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암 그림

류장복展 / RYUJANGBOK / 柳張馥 / painting   2006_0322 ▶ 2006_0404

류장복_2004.8.24 14:30~18:06 신설동에서_종이에 목탄_78.5×109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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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322_수요일_06:00pm

창 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B1 Tel. 02_732_5556 www.changgallery.net

회복하는 기록의 매체: 류장복의 사생 ● 2001년 강원랜드의 메인 카지노가 준공될 즘 그 인근 철암은 몇몇 건축가, 조경관계자, 환경 보존론자, 그리고 미술가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들은 과거에 융성했던 탄광 산업의 몰락으로 회복된 자연생태에, 그리고 개발의 힘을 피한 몇 점의 건물이 지닌 역사성에 각각 주목했다. 당시 타지역에서 좀처럼 찾기 힘든 철암의 외관은 이들의 기술과 창의력이 지역에 기여할 것이란 기대를 자극했다. 류장복은 같은 해 늦가을 그 곳을 답사한 뒤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미술가, 동호인 그리고 주민들과 함께 미술로 그 기대를 실천해 오고 있다. 최근 그 활동이 철암의 가능성을 새롭게 보이게 한 것으로 종종 언론 매체를 통해 주목받고 있다. ● 그럼에도 단순한 종이와 간단한 재료로 제작된 류장복의 철암 풍경화들은 얼핏 지나칠 정도로 소박해 보인다. 개인 류장복이 제작한 몇 점 회화들로 지역민의 소망을 만족시키거나 개발과 환경의 보존과 같은 시대적 문제의 해결에 기여할 직접적 암시를 찾기는 힘들다. 더욱이 다양하고 복합적인 매체가 이미 삶의 외관과 환경을 지배하는 오늘날 얇은 평면에 한정된 소묘와 칠이 지역의 가능성을 새롭게 했다는 반응을 지속시키기에는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다. 나는 류장복이 창출한 구체적 관람자의 반응을 통해 그 기대가 실현될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류장복_2003.11.16 13:06 선탄장_종이에 목탄, 수채화_20×50cm_2003
류장복_2003.11.2 12:23 신설동_종이에 목탄, 수채화_20×50cm_2003
류장복_2004.2.3 17:30 붐비네 아구찜_종이에 목탄, 수채화_20×50cm_2004

2002년 9월 태풍 루사가 막 지나간 철암 한 복판에서 류장복이 그림을 그릴 때 한 주민을 만났다고 한다. 당시 류장복은 수해 현장에서 한가로이 그림이나 그리고 있다고 그가 힐난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단다. 하지만 그 남자는 의외로 "그림도 수해를 입는군!"이라며 중얼거렸다. 류장복은 기후에 아랑곳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야외에서 그렸을 뿐이다. 그 사내는 빗방울에 번져버린 목탄의 시각적 에피소드를 주목했고 정확히 그것을 의식하는 자신의 반응을 표현한 것이다. 이 때 그 지역민은 관람자가 된다. 같은 해 1월 류장복이 그 곳의 저탄장을 그리고 있을 때 한 노인을 만났다고 한다. 류장복의 생각으로는 그 노인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재주도 좋소" 정도의 기술적인 것에 반응 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는 "추운데 뭐 하슈"라며 류장복의 손끝이 아닌 제작행위 그 자체를 주목했다고 한다. 제작의 행위에 대한 관심은 곧 그것에 추위라는 삶의 습관을 비교하는 의식이다. 제작의 형식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의식한 그 노인은 관람자가 된다. ● 관람자의 창출은 예술가의 사회적 존재를 가능케 한다. 류장복의 평면과 행위를 주목하고 그것에 자신의 습관적 일상과 충돌시키면서 적극적으로 의식하는 사람은 류장복 매체가 창출하는 관람자이다. 이 사람은 그 앞을 그냥 지나치는 방관자와 다르다. 2003년 3월 류장복은 먼 산에 흰 눈이 남은 채 나무 가지에 피어오르는 봄기운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때 운동복 차림의 노부부를 만났다고 한다. 그들 중 부인이 류장복이 그린 나무가 진짜 같다고 하면서 그것이 그냥 쓱쓱 문지른 결과라는 것을 주목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것을 그린 목탄에 관심을 가지며 "숯검뎅이 같은"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집으로 가 커피를 다려 와서 화가에게 주더라는 것이다. 삶과 구별되어 보이는 대상을 목격하고 시간이나 자산을 소비하는 사람은 몰입자다. 시간이나 자산은 삶을 지탱시키는 결정적인 것들이다. 몰입자는 주로 음란물 앞에나 노출되었기에 창출되었다. 류장복의 풍경화에는 기후의 변화에 따른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들은 구상적 재현을 통해 직접적으로 암시되기보다 안료나 바탕에 작용하는 재료의 상태로 녹아 있다. 류장복은 특정의 기후를 재현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평면을 그 기후 속에 담구었다 뺀 흔적을 제시한다. 이는 시각적 조작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미술가는 대상을 자신의 제작 습관과 방식대로 그리는 공정 그 자체를 철암의 기후에 온전히 내어 준다. 따라서 여기에는 미술가의 태도와 선택이 대상 재현 공정과 함께 대등하게 공존한다. 이는 대상의 기록과 기후의 기록을 동시에 성취하게 한다.

