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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221_수요일_06:00pm
갤러리 도올 서울 종로구 팔판동 27-6번지 Tel. 02_739_1405 www.gallerydoll.com
조명하는 매체와 조명되는 매체의 적극적 참견: 이인기의 최근 연작 ● 이인기의 작업들이 1995년 서울환경미술제와 메갈리스(Megalith)전을 비롯한 여러 단체전을 통해 처음으로 소개된 이후 2000년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그만의 특성은 좀체 두드러지지 않았던 듯하다. 그만큼 당시 이인기의 실험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현대미술의 다양한 정보들을 의식한 반응을 갖고 있다. 이 기간은 이인기의 오랜 훈련기와 일부 겹쳐 있다. 그 정보들 중 특히 현대미술의 극단적 선택국면에 유래하는 몇몇 인식론은 당시 이인기를 둘러싼 중요한 환경이었을 법하다. 이는 대개 대상의 물리적 진실과 관람자의 경험적 진실 사이에서 생기는 애매성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이인기가 자신의 훈련들을 요약해내고 전문 미술가로서의 진취적 기상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것은 첫 개인전에서 "프랙탈 이미지"연작을 걸면서부터이다. 여기서 그는 벽면의 물리적 속성을 고스란히 자신의 매체에 반복하거나 화면의 틀에 반응하는 형태들을 채용했다. 이 반복이 관람자가 화랑 공간에서 직립하는 조건을 일깨우는 한편 그 채용은 회화의 구조적 속성(pictorialness)을 강조한다. 이들은 얼핏 유럽의 전통에 반응한 미국 미술의 실천들을 환기시키고 또한 그것들에 "절충주의" 혹은 "애매성" 등과 같은 술어를 적용한 비평적 언급들을 연상케 한다. ● 이후 제작된 버전들로 구성된 "프랙탈 이미지 II"연작이 걸린 올해 가을 그의 두 번째 개인전에 이어 최근에 제작된 "간섭(interference)"연작이 발표되는 이번 전시회에서 역시 평면의 반복과 틀에 반응하는 형태들은 여러 버전들로 변형되면서 지속되고 있다. 그와 함께 이인기는 첫 개인전을 위한 제작물들보다 훨씬 이전부터 네온등을 층진 평면들 사이에 숨기는 시도를 해왔다. 그가 미술가로서의 수련 이전에 이미 전기기술자로 활동했던 점에서 조명의 공학적 흥미를 매체에 적용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이 또한 실재하는 화랑 공간에 그 애매성을 실천한 플래빈(Dan Flavin)을 비롯한 전후의 조명미술가들을 상기시킨다.
세 차례에 걸쳐 발표된 연작들은 해를 달리 하면서 표면의 변화를 보여왔다. "프랙탈 이미지"연작에서 평면은 미술가의 몸짓이 그대로 남는 표현적 칠의 속성(painterly ness)으로 덮여 있다. 여기서 네온등의 빛은 붓 자국과 물감의 물리적 속성이 갖는 인본주의적 몸짓을 간헐적으로 그리고 프로그램된 주기로 조명한다. 반면에 1년 후에 제작된 "프랙탈 이미지 II"연작의 표면은 제작자의 몸짓이 뚜렷한 물리적 진실보다 오히려 관람자의 망막에 감지되는 시각의 미묘한 반응에 전적으로 호소한다. 따라서 표면 위의 에피소드를 관람자는 정확히 볼 수 없지만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순된 지점에 서게 된다. 그 표면은 단지 인식의 경로에서 논증될 뿐이다. 여기서 네온등의 빛은 대상이 일순간 비물질화되고 마는, 황당하지만 분명히 경험되는 불가사의한 사실을 조명한다. ● 그런가 하면 이번에 걸리는 "간섭"연작의 표면은 날카롭고 단호한 선들이 드로잉되어 있다. 미술가에 의하면 이 선들은 테이핑 작업을 통해서 획득되었다고 한다. 몇몇 얼룩과 번짐들이 다소 표현적 몸짓을 암시하는 듯하지만 이내 그것은 앞선 연작의 표면에서 시도된 비물화의 방법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비정한 표정에 머물고 만다. 여기서 네온등은 표면의 작위적 몸짓의 무상과 신념의 공허를 조명한다. 이인기의 평면들 층층에 숨겨진 네온등 빛은 지난 3년 동안 제작 의지에 대한 긍정을, 보이는 것과 보는 것간의 차이를, 그리고 그 의지의 공허를 각각 비춰왔다. 이인기의 네온등은 매체가 스스로 비평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장치인 셈이다.
