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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518_목요일_06:00pm
유아트스페이스 서울 강남구 청담동 101-6번지 Tel. 02_544_8585 www.yooartspace.com
2006 이혜민의 사적 깊이 ● 이혜민의 작품에서는 하나의 강렬한 덩어리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들이 모여서 여러 층을 이루며 같이 어우러지고 포개진다. 그녀가 오래된 천들을 바느질하여 만든 커다란 천과 배개에는 내적인 힘이 있다. 조각조각의 천이 모여 있는 것이었지만 평면적이기 보다 오히려 여러 겹의 깊이를 만들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다른 측면들이 만들어내는 인격의 깊이는 숨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 1999년에 전시를 앞에 둔 이혜민의 작업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의외로 도착한 곳은 시내 한 가운데 있는 아파트였다. 누군가가 현관문을 열어주면서 거실이 아니라 작업실로 반겨주었다. 평범한 가정집처럼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던 그곳은 분명 작업실이었다. 드로잉들, 붓, 아크릴 물감, 각종 미디엄과 나무판, 톱과 망치, 꺽쇠, 그리고 제작 중인 작품들. 어떻게 보면 그저 집안 인테리어를 조금 손 보고 있는 풍경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작업실에서 흔히 보던 모습이기도 했다. 삶 한가운데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익숙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면서 끊임없이 손을 움직이던 작가 이혜민을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
내가 그 곳에서 본 작품들은 몇 주 후에 토 아트 스페이스에 전시되었다. 하나하나의 오브제들은 주변에서 흔하게 보이던 것이었지만 전시 공간에서 새롭고 당당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것은 1996년 첫 번째 개인전 때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당시에는 상자의 형태가 많이 등장했었다. 네모난 나무판에 쓴 자신의 일기를 한장 한장 겹쳐서 투명한 상자에 담은 작품도 있었고, 천으로 만든 네모난 상자에 솜을 채워서 쌓아 놓은 작업들도 있었다. 이 작업들은 모두다 누군가가 다가와서 가지고 놀아주기를 그래서 형태를 변화시켜 주기를 기다리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작업들은 상자 안에서 끄집어내어 상황을 변화시켜 주면서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상황들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1999년 제2회 개인전에서는 작가가 이러한 상황에서 조금씩 벗어나서 힘이 없고 주변의 소소한 것들을 모아서 일으켜 세우는 행위가 작업의 중심을 이룬다. 오브제들을 하나씩 종이에 그려서 그 종이들을 매일 풀을 입히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 후 다시 풀을 입히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서로가 의지하며 형태를 만들어 일으켜 세웠다. 즉 작가의 손길을 거치면 혼자서는 아무 가치가 없는 종이가 힘을 받아서 형태를 이루고 결국에는 공간에서 독립하게 되는 것이다. 별 것 아닌 풍경 즉 선반 위에 물병이 놓여져 있고 그 앞에는 옷이 의자에 걸쳐져 있는 장면을 종이로 캐스팅하여 만들어 낸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 일상의 오브제들을 모든 비슷한 크기로 종이 위에 그려서 그것을 가지고 봉투를 만든 The Memory 라는 작업이 있었다. 이 작업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측면을 가진다. 자그마한 반지, 옷핀 에서부터 망치까지 모두 비슷비슷한 작은 크기로 줄어들어서, 각각의 물건과 관계가 되어 있음직한 무언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볼록한 모양을 취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이야기들이 당당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소한 기억을 다루는 작업은 자연스럽게 The Pillow 로 이어진다. 이 즈음에 이혜민은 작가로서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1999년부터 뉴욕에서 머무는 동안에 스스로를 새롭게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많은 것을 찾아냈다. 