류장복_2004.3.21 17:49 철암, 봄_종이에 목탄, 붓_56×76cm_2004
류장복_2004.2.8 정오무렵, 흥복사 앞에서_종이에 목탄_56×152cm_2004

대상을 시각의 영역으로 포착하려 하는 한, 사람들은 그것을 고정시키려 한다. 그래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파리 하나는 허공에 정지된 것으로 회화에 재현된다. 이 멈춤이 파괴될 때 회화는 다른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류장복은 자신의 평면이 회화의 견고함을 유지한 채 움직임을 기록하게 한다. 이들 상반된 속성의 결합을 통해 그의 화면은 시간과 변화의 기록에 도달한다. 류장복은 기후를 회화의 재료로 활용함으로써 그림이라는 예술적 형식이 수해를 입는 인격과 비교되는 관람자의 새로운 각성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 화가의 제작 행위를 주목한 철암의 한 노인이 관람자가 된 것은 화가의 몸이 추위에 노출되었기에 가능했다. 류장복은 자신의 화판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마저 철암의 대기에 내어 던진다. 추위는 화가의 손을 굳게 하고 몸에 통증을 야기한다. 고통은 사람이 스스로 몸을 정확히 의식하는 지점이다. 안락함은 몸의 쾌락을 알게 하지만 사고의 사치스런 깊이를 더하게 한다. 류장복은 "사유와 의식을 허용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철암에 부려 놓았다"고 한다. 부려 놓는 대상은 살았으되 인격이 없다. 오직 몸의 가치로 생존을 영위하는 것은 가축 정도일 것이다. ● 그의 회화 표면은 곱은 손의 움직임과 통증의 몸짓으로 재현된 대상들 곳곳에 남기고 있다. 미술가의 몸은 환경에 노출되었으되 철암을 구성하는 대상에 반응한다. 몸은 여기서 그 대상을 묘사하는 재료가 된다. 미술과 회화에 관한 숱한 정보, 훈련받은 습성, 조작의 곁눈질, 이들이 미술가는 대상의 진실을 가리거나 각색하는 원인으로 간주한다. 이것들은 류장복의 자의식이자 스스로 자신임을 주장하는 기억이고 그의 과거이다. 그렇다고 류장복은 이것들을 전부 버리고 행위만을 매체로 삼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는 사고의 지속을 가능케 하는 이 의식을 그대로 몸과 충돌시킨다. 생소한 그 충돌을 목격한 노인은 자신의 마음으로 통합하며 추위에 대항하는 자신의 습관적 일상을 "추운데 뭐 하슈"라는 적극적 표현으로 지적해 냄으로써 관람자가 된 것이다.

류장복_2004.1.10 16:36 철암 큰 장날_종이에 수채화, 콘테_56×76cm_2004
류장복_2004.9.18 14:46 철암로, 비_종이에 목탄_40×60cm_2004

