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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201_수요일_06:00pm
모란갤러리 1,2전시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28번지 백상빌딩 B1 Tel. 02_737_0057 www.moranmuseum.org
풍경으로 듣는 철암의 애가(哀歌) ● 멀고 먼 철암. 지도를 펼쳐도 쉽게 찾아지지 않는 그곳에 류장복은 화구를 챙겨 다닌다. 아직도 천진난만한 웃음이 비시시 배어 나오는 얼굴에 새어버린 머리를 하고 그는 여전히 철암에 발길을 내친다. 그렇게 발 품을 파는 작가의 품새는 어느새 철암을 닮아버린 듯 하다. 서울 길음동에서 세탁소를 하는 대한민국의 한 필부의 아들로 태어나 '산전수전' 다 겪은, 화가라는 직업도 아닌 허울좋은 직함이 나쁘지 않은지, 그이는 두꺼운 손마디 사이에 검은 목탄을 집어든 채로 철암의 곳곳을 쑤시고 다닌다. 줄여 말하면, 그의 철암기행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 강원도 태백시 철암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해야겠다. 지명이 슬그머니 비추어 내는 이미지는 한 고향마을을 연상시키기에는 차고 춥고 그리고 멀다. 이웃하는 태백, 사북, 황지, 고한처럼 강원도의 깊은 곳은 아마도 오랜 옛날 어떤 이유든지 간에 터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겨우 화전이나 하면서 살아가던 곳이었으리라. 그런 생각인지, 철암이 고향인 이들에게 미안하지만, 철암은 상식적으로 떠올려지는 어머니 같은 고향의 모습은 아니다. 물론 거기에도 사철이 있어 꽃이 피고 꿈을 담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적어도 외지인인 나에게 철암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먼 곳일 뿐이다. ● 지리적으로 보면 태백산맥의 산세가 동해로 그 자락을 내면서 패인 깊은 계곡과 손바닥만한 터 위에 자리 잡은 곳이 철암이다. 청량리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스산하고 골깊은 강원도의 철길을 따라 네 다섯 시간을 소요해야 겨우 태백에 도착한다. 그리고도 흔들리는 버스 속에서 한 시간 가량을 더 가야 되는 곳. 한때 들뜬 인구로 북적거렸을 이 동네는 지금은 빈집들로 남겨진 소위 폐광도시 중 하나다. 가끔씩 들러보는 그곳은 황량한 거리와 그 좌우로 질서 없이 늘어선 집들과 그리고 그것을 에워싼 강원도의 험한 산세로 기억될 뿐이다. 그러나 철암은 잊혀질 만하면 기억의 한 구석에서 나의 관심을 지남철처럼 잡아끄는 묘한 향수를 남겼다. 뭐라고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매번 철암을 다시 찾을 때마다 나는 후회와 함께 끌림에 대해 질문을 했었다. ● 철암이 세간에 알려지고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은 석탄 때문이다. 이제는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70년대에 웬만한 사람들은 겨울철을 앞두고 김장을 담그고 연탄을 쟁였다. 그리고 서울 근교에는 큰 화력발전소가 석탄 땐 연기를 뿜어내었다. 바로 이 시기에 철암은 다른 강원도의 탄광도시들처럼 사람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철암은 석탄을 모으고 저장하고 보내는 일종의 허브도시였다. 지금도 덩그러니 남아있는 철암역사(驛舍)와 그 앞에 얽혀있는 수많은 선로들 그리고 선탄시설들이 당시의 규모를 대강이나마 짐작하게 한다. 탄좌와 탄광들 그리고 광부들이 이곳에 자리를 틀었고, 그렇게 이 동네는 찾아 들어온 인파로 좁았다.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입에 물고 다녔다"는 말이 진지할 정도로 경기가 좋았단다. 어두운 갱도는 수십 수백 킬로미터에 이른다는데, 여기 강원도 깊은 곳에 찾아온 사람들은 그것도 모자라는지 더 깊은 땅속으로 들어갔다. 탄가루 낀 목을 삼겹살과 막걸리로 달래면서, 막장까지 온 인생들 사이의 심심찮은 욕지거리와 주먹다짐도 보았고, 월부로 들여놓은 3단 전축 위에 나훈아의 노래를 들으면서 새끼들 숙제하는 모습에 흐뭇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 석탄은 산업의 밥으로서의 명성을 잃었고, 사람들은 그곳을 떠났다. 한 몫 잡은 사람들도 술판과 화투판에 목숨과 맞바꾼 돈을 날린 사람들도 철암에서 떠나갔다. 철암역 앞에 벽처럼 가로막은 저탄장의 규모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는 철암의 시가지는 미처 떠나지 못한 사람들만이 빈집들 사이에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 철암에 류장복은 2001년 4월부터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의 '철암그리기'를 한 장소를 단지 그리는 것으로만 보지 말았으면 한다. 그의 철암 풍경은 철암과 작가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며, 그 관계는 작가의 개인사에 있어 큰 비중으로 자리잡았다. 그가 그다지 그릴 것도 혹은 그릴 곳도 마땅하지 않은 철암을 사시사철 누비는 것은 단지 그리는 미술행위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그린다는 것은 대상의 인상이나 이미지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알아 가는 행위, 즉 글과 말을 통해 대상의 윤곽을 잡고 그 대상의 속성을 이해해 가는 것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그의 그리기 행위를 설명할 수 있는 첫 번째 근거가 마련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그는 대상을 이해하는 과정을 지나 그것과 호흡을 맞추고 더 나아가 그것과 동등한 어떤 것을 마련하려고 한다. 