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40901b | 박정란 회화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5_1012_수요일_06:00pm
책임기획_이동일
갤러리 도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55-1 2층 Tel. 02_735_4678
무의식적 자아와 억압된 것들의 귀환 ● 박정란의 그림은 배경화면의 무채색과 대비되는 원색의 향연과 거침없는 붓질, 그리고 자유분방한 드로잉이 어우러져 장식적이고 회화적인 화면을 보여준다. 마치 그리다 만 듯한 붓의 궤적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그림들은 형상과 추상표현을 아우르는 일련의 표현주의 회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 감각적이고 역동적인 화면 속에 아마도 작가자신의 분신인 듯한 여성과 고양이가 주요 캐릭터로서 등장한다. 이는 작가의 그림을 형식논리로부터 내용적이고 서사적인 논리로까지 확장시킨다. 그 경계는 작가자신의 개인사적인 경험과 여성의 성적 정체성, 개인적인 욕망과 인간 실존의 보편적인 욕망에까지 맞닿아 있다. 형식의 논리와 내용의 논리가 하나의 결로 스며 있고, 개인적인 지평과 보편적인 지평이 잇대어져 있는 것이다. ● 작가의 그림들은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 자신을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이를 반영하고 싶은 욕망, 그리고 그렇게 반영된 자기를 드러내고 그 경험을 공유하고 싶은 욕망에서 연유한다. 이는 주체, 자아, 에고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에 맞닿아 있으며, 진정한 자기에 대한 의심에 맞닿아 있다. 때로는 무분별할 만큼 주체할 수 없는 이 지극한 자의식은 작가로 하여금 자기 내부를 향하게 하고, 작가의 행위를 자기 반성적인 행위로 되돌려 놓는다. 마치 달팽이의 그것과도 같은 자의식의 집 속에서 작가가 발견한 자기는 금기와 터부의 선을 넘어선다. 합리와 이성, 선입견과 편견, 상식과 독사(doxa)로 나타난 모든 지식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것들의 경계를 넘어선다. 그것(자기)은 의식의 이면에 놓여진 무의식의 지층에 잇대어져 있고(의식보다 무의식이 더 본질적이다), 그 언어는 모든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언어를 넘어서 있다. 작가는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언어, 말더듬이의 어눌한 언어, 잉여와 과잉으로 차고 넘치는 언어(우리는 말을 할 때 사실은 더 많은 것을 말한다), 결여와 결핍으로 모자라는 언어(언어는 그 이면에 무의식의 언어를 억압하고 숨기고 있다)를 빌려 이처럼 미처 의미화되지 못한 것들을 발설한다. ●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자기 내면의 무의식을 향하고 있다. 예컨대 머리 대신에 몸 전체를 합한 것보다 더 큰 시커먼 덩어리를 목 위에 얹고 있는 그림에 나타난 무의식은 인식의 안쪽으로는 도저히 불러들일 수가 없다. 자신에게 속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조차도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영토, 낯선 땅으로서 현상한다. 그 무의식은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삶을 사는 사회적 자아와는 또 다른 자아이다. 그러니까 비일상적이고 비정상적인 삶을 사는 자아,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자아, 내 속에 나와 함께 동거하는 자아, 실존적 타자와 동격이다. 실존주의는 이런 실존적 타자로부터 인간이 필연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소외의 근거를 찾는다. 그리고 이는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이중인격과 다중분열로 나타난다. 즉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 자기 이면의 또 다른 자아와 대면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마치 쌈 쌍둥이처럼 두 개로 분열된 머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형상으로서 현상한다. 여기서 가면과 또 다른 자아, 그리고 쌈 쌍둥이의 분열된 한쪽 머리는 그 속에 무의식의 또 다른 동격인 욕망을 숨기고 있다.
