 균형 및 조각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의 평화로운 공존을 통해 완결된 분위기로 이끌 것이다. ● 야심적이라는 느낌은 먼저 엄청난 규모에서 온다. 거대한 철판들이 용접된 8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조형은 기중기로 운반, 설치해야 하는 규모지만 전시장의 사정 때문에 축소된 결과일 뿐, 여건이 허락한다면 크기와 두께의 제한이 어찌 있으랴 하는 야심만만한 의지의 편린을 보여주는 작은 단서에 불과하다. ● 그렇게 여건에 적응하면서도 작품은 의연 철판의 두께에서 오는 중후함과 동시에 날렵한 선을 살리고 싶다는 원래의 의도를 조심스럽게 펼쳐나간다. 작업장에서 보이는 두 개의 닮은 꼴 조형은 이 조심스러움의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처음 작업은 두 개의 철판을 붙여 중후함을 표현하려 했지만 날렵한 선을 구현할 수 없다고 판단, 상대적으로 두껍지 않은 철판을 도입했다. ● 그리하여 날렵한 선을 우선적으로 구현하면서 철판 자체에 내재한 중후함이라는 속성이 선의 의미를 증폭하도록 구성되었다. 대작을 통하여 자신의 역량을 시험하고, 재료와 질료의 저항력을 극복하여 예술적 성취를 이끌어내련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 의지는 조심스런 접근방식에 의해 보다 증폭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야심적이면서도 조심스럽다는 표현이 가능하게 된다.
이렇게 대작을 지향하는 이유로 작가는 형태에서 오는 느낌을 든다. 큰 작업은 거대한 괴체감, 양감을 준다. 그러나 거대한 느낌을 위해 거대한 괴체를 쓴다는 것이 아니라 큰 덩어리 사이의 날렵한 선을 살리기 위해서 면이 동원된다는 데에 변숙경 조각의 섬세한 감성이 있다. 이런 자세는 제3자에게는 야심으로 보여질 수 있겠지만 작가 자신에게는 단순히 표현의 동기와 과정이라는 데서 역설적으로 그 야심의 폭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될 만 하다. ● 그리고 대담하면서도 섬세하다는 것은 대조적인 관념일 수 있겠지만 그것이 잘 조화되는 것이 변숙경의 조각세계라는 인상을 받는다. 대담하다는 것은 물리적인 크기에서 오는 인상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거침없이 재료를 선택하고 조형화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 대담한 인상을 주는 첫 번째 요인이라 할 수 있는 철조는 변숙경에게는 손쉬운 조형행위이다. 직조, 즉 중간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바로 조각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로 잘라서, 바로 용접하고, 바로 형태가 나오니 그 느낌이 바로 전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손쉽다고 했다. ● 그러나 그것이 손쉽다고 할 수 있을까. 엄청난 무게와 배타적인 공간점유의 속성을 지닌 철은 기중기 등의 운반수단이 필요할 뿐 아니라 플라스마 절단, 용접, 그라인딩, 절곡 등 무겁고 까다로운 공정을 자유자재로 소화할 수 있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철조를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담대한 선택, 혹은 담대한 행위가 된다. ● 또한 강렬한 색깔과 문명사적인 비중에도 불구하고 부식되기 쉬운 속성을 지닌다. 조각가가 선택하는 철판의 색이란 사실 철의 색이 아니라 어느 정도 방청기능이 부여된 기능적인 색이다. 다시 철판은 습기와 결합하여 원래의 색, 즉 붉은 산화철로 환원한다. ● 철의 환원이란 자연스런 자연현상이로되 조각이나 건축에서는, 특히 소장가나 건축주에게는 결코 자연스런 현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식적으로, 통념적으로 조각과 건축을 대하는 자세가 아닌 어떤 담대한 기개가 있어야 철판은 철판으로서 조형의 대상이 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철기시대의 전성기에서 플라스틱이나 실리콘의 시대로 접어든다고 하지만 인류 문명에서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철이었다. 