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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미술관 서울 종로구 관훈동 30-1번지 제2전시실 Tel. 02_733_4448 www.kyunginart.co.kr
소리 없음과는 다른, 시각과 촉각으로 충만한. ● 허 욱 작품에서 감지되는 몇 가지 조건에 관하여 보기 / 듣고 보기 ● "비가 주룩주룩 내려요"라고 말할 때,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빗소리가 "주룩주룩"들리기 때문이 아니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고요하게 떨어지는 비, 그 소리 없는 존재들이 우리 눈에, 본 것을 밖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다른 감각과 표현수단을 지닌 우리에게, 그렇게 들리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고 내리는 비를 보면, 정말 비는 "주룩주룩" 소리 '내며' 하늘로부터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보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만져질 듯 하다. 시각이 청각화 되고, 시각이 현상을 청각적 언어로 규정하며, 청각이 다시 시각현상을 촉각적으로 표현하는 이 사태. 말하자면 '보기'는 단지 시각영역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또 단지 시각표현만을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감각을 자극하고, 그 자극을 통해 다른 표현을 길어 올린다. 한 감각은 다른 감각으로 전이하면서, 서로 순환한다. 해서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물감의 선은 '죽-죽' 그어지며, 캔버스 천의 그림은 때로는 '축' 늘어지고, 때로는 '팡-팡' 당겨진다. 이제 바야흐로 작가 허 욱이 갖고 있는 지각의 한계조건과 그 특수성이 어떤 미술로 출현하는가를 말해 보려는 이 글의 긴장처럼.
들리지 않아 얻는 지각과 듣기 전에 하는 감상, 그리고 들어 아는 통속적 이해 ● 허 욱은 듣지 못한다. 나는 이 말을 여기서 하기가 꽤 조심스럽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작가의 작품을 논하는 이 자리에서 작가의 신체적 한계조건을 밝힐 경우, 작품의 관람자(독자)는 우선 그 조건에만 관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고, 그러한 관심을 반영하여 허 욱의 미술을 재단할 수 있기 때문이며, 반대로 이데올로기화된 정치적 올바름으로 '쿨하게' 허 욱의 작품이 내포한 특수성을 외면하는 와중에 무의식적으로 왜곡해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부수적인 이유도 있는데, 이제까지 허 욱의 작품을 논한 여러 비평문이나 지인의 글 어디에서도 그가 '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말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유추컨대, 그의 청각적 한계조건과 그의 미술은 별개라고 생각했거나, 섣불리 그런 조건을 언급함으로써 혹 작품을 이해하는데 불필요하게 작용할 선입견을 미리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앞선 필자들이 이렇게 생각했다면, 이는 필시 '작품은 작품으로만 논해야 한다'는 미술사 방법론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며, 우리 사회 내면에 여전히 흐르고 있는 차별을 경계하기 위함일 것이다. 작가의 사적 생활이나 내적 상태를 센세이셔널한 소재로 취급하는 대중적 미술이해에 저항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자의 방법론은 언제나 유효하다. 또한 모든 차이는 '모두 다르다'로 연결되어야 하지만 '차별'로 연결되어왔던 사회의 이력을 생각해 볼 때, 후자의 경계태도는 무리가 아니다. ● 이러한 여러 이유들 때문에 나 또한 허 욱의 미술을 논하는데 있어, '청각의 부재(不在)'를 글에서 부재화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미술의 고유 영역이라 재차 확인되어 왔던 '시각의 현존(現存)'만을 글로 현재화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러려고 하니 허 욱의 회화는 왜 추상의 선들로 이루어지는지, 왜 원색들의 반복인지, 왜 집합과 덩어리로 묶이는지 해명할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허 욱 작품의 특수성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도 말이다. ● 추상의 선, 원색, 덩어리, 이것들의 변주와 반복과 이합집산. 