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31025a | 한은선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6_0208_수요일_05:00pm
갤러리 상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9번지 Tel. 02_730_0030
I Saw the Sea ● 어떤 부족이 있었다. 이 부족에는 성년이 된 청년들을 뽑아서 기량을 확인하고 가장 뛰어난 사람을 선정하는 풍습이 있었다. 방법은 해가 뜨기 시작해서부터 해가 지는 시간동안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 위의 가장 높은 곳까지 다녀오는 것이었다. 게임의 규칙은 정해진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것과 산의 높이 마다 달리 자라고 있는 야생초를 뽑아 옴으로써 어떤 참가자가 가장 높이 올랐었는지를 가늠 하는 것이다. 새해 초가 되자 여느 때와 같이 풍습이 실행되었다. 참가자는 총 네 명이었고 이들은 동이 트자마자 모두 서둘러 출발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오후가 되어 청년들이 돌아오기로 한 곳에 모여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해가 질 무렵 참가자 중 세 사람이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땀으로 범벅이 된 이들 손에는 각각 다른 풀과 꽃이 들려있었다. 그런데 해가 지고 어둠이 깊어진 시간까지 마지막 한 명의 참가자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시간이 종료된 후라서 마지막 청년은 아무리 높은 곳의 꽃을 꺾어 온다고 한들 소용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혹시 사고라도 생긴 것이 아닐까라는 조바심을 가지고 청년을 기다렸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달빛이 또렷해지자 멀리서 청년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상처투성이에 매우 지쳐보였으며 두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그를 염려하기도 하고 어찌된 일인지 궁금해 하기도 하였다. 청년은 지친 기색이었지만 힘차게 말하였다. ● "제가 간 곳은 꽃도 없고 나무도 없는 곳이었어요. 오직 바위와 차가운 눈 뿐 이었죠. 춥고 미끄러워서 넘어지고 상처도 났어요. 하지만, 전 보았어요. 저 멀리서 푸르게 빛나고 있는 바다를 보았어요."
●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과학의 발전은 신비와 경외감을 느낄 정도까지 이르렀다. 인간은 우주공간을 탐사하고 있으며 아원자 세계의 비밀을 밝혀내면서 놀람을 금치 못하게 되었다. 급기야 생명에 인위적 조작이 가능해지는 세계가 도래하게 되었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지경은 아니지만 생명의 변형과 복제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렇게 기술이 발달하면서 새로 밝혀지는 사실들이 늘어가지만 역설적으로 첨단 과학자들은 생명의 존재와 우주의 운행 법칙 등에 대해 신비주의자의 고백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약 2500년 전 소크라테스가 말년에 이르러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고 말한 것을 되새기게 한다. ● 마음이나 영혼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흐름이 있으며 이것은 종교와 과학이 오버랩 되는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신비와 합리, 영혼과 물질이라는 영원히 만날 것 같지 않은 평행선과 같았던 지난날의 사고체계는 허물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아직은 현대문명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 과학의 이론이 인류의 세계관에 큰 변화를 주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 물론,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생활도구가 된 휴대전화의 기초에 양자역학이 토대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모른다는 것은 특별한 문제가 아니다. 중력의 법칙을 모르고서도 축구나 야구를 즐길 수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명확히 인지해야한다. 이것은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를 들여다보고 증명해내는 현대과학이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영역은 가시광선을 통한 제한된 부분이라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는 것을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우주의 태초를 보여주는 듯한 검은 그림들과 문명이 개입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펼친 듯한 푸른 그림들이 있다. 이것은 작가가 오랜 시간을 들여 종이위에 만들어 놓은 그림이다.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이러한 형상을 그려내도록 추동(推動) 했을까 라는 것이 나의 질문이었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제각각의 추측을 가지고 감상하기 마련이다. 