운동복 차림의 노부부는 그려진 나무와 현실에 실재하는 나무간의 비교를 통해 관람자가 되었다. 류장복의 철암 연작은 기후의 영향이 제작 공정에 아무리 크게 미치더라도 그리고 몸의 표현이 극단적으로 폭발하더라도 결코 대상의 경험 가능한 암시를 놓치지 않는다. ● 이는 얼핏 미술가 스스로 꺼려하는 사유와 의식의 조작을 허용한 것으로 보일 법하다. 하지만 류장복의 회화 평면에 일관되게 유지하는 대상의 구상적 재현은 시각적 가공에 의해서 이기보다 오히려 망막에 감지되는 사건을 기후 속의 사실로, 그리고 몸의 진실로 기록하는 것에 훨씬 더 많이 의존한다. 그 결과 견고한 시각의 매체인 회화가 기후나 시간과 같은 비가시적 유연성을 포함해내고 몸을 회화의 재료로 활용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 그의 회화는 사진기 렌즈가 번역해 내는 날렵한 시점의 원근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 않다. 풍경에 등장하는 뒷산의 규모가 전경의 대상을 훨씬 능가하거나 전경이 후퇴하기도 하는 역동성과 간간이 역원근법의 구조를 띤다. 그 결과 공간이 압축되어 보인다. 가로의 비례가 세로에 비해 통상적이지 않고 훨씬 더 긴 규격의 화면에서마저 대상들은 광활함을 잃은 채 전방의 관람자에게 접근하려 한다. 이 비례의 화면은 대게 수평선이 크게 드러난 장면이나 황량한 깊이의 공간을 가진 풍경을 위해 디자인되고 또 그렇게 줄 곧 사용된다. 이 점은 얼핏 세잔의 회화 공간과 유사해 보일 법하다. 하지만 류장복의 화면은 망막에서 진행된 신체의 경험적 사건과 몸의 증상에 관한 기록인 점에서 세잔과 거리가 있다. 뭣보다 장면의 실재하는 현장감과 지역의 특성이 맵핑(mapping)된 점에서 더 멀어 보인다. ● 류장복은 자신의 회화 공간을 "생물"적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이 술어를 생기와 실재감 정도로 연결해 보지만 그것의 정확한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앞의 관찰을 통해 류장복이 자신의 매체를 진실의 추구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고 그 맥락에서 어림짐작할 뿐이다. 미술가에 의하면 "생물"적 회화공간은 그 스스로 자신을 매체화하는 방식이고 신체의 물리적 진실과 대상의 시각적 진실이 통합되는 지점이라고 한다. 한편 류장복이 철암을 처음 찾았을 때의 인상이 이 말의 의미를 더 보증할 것 같다. 미술가는 철암을 처음보고 유년기에 자신이 살았던 도시 변두리의 풍경과 흡사한 점에서 진한 향수를 비릿한 냄새처럼 느꼈다고 한다. 여기서 그 "생물"의 의미는 물리적 감각이 회복되고 원초적 감성을 자극하는 대상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 몇몇 전봇대와 전선이 있는 풍경화들에서 전선의 굵기가 그것을 그을 때 사용된 목탄의 실제 두께보다 더 두텁고 진한 것들이 간간이 있다. 또한 그것들은 제작자의 몸짓이 그대로 실린 상당한 속도감으로 화면을 지난다. 단순한 행위와 선만으로 대상의 재현을 만족시킴과 동시에 재료의 물리적 속성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 재현은 재료의 속성을 가리는 것에서 출발하는 시각적 환각일 것이다. 류장복의 몇몇 전선은 목탄의 물리적 속성이 마음껏 구현됨으로써 사물을 암시할 것을 요구하는 재현으로부터 훨씬 자유롭다. ● 류장복의 풍경은 자연의 풍광만으로 채운 관조적 시점이거나 사람의 생활 현장에 밀착해서 메시지를 전하려는 공격적 시점이 아니다. 자연과 인공이 함께하거나 사람이 머물렀던 온기가 간헐적으로 남은 정도의 절충적 공간이다. 어느 한쪽을 택하지 않은 상반된 속성의 공존은 대립이거나 충돌이다. 류장복의 공간은 이런 충돌과 마찰을 통해 시각적 사실이 후각이나 촉각과 같은 여타의 원초적 감각을 파생하게 하고 또 관람자에게 그렇게 번역되게 한다. ● 철암에서 류장복이 목격한 개발 대 퇴보, 인공 대 자연과 같은 마찰이 비릿한 냄새를 회복시킨 것처럼 류장복의 회화공간은 관람자의 마음에 통합될 상반된 속성이 한 곳에 있는 절충적 특성으로 파악된다. 운동복 차림의 노인은 숯검정의 물리적 진실과 평면에 보이는 검은 형태를 자신의 마음에 나무로 통합해 내는 기쁨으로 기꺼이 류장복에게 자신의 중요한 삶의 자산을 주었던 것이다.

류장복_2005.9.26 15:36 함백산 정상, 맑음_한지에 잉크_63.5×93.5cm_2005

류장복은 매체를 마주하고 제작하는 순간 몰입한다. 이 과정에서 그를 둘러싼 실재하는 공간이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상관하지 않는다. 이 때 그는 몰입을 방해하는 여러 요소들에 등 돌린 채 자신의 평면을 향해 있다. 미술가는 사유나 기억과 같은 삶의 영역들을 등 뒤에 잠시 내버려 둔다. 그러던 중 류장복은 두었던 삶의 자리로 되돌아와 고개를 갸우뚱하며 몰입의 결과물을 거리를 두고 본다. 여기서 류장복은 관람자가 된다. 그가 막 손을 땐 매체와 그의 삶을 충돌시키기 때문이다. 제작자가 점유한 관람자의 자리는 곧 비평을 낳는다. 류장복의 사생 연작은 철암이라는 특정의 지역에서 몰입자와 관람자, 이 양자간을 오가며 끊임없는 긴장을 수행한 개인적 경험들의 기록이다. ● 그것들 간의 간격을 통해 류장복은 그리는 주체가 지닌 사유를 비울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이 영역은 또한 그의 말대로 원초적 진실인 "생물"을 회복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하다. 류장복의 매체가 소박한 크기의 사각형 평면이고 그 방식이 제한된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지만 그것은 분명한 관람자를 창출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뭣보다 사생을 통한 기록을 실천함으로써 복구와 보존의 목적을 일깨우고 있다. 그는 망막에 잡힌 원초적 자극에 반응하고 몸에 감지되는 움직임을 진솔하게 기록하는 방식을 회화로 실천한다. 류장복의 연작을 통해 사생은 조작되지 않는 기록을 온전히 수행하고 관람자의 비평을 창출하는 구체적 방식임이 확인된다. 조작의 가능성을 제거한 기록으로서의 매체는 철암의 생태환경과 역사성에 관한 어떠한 의견이나 실천이든 우선 그것들이 수행되기 전에 조회할 방법론적 모델이 될 것이다. ■ 이희영

Vol.20060322b | 류장복展 / RYUJANGBOK / 柳張馥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