허 욱은 자신의 들을 수 없는 세계 안에서 가촉성과 가청성과 가시성으로 충만한 세계(직선은 죽-죽, 원색은 통! 통!, 원통은 떼구르르)를 구현하며, 말하지 않고 소리 내지 않는 것들(선, 색, 부피)의 촉각적이고 시각적인 현전(現前)을 토대로 그 고요한 '있음'을 작품으로 현재화한다. ● 누군가는 허 욱 작품으로부터 이런 성격을 '특수성'으로 길어 내는 내게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성격은 비단 작가 허 욱의 작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추상회화에 일반적인 특성이 아니냐'고, 예컨대 '프랭크 스텔라를 떠올려 보라'고. 또 원형 기둥에 스트라이프 무늬를 그려 넣고 세종문화회관 계단에 설치한 허 욱의 작업(2001)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다니엘 뷔랑이 팔레 루와이얄 정원에서 했던 그 작업이 아니겠냐'고 말이다. 물론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시각적으로만 유사한 것이 아니라 허 욱의 회화문법 일부는 추상표현주의(우리가 통칭해서 그렇게 부르는 미국모더니즘회화)로부터 이어졌고, 작품 설치 방법론의 일부는 뷔랑의 개념주의 설치미술로부터 영향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모더니즘회화)는 미술의 순수성을 고집했다는 점에서 미술 밖 현실 장으로 뛰쳐나간 후자(뷔랑식의 설치미술)와 상충하는데, 허 욱의 작업에서 이 두 길은 겹쳐지고 두 다른 성격은 완충된다. 또한 뷔랑의 스트라이프 작업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반(反)모더니즘적 실천 중 하나라면, 허 욱의 설치회화들은 탈 미술관 담론이나 예술제도 비판과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 그래서 왜 허 욱은 추상적 선만을 그리는가, 왜 색조(tone) 변화 없는 원색인가, 왜 미술관에 만족하지 않고 현실 공간(coex, 광화문 열린시민마당, 정부대전청사, 경복궁 지하철역 보도)으로 나가는가, 왜 개별 작품을 그저 단위로 취급해서 덩어리 혹은 묶음으로 제시하는가 하는 (여태까지 질문되지 않은)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리고 나는 이 질문의 답을 허 욱의 지각적 한계조건과 그의 작품세계가 현실과 맺고 있는 상관관계 속에서 찾아보고 있는 것이다. 이 분석이 한 작가를 이해하는데 '통속적으로' 사용되지 않길 바라면서.
선, 색, 덩어리의 있음과 톤, 뉘앙스, 메시지의 없음 ● 단지 캔버스 천과 틀 위만이 아니라 도처에 허 욱은 직선 혹은 꾸물거리는 유기적인 선으로 그림을 그린다. 때로는 자동차 보닛, 그 부드럽게 굴곡진 평면을 따라 빨강, 진초록, 파랑의 색선들이 규칙적으로 그어지고, 때로는 전선 감는 나무골패의 그 둥근 입체 면을 따라 직선과 유기적 형상들이 단호한 원색으로 반복해서 그려진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건축용 슬레이트 판 위에, 혹은 버려진 의자나 기타의 몸체 위에, 그리고 그가 희망하건데 한강다리 위나 초고층 건물의 외관에. ● 이렇듯 허 욱이 물리적으로는 다양한 표면(the plane surface)을 향유하고 지향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림의 표면(그러니까 드러난 그림의 내용)에는 오직 선들만을 정렬시킨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의 그림은 오직 '선의 그어짐'만을 내용으로 보여준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보여주는 작품을 통해 우리가 보는 것은 어떤 선의 그어짐이 어떤 색의 옷을 입고 얼마만큼의 부피와 덩어리로 어떻게 변주 ? 반복되는가이다. 거기에는 세상이 이렇다 저렇다든가, 나는 이렇게 저렇게 말한다하는 내용, 즉 메시지가 없다. 그의 조형어법과 표현만이 그 작품의 내용일 뿐이다. 그림표면(지지대)위의 직선과 원색의 단호함만큼 그 내용은 단호하고 여지가 없다. ● 나는 허 욱 작품의 이러한 양상들을 '톤, 뉘앙스, 그리고 메시지의 없음'으로 다시 새기고 싶다. 