빅뱅의 순간을 유추하기도 하고 바다 속의 깊은 심연을 연상할 수도 있다. 그림을 통해서 또렷한 상을 그려낼 수 없지만 아름다움과 숭고의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종이와 물, 먹, 물감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거기에 시간의 흐름과 습도 조절이라는 가변적인 요소를 적절하게 개입시키는 것이 전부이다. 작가가 작업과정의 세심함에 정성을 기울이는 정도는 마치 의식을 치루는 것으로 여겨질 만큼 진지하고 열성적이다. 재료와 과정에 있어 작가의 선택이 있지만 그에 못지않은 기다림이 작품의 큰 부분을 이루게 된다. 형상을 빚어내는 것은 물과 먹과 종이의 움직임이다. 작가는 조정자이며 관찰자가 된다. 또한 감상자가 되기도 한다. ● 그에게는 많은 생명현상, 더 나아가 존재하는 사물의 원리도 이 작업과 비슷하게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원자나 전자의 구조를 모르고 그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의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물은 먹물을 밀쳐내고 종이의 고유한 성질을 받아들이며 신비로운 형상을 지어내고 있는 것이다. 미처 가늠해볼 수 없는 다양한 세계 속에서 번개의 섬광과 같이 찰나동안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존재의 실체를 주어진 조건 속에서 실현해내고 있다면 적절한 설명일지도 모른다. 그는 마치 온 몸으로 느끼는 삶의 많은 경험들과 영감을 다만 예술가로서 할 수 있는 표현방식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 같다. 과학은 진리를 증명으로 밝혀내고 종교는 신앙으로 고백하며 예술은 오직 은유의 방법으로 말 할 수밖에 없을 뿐이다. 매우 추상적인 이 작품들은 감성적인 언어표현으로 설명되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계는 과학과 종교의 평행선을 흐릿하게 만드는 지경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감지하면서 작가가 바라보고 있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해 좀 더 현실감 있는 태도로 이해하고 싶다. 그것은 작가가 삶을 사는 방식과 여러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보통의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는 예민한 감성을 한은선이란 작가도 어김없이 지니고 있다. 구름의 움직임이나 계절의 오고감, 사람들의 감정의 흐름에 민감하다. 더 나아가서 작가는 개별적으로 보이는 많은 현상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를 확신하고 있다. 그것은 존재의 상호보완적 성격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 할 수 있다. ● 풀잎과 하늘의 구름이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고 흙과 사람은 생명을 나눈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타자로 보이는 사람들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모두 상대방 없이는 존재가 불가능한 법이다. 연결되어 있음에 대한 자각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비롯된다. 과학적 탐구 역시 존재의 비밀을 풀기위한 호기심과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그 주된 동인이다.
미생물보다 더 작은 세계에서나 우주만큼 큰 세계에서 과학자들은 커다란 진공을 발견하였고 그것은 불교의 "空" 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전자와 양성자의 알 수 없는 움직임과 수많은 행성들의 질서정연한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에서 노자가 말했던 현묘한 "道"가 중첩된다. 그리고 도저히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인간은 다만 자연의 일부분이며 단 한 순간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게 된다. ● 문제는 이미 다양한 표현으로 설파되어온 고래의 지혜를 체화할 수 없다는 점인데 아마도 관성화 된 현대사회 시스템은 인간이 자신의 길 잃음에 대해 자각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인 듯 하다. 이와 같은 때에 한은선의 작품은 얼핏 다른 세계를 보여주려 하고 있다. ● 작가는 작품에 대해 "자연을 그린 것이다"라고 짤막하게 설명한다. 그에게 자연은 이렇게 감동적인 것이고 식상하지 않은 어떤 것이다. 작가는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을 포함한 이 세계를 어떤 장엄과 신비의 세계로 받아들인다. 그는 마치 거대한 우주를 마주한 과학자와 같고 내면에 대한 탐색에 도취한 신비가와도 같다. 그의 작품은 설명할 수 없는, 도저히 통째로는 인식할 수 없는 존재의 나고 짐에 대한 베일을 슬쩍 들추어 보려는 작가의 실험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게임에서 지거나 이기는 것을 이미 잊어버린 젊은이의 고백과 같은 것이 아닐까? ■ 신혜영
Vol.20060207c | 한은선展 / HANEUNSUN / 韓恩善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