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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018_화요일_06:00pm
후원_경기문화재단
갤러리베아트 경기 평택 비전 2동 832-7번지 Tel. 031_654_4642 www.beart.org
불평등의 균형-집단속의 개인에 관하여 ● 한효석은 인간의 이중성과 집단속의 개인의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도발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회화작품에서 보이는 피부 속의 붉은 살덩이에 대한 극사실적 묘사와 마치 무대 속의 한 장면처럼 연출된 설치작품에서 보여 지는 사실성은 작품의 소재가 가지는 충격성을 배가시킨다. 눈앞에 재현된 충격적 이미지와 상황 속에서 관객은 작가의 의도를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하기를 요구 받는다. ● 실제 대상을 캐스팅하여 떠낸 극 사실적인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두상은 기둥위에 설치되고 반인반수(伴人伴獸)의 형상은 바닥에 놓이게 되는데, 관객은 이 작품이 전시된 공간들 속에 전체 상황의 일부가 된다. 초기의 충격은 실시간(real time) 속에 관객이 작품들 주변을 천천히 돌며 대상을 살펴봄으로써 대상과 그 것이 놓인 상황이 지닌 놀라운 사실성에도 불구하고 곧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형태임을 확인하고 이 상황의 부조리성과 허구성을 눈치 챔으로써 완화된다. 그러나, 그 공간 속에서 관객 자신은 그 대상들이 가진 극 사실성과 실제성을 통해, 그 자체의 존재감을 더욱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역설적인 상황은 관객을 하여금 전반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그로테스크(grotesque)함을 느끼게 한다.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반이성적인 상황이 하나의 실체로 다가오면서 관객은 실체와 이미지와 혼동을 일으키며, 이로 말미암아 인간 존재에 대한 미사여구로 가득한 여러 진술들의 절대성을 반추하는 계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의 회화 작품은 정육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기 덩이와 겹쳐 보이는 인간의 얼굴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인간이라고 인식하는 표면적 현상 뒤에 존재하는 실체를 보여준다. 그것은 사회적 상황에서 인간들이 흔히 쓰는 가면(mask)을 상징하며 더 나아가 인간의 허위와 이중성을 폭로한다. 이러한 이중성은 또한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는 근대주의적 명제에 대한 반박으로서 동물과 같은 속성을 공유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까발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중성은 경우에 따라서 이성 대 비이성, 의식 대 무의식 등의 대립적인 구조로 해석되기도 한다(주1_2004년 11월에 있었던 「The Uncanny」를 주제로 한 한효석의 개인전 서문에서 미학자 정무정은 의식과 무의식의 구조를 프로이드를 인용하여 "무의식에 남아 있어야 했으나 놀랍게도 의식 위로 떠오른 개인이나 종족의 진화 과정에서 억제되거나 억압되었어야 할 초기의 정신상태, 원시적 애니미즘 또는 유아기의 나르시즘으로의 회귀"로 분석했다.).
그러나, 이번 전시회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그 이중성이 가지고 있는 사회, 정치적인 의미이다. 「인간은 생각해야 한다는 저주를 받았다」라는 작품에서 관람자는 높이 솟은 기둥위에 올려 진 눈을 뜬 것과 감은 것, 두 개의 얼굴은 지닌 두상을 통해 사회적으로 우러러 보이는 위치에 있는 한 인간의 두 얼굴을 보게 된다. 한효석 자신은 이 작품을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도덕적으로 옳지 않을 수 있지만 개인 자신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는 이러한 비도덕적인 것이 미덕이 될 수 있는 상황을 은유한 것이다. 이 상황은 한 개인의 이중성을 의미함과 동시에 거대한 집단과 권력 속에서 한 개인이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동시에 상징하기도 한다. ● 권력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한 개인이 치러야 할 대가는 단순히 가면을 쓰는 것이나 서로 다른 두 개의 표정을 동시에 짓는 것 이상일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 개인에게 재앙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권력을 가지지 않는 익명의 개인은 마치 처참하게 도살된 돼지처럼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의 목적을 위해 희생되는 운명을 맞기도 한다. 이 문제는 돼지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한 「불평등의 균형」이라는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자신이나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우선하는 힘 있는 누군가에 의해 다수의 힘없는 개인은 희생된다. 「불평등의 균형」은 경제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존재하는 사회적 불평등을 고착화 시키려는 소수 세력의 시도와 이것의 존재 유무를 모른 채 희생당하는 대다수를 함축하고 있다. 힘 있는 소수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일반 다수의 희생은 비단 국가와 개인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속의 기업과 소비자, 인종과 인종사이의 관계에서도 흔히 목격 된다. ● 이러한 현상들은 국제관계에서 강대국과 약소국의 관계에서도 관찰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강대국의 내부에 구성원사이에도 발생한다. 최근의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서 보여 지듯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공격을 감행한 강대국 미국이라는 거대한 집단속의 개별 병사들도 결국은 그 집단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 경우 그 집단의 이익은 민주주의, 자유, 평화 등의 거창한 대의로 포장되며 정당화된다. 향후 미군의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해외 기지가 될 평택이라는 지역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작가는 이번 평택에서의 전시를 통해 국가 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강대국 미군의 구성원인 개개 병사들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운명 또한 이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두 작품은 하나의 문맥을 이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과 사회적 불평등의 해소를 바라는 시각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효석의 작품이 가진 충격적 이미지는 사회, 정치, 경제적 약자 중심의 저항적 민중문화의 상징인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이 정의한 '그로테스크'(grotesque)한 속성을 갖는다(주2_미는 지배적인 고급문화, 주도적인 사회적, 도덕적, 미적 이데올로기와 동일시되었고, 추는 경계,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약자, 인종적 타자와 동일시되었다.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은 그로테스크를 고전주의와 연관된 지배적 정치, 문화세력에 저항하는 민중의 상징으로 간주하였다_정무정,「그로테스크와 타자」, 한효석 개인전 서문). 미학자 정무정이 지적하였듯이 그로테스트(grotesque) 적 요소들은 더 나아가 아도르노(Theodore W. Adorno)의 추(醜,Ugliness)의 개념과 연관 지을 수 있다. 그는 미(美,beauty)를 배타적이고 엘리트 중심의 억압적 범주로 간주한 뒤, 추(醜,Ugliness)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과 사회적 불평등 해소라는 도덕적, 인본주의적 임무를 부여하고 타자의 입장에서 기존의 사회적, 미적 전통과 규범을 전복시키고 인간존재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보았다. 한효석의 기괴한 형상을 한 작품 속에 깃든 것은 다름 아닌 도덕적 인본주의인 것이다. ■ 원영태
Vol.20051023b | 한효석 회화, 설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