허 욱이 세상사든 세계에 대해서든, 혹은 하다못해 자신이 지지대로 쓰는 그 현실 사물과 장소에 대해서든 작품 속에서 메시지로 구현하지 않는 이유는, 그와 그의 작품이 전적으로 촉각과 시각 능력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들을 수 없음으로 다른 이들(세계)과 말-메시지로 쉽게 섞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촉각을 이용해 접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각을 이용해 관찰하는 와중에, 소리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추상적일 세계를 시각적으로 압축하는 것이 아닐까? 그 과정에서 톤과 뉘앙스 같은 세부들은 과감히 탈락되고, 메시지는 감각적으로 추상화되는 것이 아닐까? ● 만약 그렇다면, 허 욱이 그의 작업 이력 초기부터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미술관 외부 현실공간으로의 작업 확장 또한 이와 상관해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회화는 보통 전시장 내에서 단독으로 보여지지만, 또 많은 경우 앞서 예로 들었던 것처럼 현실 공간에 전이되거나 그 공간과의 문맥 속에서 새롭게 제작되어 드라마틱한 장관을 연출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작품이 내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현실적 메시지와 내용의 세부-톤, 뉘앙스-를 현실 공간이 보충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아니 보다 공정하게 말하면, 어느 쪽이 일방적으로 주고, 다른 한 쪽이 받는 관계가 아니라, 전자와 후자가 서로 뒤섞이며 발성(發聲)되고, 혼성(混性)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은 현실의 잡다하고 혼성적인 사태를 메시지로 받아 '내용'과 '디테일'을 키우고, 현실 공간은 허 욱 작품이 지닌 시각예술의 특수성을 받아 '생활의 소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예컨대 지난 2004년 그가 마로니에 미술관 외벽에 설치했던 원통형 회화들을 보자. 이 때 작품들은 단조롭게 고착된 벽돌 건물을 역동적으로 부유하는 파열음의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여태까지 균질하고 무뚝뚝하게 침묵하던 미술관벽면은 직선이 그려진 원통형 작품의 고저(高低)에 따라 때로는 협화음을, 때로는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이와 동시에 반대로 무성(無聲)의 이 작품으로 인해 그 번잡한 미술관 통로가 촉각적 고요 속으로 잦아들고 있다. ● 그런데 다시 묻자. 왜 그는 작품이 안전하게 보존 ? 감상되는 미술관 내부의 공간에 만족하지 않고, 자꾸 밖으로, 여러 사물과 현상들이 뒤섞여 소음을 내는 현실 공간으로 나아가려 하는 것일까? 나로서는, 미술관이 묵음(?音)의 장소라면 현실 공간은 소음과 수다의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작가 허 욱은 자신에게 강요된 신체적 침묵에 맞서 귓속의 자기세계 밖 소음과 수다의 소통장소로, 타자와의 관계 속으로 뛰어들려 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허 욱의 작품은 '침묵'과 '접촉금지'가 미술작품 관람의 태도로서 요구되는 전시장에서는 모더니즘의 타블로 회화 중 하나로 보인다. 거칠게 말하면 그 제도와 양식 속에서 평범해 보인다. 그러나 일단 작품이 삶의 소음 무성(茂盛)한, 작가의 육체를 비롯해 우리 모두의 육체가 거기에 맞닿을 수 있는 현실 공간에 들어서면 특수하게 빛나 보인다. 반복되지만 드라마틱한 장관을 연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라건대, 나는 허 욱의 작업이 더 빈번하게 현실공간에서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으로 실현되기를, 더욱 삶의 번잡함과 시끄러움을 무성(無聲)의 회화로 끌어안기를 희망한다. 그의 작품에 있는 선, 색, 덩어리는 그 와중에 조형의 일반성 너머 실재의 특수성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허 욱의 선은 그냥 그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죽' 소리 내며, '빨갛고 푸르게' 지지대를 '푹 적시며' 그어지므로. ■ 강수미
Vol.20050306b | 허욱 설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