그러므로 철이란 단순히 소재가 아니라 인류문명의 대명사라 할 수 있으니, 그 선택 자체가 바로 문명 속의 예술이라는 대전제를 담대하게 수용하는 작가의 의식을 말해준다. ● 그러면서도 섬세하다는 것은 먼저, 소재의 감성적인 선택에서 온다. 벽에 걸리는 회화적 부조 혹은 부조적 회화에서, 언뜻 보아 깨진 얼음이나 갈라진 판유리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조형은 사실은 면적인 이미지에서가 아니라, 생활주변의 선을 재구성한 것이다. 그리고 그 소재는 거미줄에서 왔다. 작업장 주변의 벽과 벽 사이 틈새를 연결하는 거미줄을 사진 찍어 그 내재율을 선으로 도상화하고 이윽고 입체조형으로 만들어졌다. ● 이번 전시에 선보일 작품에서의 선이란 그러므로 내밀한 작가의 발견이자, 신념이다. 그리하여 결과로서의 궤적이 선으로 보일망정 그것은 면과 면 사이의 틈새이면서 오히려 면보다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조각의 기본 조형요소라 할 수 있는 면이라는 공식을 뛰어넘어 변숙경은 회화적인 선, 나아가 조각에서의 선이라는 자신만의 언어를 도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 선뿐만 아니라, 브론즈 작업에서의 색채 역시 생활주변에서 가져왔다. 작업실 주변의 계절에 따른 풍광의 변화는 브론즈에서 화공약품처리, 열처리, 샌딩, 그라인딩, 왁싱 등의 섬세한 가공과 마무리를 통해 색채조형으로 탈바꿈한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물리적이고 단순노역에 준 하는 과정이지만, 그 작업의 이면에는 지나가는 봄을 아쉬워하고 그 봄을 작품 속에 담고자 하는 매우 감성적인 동기가 자리잡고 있다. ● 그래서 작가는 이 작품들을 '새벽일기'라는 제목으로 부른다. 2004년 개인전의 테마에 고심하던 새벽, 이슬 맞은 거미줄에서 느꼈던 환희, 밤을 지새며 고민하고 스케치하고 모형을 만들면서 새벽을 맞고, 그 새벽이 정리가 되는 시간으로 각인 되면서 작품의 제목에는 새벽에 발견했던 거미줄과 작품의 완결을 예고하는 시간으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거미줄의 테마는 변숙경이 지향하는 조심스러움, 또는 절제의 미학을 잘 보여준다. 사진을 찍을 때 거미줄을 보이게 해주었던 이슬과 그 이슬들이 결집하여 만드는 이슬방울 등은 작품의 테마를 위한 동기가 되었을망정 재현되지 아니한다. 거미줄이라는 공간 속의 평면구조 역시 철판과 동판에서 형상으로 나타나지 아니한다. 이들이 극도로 절제되어 나타난 결과는 틈새의 선, 입체화한 선, 회화의 형태로 나타난 선이다. ● 그러므로 틈새를 연결하는 섬세한 미학, 거미줄에서 비롯하는 섬세한 감성적 조형, 그리고 계절의 느낌이 색채로 치환되는 섬세한 심성 등이 거대 조형을 지향하는 작가의 대담한 야심과 잘 조화되어 전시장 자체를 하나의 섬세한 조형예술로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생활자체가 예술이고, 조형이고, 결과로서의 작품이라는 등식을 가능하게 한다. ● 이 틈새의 미학은 비단 벽에 걸리는 회화적인 조각에서 뿐 아니라 철조의 대작에서도 발견된다. 거대한 철판과 철판은 선의 의미를 증폭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용접된다. 그 간격이 틈새요, 그리고 틈새는 선이 된다. 마치 동양화의 여백처럼 거대한 철판의 조형, 잘 연마되고 색이 입혀진 동판의 사이에서 무용의 용처럼 기능 하게 된다. 무용의 용이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써, 쓸모 없어 보이는 것이 실제로 쓸모가 있다는 사상이다. ● 그렇게 선은 감성적인 발견에서 비롯하여 작품의 숨통을 틔어주고, 조각사 혹은 미술사적 성취를 가늠하게 하는 잣대가 되어준다. 미술사에서 미니멀 아트는 변숙경 작품이 설 수 있는 발판이 되었을 수는 있지만 그 미학은 사뭇 다르다. 변숙경의 조형은 미니멀 아트와 그 후속세대에서 발견될 수 없었던 조형적 성취를 보여준다.