비디오카메라를 손에 들고 새로운 방식으로 일상을 관찰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과 고유한 감각으로 돌아가서 할머니의 오래된 천 조각들을 모아 베개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신을 관찰하고 일으켜 세우는 과정은 이혜민이 2002년 뉴욕 소호에서 가졌던 『The Pillow』라는 타이틀의 네 번째 개인전을 통해서 드러난다. 스스럼없이 가장 값싸고 흔한 종이를 골라 그 위에 여러 가지 물건들을 그려서 만든 베개와 자신을 성찰하는 일기나 노트를 작업으로 발전시켰다. 베개 작업이 과거에서부터 일상의 기억 조각을 모으는 것이라면, 2003년 사간갤러리에서 열렸던 『The Pillow』展에서 보여준 비디오 작업은 더 현재적으로 제시되는 일상의 파편들이 한 프레임을 구성한다. 오래된 천들을 발로 밟고 지나가는 느낌, 차가 달리기 시작해서 나뭇가지들이 속력에 따라서 스치고 사라지는 풍경, 자동 세차장 안에서 차창에 물과 거품이 일어났다가 씻겨 사라지는 한 프레이즈, 주방에서 끓는 물에 비치는 전등 불빛의 등퇴장. 이혜민은 이 일상의 이미지들에 빠져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내버려두지도 않는다. 이러한 상황들을 관조하고 별다른 기교나 효과 없이 영상으로 가져오는 작가의 태도가 결국 이들을 작품으로 끌어 올리게 된다. 브레인팩토리에서 열렸던 2004년 개인전에서는 작가의 외부에서 벌어지는 일들 이를테면 세탁기에서 빨래가 돌아가고, 해가 움직이면서 그림자도 따라서 움직이는 사건들의 속도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관조하는 작가는 철저히 자신의 내적인 속도 이상을 내려고 하지 않는다. 이미 진행 중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흐름에 몸을 맡기며 상황 자체를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조적 태도는 2006년展에서도 계속 유지된다. 하지만 그 상황을 보여주는 태도는 예전보다 더욱 비결정적인 태도를 추구한다. 이미지들의 여러 레이어를 보여주고 있지만 처음과 끝이 존재하는 하나의 프레이즈로 완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보자기에 싸여진 신체는 한번 몸을 일으켜 세우는 듯싶더니 계속해서 조금씩 움직일 뿐이고, 시작과 끝이 없이 계속되는 파도를 통해서 시간의 레이어를 보여줄 뿐이다. 이는 상황 자체가 이미 여러 층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다 표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파도와 바다 속을 관찰하는 이미지를 같은 시간에 나란히 보여주는 비디오 작업 moving mind도 이러한 작가의 생각을 더 구체화한다. 레이어를 통해서 이미 현재적 상황을 그대로 제시하는 태도는 필로우 시리즈에서 이미 보여진 것이다. Passage 시리즈를 통해서도 이혜민은 과거에 작품의 틀로 사용되었다가 버려진 낡은 액자의 나무틀에 주목하고, 이를 가져다가 손질하고 다시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버려진 액자의 나무틀들이 평면적으로 모여서 이루어 내는 깊이는 우리를 하여금 또 다른 시간의 통로를 경험하게 한다.
그렇다면 In a Dream은 어떤가. 이것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된 것이다. 병원에서 치료를 위해서 아픈 부위에 파라핀을 부으면 파라핀은 서서히 굳어지면서 온기와 치유를 남기게 된다. 그리고 파라핀은 나의 아픈 부위의 모습으로 굳어지면서 반작용처럼 치유 작용을 일으킨다. 여러 번 거쳐서 파라핀을 드로잉들과 갖가지 일상의 물건들 위로 부으면, 색색 파라핀의 불투명성은 여러 층위를 가지면서 그대로 굳어진다. 재료의 특성으로 인해서 당시의 상황이 불투명하게 남는 것이다. 이 파라핀 작업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붓는 행위 - 「 anointing」이다. 바느질로 인해 오래된 천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었다면 파라핀을 사물들 위에 붓는 행위는 불완전한 일상의 파편들에게 새 몸체를 제공해주는 일이다. 이렇듯이 별 것 아닐 수 있는 각각의 상황이나 오브제들이 작가의 관조적 시선을 받아서 여러 층위로 제시되면, 그 전체의 맥락은 이혜민의 작품세계 안에서 새롭게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는 구원은 사적인 것이라고 못 박듯이 말 한 적이 있다. "구원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라고 말함으로써... 진실성과 자율성에 대한 그들의 사적인 희망은 그들의 몫으로 남겨져야 한다." 이혜민에게 어떤 것이 소중한 것이고 예술로서 사람들과 같이 공유되어야 할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지게 되면 그것은 그 순간 새로운 희망의 맥락 안에 놓이게 된다. 그녀의 작품을 통해서 일상의 사소한 상황들이 여러 층위들로 제시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부분들이 일으키는 상승작용을 통해서 사적인 깊이를 경험하게 된다. ■ 이수영
Vol.20060524c | 이혜민展 / LEEHYEMIN / 李惠旼 / painting.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