그는 내게 그것을 "생물"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개념이 내게 생소한지라, 즉물적인 것 혹은 즉자적인 어떤 것을 떠올린다. 그의 "생물"이란 우선 대상에 대한 그리는 사람의 주관과 작위적인 개입을 최대한 배제한다는 의미로서. 미학적인 보정 따위의 절제를 말한다. 그래서 그리는 행위가 마치 주체가 객체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속에 있다는, 다시 말해 대상 속에서 본질적인 것들을 일구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본질적인 것이란, 작가에게, 시각적으로 인식된 것들이 아니라 원초적인 감각으로 기억된 과거의 재구성이다. 철암풍경은 신체적인 체험과 과거의 한 기억이 조우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류장복의 풍경이 지니는 즉자적인 성격은 풍경이 지시하는 장소의 특수성과 그의 신체가 결합되어야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그의 신체의 반응이 만들어낸 풍경은 오히려 촉각적으로 - 작가의 주장에 의하면 그것은 후각이다 - 감상되어질 그림이다. 작가가 신체로 받아들이는 소위 생물적 감수성은 한 때 그가 썼다는 시의 정서만큼 외설적이다 - 외설이 갖는 진정한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며 시를 읽어보길 바란다. ● 「그림 그리기」 눈을 파낸다. / 그 때 실핏줄을 타고 영혼이 발기하면, 재빠르고 또 무겁게 그 너머로, / 난, 뇌 한 조각을 먹는다. / (2005년 5월 15일 03시 18분 일산에서) ● 그만큼 그의 그림은 즉물적(혹은 생물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묘사에 만족하는 실경(實景)은 아니다. 오히려 보이는 현상 속으로 더 침투해서 대상의 어근을 캐내려는 진경(眞景)에 가깝다. 그래서 풍경은 간결한 문체로 요약된 시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풍경은 상세한 사진으로 보는 철암보다 더 철암답다.
류장복의 철암풍경은 56과 76센티미터 정도의, 그러니까 그가 지니고 다닐 수 있는 한 가장 큰 크기의 화면 위에 그려진다.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는 것을 보았지만, 그가 주로 손에 쥐고 다니는 재료들은 대체로 초보적이고 단순한 것들이다. 종이, 목탄, 먹과 붓 정도가 내가 보고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소묘를 위한 재료이겠거니 혹은 휴대에 용이하고 다루기 쉬운 재료이니까 하는 단순한 판단은 유보해야 한다. 그것은 류장복이 의도한 바를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단일한 색조로 구성되는 철암의 풍경을 보자면, 그 재료 만한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사실 나도 철암을 수 차례에 걸쳐 사진 촬영을 했다. 그런데 필름이나 디지털 이미지로 보관된 상을 출력했을 때, 그 사진들이 대개 흑백사진에 가까운 모노 톤을 띠고 있다는 점에 적지 않게 놀랐다. 철암은 오랜 시간에도 불구하고 탄가루를 털어 버리지 못한 것이다. 주위의 자연도 그렇지만, 집과 가게 그리고 공장들은 더욱 일색이다. 그러나 작가의 검은 색은 단지 탄가루에 찌든 철암의 모습을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동양화를 전공하시는 분들의 말을 잠시 빌어보면, 먹은 만 가지의 색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류장복의 풍경들은 현대적인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그의 먹이 종이 위에 적어들어 만든 얼룩이나 면도, 목탄으로 그어진 선이나 문질러진 자국들도 단순한 색감은 아니다. 가령 다른 계절에 그려진 비슷한 풍경들을 비교해 보면, 계절의 색깔을 분명히 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류장복은 인물을 몇 그리긴 했지만, 전적으로 철암의 풍경에 천착했고, 그 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제 물릴 만도 한데, 아직 더 그릴 것이 남아있는지 궁금한 나의 시선엔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 화판을 들고 걸어가다가 한 곳에 주저앉아 그리기 시작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나는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는 자세는 더욱 가관이다. 땅에 내려놓고 그리거나 휴대용 접이식 의자에 화판을 기대놓거나, 이도 저도 안되면 한 팔에 들고 그리는 그의 모습은 진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자세가 안 나오는 곳에서도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 처연할 정도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그리기는 날씨에 관계없는 전천후 행위이다. 비가 오면 맞았고, 혹한의 겨울에도 곱은 손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그 신체적 고통 속에서 이성의 작동을 중지하고 신체의 감응에 충실해진다. 그런 식으로 웅크린 그의 등뒤에서 화면과 풍경을 오가는 시선 속에 그려지는 그림을 볼 때, 그가 대상과 생물적 대화를 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기는 그에게 자기만의 독특한 소통 방식과도 같다. 선을 긋거나 손으로 비비거나하는 행위들이 대화를 위한 일종의 제스처처럼 느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다.