미니멀 아트는 기본구조를 내세운다. 예술에 있어서도 기하학에서처럼, 또는 언어학처럼 단순화한, 기본구조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기하학에서는 삼각형, 사각형, 원이나 나아가서는 입방체, 공 등의 기본도형이 있고, 언어학에서는 알파벳, 가나, 가나다라 혹은 음절, 음소, 음운 등의 기본 소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미니멀 아트의 개념 미술적인 성격이요, 접근방식이었다. ● 미니멀 아트는 예술의 본질, 혹은 본질환원이라는 미학적 차원에서, 또한 개념미술의 연장선상에서 성대한 환대를 받았다. 20세기 미술에서 추구했던 회화의 본질, 조각의 본질 등이 미니멀 아트에서 구현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그러나 미니멀 아트의 극단적인 질주와 이윽고 자기모순, 그리고 자기해체에로 치닫게 된다. 그 동인은 미니멀 아트가 주창했던 강령, 바로 기본구조라는 데 있었다. ● 기본구조란 그 자체가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것일 수 있었다. 그래서 미니멀 아트, 혹은 미니멀 조각은 그 이상 단순화할 수 없는 기본 구조가 발견되고 공인되면 그 진화를 멈출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니멀 아트는 그 한계점에서 결국 기본구조 자체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미학을 도입하게 된다. 이름하여 '관객참여에 의해 마무리되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 이를테면 규격이 주어진 철판을 용접하여 육면체를 만든다면 어느 누가 만들더라도 크기와 모양과 느낌이 같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념은 부여할 수 있겠지. 개념미술의 작가들은, '개념이란 예술가가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모든 것'이라는 미니멀 아트보다 더 극단적인 강령을 개발해냈다. 예술가가 직접 땀을 흘리면서 손때를 묻힌 작품이란 개념미술, 나아가서 개념미술의 영향권에서 형성된 미니멀 아트의 입장에서는 '예술의 타락'이라 할만하다. 그 결과 익명성의 평준화된 작품이 양산되었고, 관객과 소장가의 외면을 불러오게 된다. ● 그 돌파구로서 등장한 것이 관객참여의 미학이라는 것이다. 미니멀 아트에는 관객이 필연적인 작품의 요소로 등장한다. 기본구조의 주변에 관객은 분위기로서, 작품의 완결된 구조에 어떤 부분으로서 기능 한다. 관객은 작품을 감상하는 객체이면서 작품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이 미니멀 아트의 한계요, 제약이라 할만하다. 관객이 없는 사진 속의 미니멀 아트는 누구의 것인가. 미니멀 아티스트의 것인가. 사진을 찍은 사람의 것인가. 아니면 그 사진을 보고 왜 이것을 작품이라 불러야 하는지 모르는 관객의 것인가.
반하여, 변숙경의 작품에는 미니멀 아트에서 발견될 수 없는, 또는 미니멀 아트를 초월한 미학이 있다. 거기에는 미니멀 아트에는 없는 것들이 있다. 공기가 소통되는 틈새가 있고, 미니멀 아트에서 기본구조에 몰두하느라고 놓쳐버린 선이 있다. 감성적 동기와 접근방식에서 비롯되는 작품의 일회적 완결성과 회화적 성취가 있다. ● 그러므로 변숙경의 작품은 그 자체로서 당당하고, 작품이 걸려 있는 벽면에서 당당하고, 작품이 놓여 있는 공간에서 당당할 것이다. 작은 작품과 큰 작품은 상대적 크기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독자적 위상을 가질 것이며, 동일 공간에서 질량과 크기와 형체와 색채가 틈새와 선과 공기를 매체로 적이 공존할 것이다. ● 관객이 없어도 자족적이고, 섬세한 감성적 어법과 조심스러운 조각적 선이 설치미술과 회화의 미학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세계야말로 야심적이고 담대한 세계가 아닌가. ■ 김영재
Vol.20060612b | 변숙경展 / BYUNSOOKKYUNG / 邊淑慶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