욕망은 억압과 짝패다. 억압이 욕망을 부르고, 욕망이 억압을 강화한다. 이때 욕망을 억압하는 계기는 자기 외부로부터 온다. 자기실현을 향하는 욕망이 스스로를 억압한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것(욕망을 억압하는 일)은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삶을 위해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요청인 것이며, 또한 개인은 이를 스스로 받아들이도록 내재화한다. 도덕과 관습, 관례와 풍습, 금기와 터부, 그리고 상식의 이름으로 유포되는 이 억압의 계기들은 그러나 결코 욕망을 없애지 못한다. 대신 자기 자신조차 까마득하게 잊어버릴 만큼 시간이 흐른 이후에(억압된 욕망이 자기를 실현하는 것은 언제나 사후적이다), 그리고 전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억압된 것들은 되돌아온다. 마치 부메랑처럼 자신으로부터 유래한(사실은 사회적 요청을 개인이 내재화한) 그것은 재차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이는 자폐증과 공포증, 정신분열증과 편집증, 그리고 조울증과 과대망상증 등의 각종 반사회적인 병적 징후로서 나타난다. 반사회적인 병적 징후? 그것은 과연 사회(그 자체 통념과 통설 위에 축조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나아가 의식적으로 사회와 타협하기를 거부하는 개인의 특수한 경험에 붙여진 이름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중인격과 다중분열이 인간의 실존적인 조건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병적 징후 역시 정상적인 삶의 한 양식(보다 적극적으로는 태도의 한 형식)으로 봐야 할 것이다. ● 실상 병적 징후에 대해서 사회병리학적인 관점에서만 볼일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맥 속에서의 병적 징후는 인간의 무의식과 욕망, 자연성과 본성을 열어놓는 계기가 되며, 그것에 연동된 창작 주체의 동력장치가 된다(심지어 질 들뢰즈 같은 사람은 욕망으로부터 사회를 전복시킬 수 있는 적극적인 동기를 찾기조차 한다). 이는 작가의 작업에서 개인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처, 생래적이고 생리적인 상처, 치유할 수 없는 상처, 때로는 자신에게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상처, 트라우마로 나타난다. 억압된 욕망이 무의식의 지층 속에 새겨놓은 이 정신적 외상은 맹신과 맹목으로 무장한 힘(리비도)으로 개인에게 육박해오고, 개인을 찢어발기고 무장 해제시킨다.
박정란의 작업에서의 이러한 상처의 인식은 자신(여성)이 생명을 낳고, 세계를 낳고, 우주를 낳는다는 자의식으로부터 온다. 여기서의 생명과 세계와 우주는 동격이다. 그리고 생명을 잉태하는 자신(여성)의 행위는 신의 창조행위와 통하고, 창작주체의 창작행위와 통한다. 모든 존재가 그 근원에서 하나로 연결돼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그 주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은 고통(생명을 잉태한다는 자의식과 연동된)을 수반하고, 쾌락(성적인 욕망과 연동된)을 수반한다. 이처럼 작가 자신과 더 나아가서는 여성과 동격인 신은 고통과 쾌락이 범벅된 모순율의 주체로 나타나며, 이중인격과 다중분열로 표상된 야누스의 두 얼굴로 나타난다. 질서를 지향하는 아폴로의 얼굴 위로 혼돈을 지향하는 디오니소스의 광기가 겹쳐진 신의 두 얼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중인격과 다중분열은 우연이 아닌 필연인 것이며, 그 자체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그림에서 보듯 분열된 의식과 분절된 신체로 나타난다(이는 특히 일전의 사이코드라마를 주제로 한 성곡미술관 전시에서 극대화된다). 그리고 작가자신(여성)의 자궁으로부터 분출된 피(생리 혈)가 자신의 몸을 물들이고, 자신의 분신인 고양이의 몸을 물들이고, 나아가 화면을 물들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자신의 몸 속(무의식적 자아)에서 비롯된 피로써 자신의 몸(사회적 자아)을 물들이는(씻는) 작가의 행위는 정화의식과 통하고, 카니발과 통하고, 배설(카타르시스)과 통한다. 그런가하면 이런 자궁을 매개로 한 작가의 자의식은 여성의 성기의 도상학과도 통한다. 즉 그 자체 남근의 수직형상으로 나타난(흔히 우주목으로 상징되는) 가부장제의 세계 중심 논리를, 자궁의 원 형상으로 나타난(흔히 우주의 핵으로 상징되는) 여성주의의 세계 중심 논리로써 대체한 것이다. ●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를 표현한다. 특히 예술가들은 보통사람들보다 더 자주 더 깊이 자기를 표현한다. 물론 자기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예술가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박정란의 경우에서 보듯 어떤 예술가들은 자의식에 대한 남다른 감각촉수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의 그림들은 작가 개인을 넘어 우리 모두의 무의식적 욕망이 새겨놓은 정신적 외상과 만나게 하며, 내 속에 나와 동거하는 또 다른 나, 낯선 자아와 대면케 한다. ■ 고충환
Vol.20051013c | 박정란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