사실 철암은 풍경의 대상으로서 최적의 장소는 아니다. 가파른 산은 멋없이 높고 그렇다고 기암절벽이 화려한 능선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산을 덮은 나무들도 흥취를 불러일으키기에는 함량미달이다. 그런데 작가는 기어코 우리에게 새로운 앵글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특별하진 않다. 구도만을 보자면 오히려 단순해서 지루할 지경인 것도 있으니까. 시가지를 살펴보면 더욱 한심할 따름이다. 같은 장소에서 거의 같은 시각에서 본 것만 해도 여러 가지이며, 같은 장소에서 다른 시간에 그린 것도 적지 않다. 아마도 그 작은 동네의 온 골목과 산길을 다 후벼도 더 이상의 앵글이 나올 것 같지도 않은데, 그는 여전히 찾아다니며 그린다. 그러나 이런 반복은 철암과 작가사이의 대화하는 방식이며, 지속적인 만남 속에서 소통의 언어를 다듬는 노력이라는 사실을 한참을 지난 뒤에야 알았다. ● 천변을 따라 중앙통으로 연결되는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서서히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는 저탄장은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기념물로까지 지정되었다고 하는 거대한 방풍막이의 양감을 보면 그가 얼마나 대상들과 일체화되었는지를 짐작하게 된다. 또한 천변에 줄지어 서 있는 콘크리트 건물들과 월천동 산기슭에 붙어있는 집들, 삼방동의 미로와 같은 골목들과 비탈진 길들은 시간의 누적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아직도 남아있는 삶의 고단함을 표현한다. 똥골의 고랑들 그리고 돌구지의 음침한 폐가로 남은 숙소 등은 현재형으로 남아있는 과거의 잔흔을 보여준다. 작가의 서사성은 흔적으로 남은 인간의 삶을 그리기 위한 도구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의 풍경에는 인간의 흔적을 지닌 것들이 꼭 함께 한다. 그리고 거기서 삶의 흔적을 - 이것은 더 나아가 개인과 한 사회의 역사를 대신하기도 한다 - 찾아 읊는 방식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풍경에서 주목해야 될 대상은 오히려 읽고 기록하는 그의 눈과 손인 것 같다. ● 그러나 언급했듯이 그의 시선은 너무나 평범하여 작금의 독창적이고 기발한 그림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특별하게 보일 정도이다. 그냥 그런 것이 특별해 보이는 이 현실과 그런 현실 속에 익숙해진 나의 시각이 사실은 문제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주는 평범함이 편안함이나 어떤 안정감을 일구어내지는 않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풍경의 실질적인 이야기를 수사학적으로 절제하여 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제된 형상언어로 그려진 대상들은 관객 앞에서 매우 오래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형상들은 엄청난 양의 이야기들을 압축해 놓은 것들이다. 이것은 "단순한 묘사인 경우에도 한 사회가 지니는 인간의 우주론적 혹은 도덕적, 사회적인 위치에 대한 서사를 포함한다" 라고 작가 자신의 블로그에 걸어 두었던 문구와 의미 일치한다. ● 그의 철암그리기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나 현장 보존용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철암을 읽고 전하는 방식이 서사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서사(epic)란 그 대상과 그 대상을 읊는 주체간의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연관성을 전제로 한다. 한 예로서 그리스의 고대시인 호머가 전하는 일화가 있다. 오디세우스가 그의 귀향 길에서 잠시 한 섬에 머물렀을 때의 일이다. 그는 동행했던 시인 데모도코스에게 트로이의 전쟁을 읊도록 요구했고, 시인은 주군의 명령을 따라 그것을 노래했다. 조용히 듣고 있었던 오디세우스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과거를 노래하게 했을까 그리고 왜 이미 아는 과거에 대해서 눈물을 흘렸을까? 서사는 아는 것을 복원하는 능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사는 반복해서 인간의 심층 속에 서린 감정을 북돋고, 그것에 카타르시스를 덤으로 안긴다. 그래서 서사는 한 역사나 과거에 대한 반성적이며 감성적인 재연이며 자의식과 기억에 뿌리를 둔 예술인 것이다. 류장복은 철암을 재현하는 것도, 설명하는 것도 그리고 더 나아가 해석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철암의 기억을 자신의 타령(서사에 가장 가까운 우리말이다)에 맞추어 사람들에게 노래할 뿐이다. ■ 김정락
Vol.20060202b | 류장복展 / RYUJANGBOK / 柳張馥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