이 점은 빛을 매체로 삼는 플래빈 혹은 그 이웃들로부터 이인기를 구별되게 한다. 플래빈의 형광등이 실재하는 화랑공간에 완전히 노출됨으로써 실내의 밝기를 주릴 것을 요구한다. 이럴 때 플래빈의 형광등은 공간의 매체이기보다 어두움에 대비되는 빛의 매체가 되려한다. 반면 이인기의 네온등은 관람자의 정면에 노출되지 않고 평면의 사정을 밝히는 정도에서 매체가 창출하는 공간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인기의 연작은 어두움에 의존한 조명의 매체이기 보다 공간의 창출에 더 많은 이해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조명 그 자체가 매체되기 위해서는 어두움을 필요로 한다. 어두움은 관람자가 대면하는 시각적 사실을 가리고 관람자의 내면에 일어날 연상을 자극한다. 그런가하면 공간을 매체로 하는 한 그것은 밝은 빛 아래 놓이기를 원한다. 이는 매체가 관람자 앞에 드러날 수 있는 분별의 조건이다. 제작의 공정에서 매체에 몰입하는 미술가는 자신의 삶을 등진 채 영감에 의존한다. 이 때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분별을 놓치고 매체의 자율적 질서에 자신의 의식을 내어 준다. 하지만 곧 그가 삶의 영역으로 되돌아 와서 그것을 대면할 때 끊임없이 자신의 선배와 이웃 그리고 심지어 과거에 제작한 자신의 작품들을 의식하기까지 한다. 이 곳에서 그 매체는 드러난다. 이 위치는 관람자의 것과 동일하다. 매체는 조명되는 대상이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분투의 역사가 바로 이인기의 훈련기를 둘러싼 중요 정보들을 구성한 것이다.
이인기는 첫 개인전 도록에서 자신의 매체를 정수로 한정되지 않는 "프랙탈"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최근의 디지털 매체를 통해 진행되고 있는 프랙탈 미술의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에 비해 이인기의 매체는 간단하고 명료하다. 이인기의 매체를 정확히 프랙탈 미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도 프랙탈 개념이 암시하는 유연성과 다양성에 이인기는 주목한 듯하다. 이와 같은 속성은 회화의 가능성을 추상에 두고 자신이 기여한 미니멀 미술을 비롯한 미국미술의 경화된 국면을 풀려고 한 스텔라(Frank Stella)의 언급에서 지적된 "2.7차원"과 그런 점에서 닮아 있다. ● 이 개념을 통해 이인기는 미술이 인식의 매체가 될 때 기대되는 가능성에 주목했고 그것에서 자신의 예술적 실천을 출발시킨 것으로 보인다. 최근 미술가는 자신의 매체를 "간섭"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서로 대등하고 상반된 속성이 대립하는 것을 넘어 서로 관여하고 참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프랙탈이 네온등의 빛과 칠해진 표면, 관람자와 매체, 벽의 평면과 제작된 평면과 같은 이인기 매체를 구성하는 대립항 사이에서 판독되는 관람자의 조건이라면 간섭은 그 대립항 사이에서 진행되는 적극적 행위의 조건이다. ● 이인기의 네온등은 예술적 의지를 적용하는 대상으로서의 인식에서 출발하여 보이는 것의 모순과 그 애매성의 실체에 대한 각성을 거쳐 신념의 공허를 매체 내부에서 일깨우고 조명한다. 그와 동시에 그의 연작들은 화랑 공간을 서성이다 그 앞에 서서 진지하게 바라보는 관람자의 분별과 의식으로 그 대립항들을 통합시킴으로써 떳떳한 대상으로 인지되고 조명된다. 스스로 조명하고 또한 관람자에 의해 조명되는 활력과 적극적 참견을 이인기의 네온등 빛이 실재하는 공간에 구현하고 있다. ■ 이희영
Vol.20051219b | 이인기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