循環界

추인엽 회화展   2004_1027 ▶ 2004_1102

추인엽_循環界-北邙_디지털 프린트_지름 171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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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1027_수요일_05:00pm

노암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02_720_2235

추인엽의 순환(循環)에 붙여 ● 관악산이 마주 보이는 남태령 너머 얕으막한 산에 자리 잡은 추인엽의 작업실을 올라가는 오솔길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그는 그 풀들을 '제압되지 않는 생명의 힘'이라고 말한다. 밤에 그의 작업실을 오르면 도심의 한 복판인 것을 잠시 잊어버릴 만큼 자연의 생기가 어둠과 함께 온 몸을 파고든다. 추인엽이 처음 작업실을 만들었을 때 그곳이 내겐 넓은 마당을 연상시킬 만큼 넓게 보였었다. 지금 그의 작업실은 사람이 다니기에 비좁을 만큼 그가 직접 짠 1층 높이의 그림틀로 가득 차 있다.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많은 작업도구들…, 그는 욕심이 많다. 그 욕심들은 그가 지내는 바쁜 시간과 밤새워 작업에 투여하는 열정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추인엽_循環界-철암_디지털 프린트_지름 171cm_2004

요즘 그의 작업은 풍경이 주를 이룬다. 그 중에서도 "폭포"라는 테마가 가장 많다. 사람의 키를 훨씬 넘는 높은 것에서부터 한 뼘 크기의 폭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또 그 수가 많다. "폭포"는 오랜 동안 그가 중요하게 여겨온 테마이다. 그 기간은 그가 작가로 출발할 무렵부터 지금까지 이어오고, 앞으로 먼 미래에까지도 이어질 숨이 긴 모티브이다. 예전의 그의 "폭포"는 지금처럼 사실적이지 않았다. 아니, 묘사적이지 않다는 표현이 더 맞다. 과거의 그의 폭포는 크고 작은 붓질에 의해서 단숨에 표현되었다. 혼합 재료를 사용하여 깊은 채색과 두터움을 주는 질감을 수반한 강한 표현이 그 자신만의 조형을 이루는 것들이었다.

추인엽_循環界-滿波_면에 콘테_70×70cm_2004

그러던 그가 근자에는 묘사적 수법을 즐겨 쓴다. 대상 표출 방식에 있어서 앞뒤가 뒤바뀌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언뜻 들기도 하지만, 돌이켜서 초기부터 지금까지 그의 작업 전 과정을 꿰뚫고 다시 보면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는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있다. 과거에 그가 천착했던 그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을 하나도 바꾸거나 버리지 않았다. 다만 지금 그가 가지려는 것은 '초발심'이다. ● 한 층 높이로 벽면을 가득히 메운 물을 소재로 한 「흐르는 강」 연작소묘는 보는 이의 마음을 담담하게 물의 내면에로 이끈다. 물을 그린(描寫) 것 같기도 하고, 또 물을 그리지 않은 것 같기도 한 그의 그림은 정말 물과 같다. 이전의 "폭포"가 '폭포의 내면'을 다루는 본질 형상 추구인데 반해 지금의 "폭포"는 '폭포의 외형'을 그리고 있는 것도 그와 같다. 실상 추인엽의 관심은 그 둘 중 어느 하나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그 전체이다. ● '물'은 다른 풍경, 즉 '나무'와 '숲'과 함께 그에게 매우 중요한 관심사이다. ● '물'은 사물이 가지는 운동성의 표상으로서 아래로 움직이는 모든 기운을 뜻하는 사물해석 의 상징코드이다. '물'은 내림의 성질을 가진 것으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포, 흐르는 강과 바다, 그 표면 위의 파도, 고요하고 잠잠한 수면 등으로 표상된다. ● 나에게 추인엽의 '물'은 묘사적이기보다는 이와 같은 '물의 상징성'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추인엽은 자신의 '물'에 대한 이런 류의 관념적인 해석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을 통해서라기보다 자연과의 직접적인 부딪침-소통-을 통해서 어떠한 몸의 깨우침을 가지려는 듯이 보인다. '몸각(몸覺)'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가 진정 얻으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추인엽_동강-지장마을에서 둘러본 백운산_종이에 콘테_70×50cm_2003
추인엽_循環界-흐르는 江_면지에 콘테_280×600cm_2002~2004

추인엽은 우리의 몸과 사물, 또는 자연·몸과 예술 작품의 관계에서, 그 만남(부딪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소통(疏通)에 대하여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작가이다. 이 커다란 도시에서 그의 에너지가 소진될 때쯤이면 그는 훌쩍 지리산과 동강으로 잠입하여 수일을 홀로 지낸다. 그는 그곳에서 자연과 직접적인 교감을 이루고자 하고, 그 교감을 자신의 작품에 투영하는 작가이고자 한다. 그에게 자연은 외형이 아니라 그 전체이며 안과 겉을 통과하여 소통하는 '순환(循環)'이다. 이 '순환(循環)'은 그가 선택하여 이름붙인 그의 대변적인 명제이다. 그의 작가적 양심과 그가 추구하는 작품 세계의 이면에는 아직 다 드러내지 못하는 미제(未濟)가 있다. 추인엽은 참 마음에 따른 올바른 작가적 태도를 지켜가기 위해 애쓰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나는 그의 이러한 태도를 '추인엽이 추구하는 몸각을 위한 노력'이라고 이름 붙여본다.

추인엽_영월·정선·태백지역 소묘_종이에 콘테_2002~2004
추인엽_영월·정선·태백지역 소묘_종이에 콘테_2002~2004
추인엽_영월·정선·태백지역 소묘_종이에 콘테_2002~2004

추인엽이 추구하는 것은 시각적 체험자(觀者)의 몸을 통하는 기적 작용(氣的 作用)을 고려하는, 우리 전통 장인들의 미학적 운용방식과 일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사물놀이의 연주자가 오행음(五行音)을 발현하여 이를 듣는 자의 몸을 통과시켜 흡수, 발현하게 하는 기의 오행작용과 같은 것이다. 그는 이러한 기적 작용(氣的 作用)을 '순환(循環)'이라고 이름지었다. 몸이 소통되는 큰 순환질서(循環秩序)와 내 몸의 소통작용(疏通作用)으로서의 기화(氣化)인 것이다. ● '최한기'가 말한 '사물은 곧 기화(氣化)이다'라는 의미는, 우리 몸을 통과하는 순환과 소통이 이루어내는 '큰 질서에의 참여를 통하는 소통'을 말함일 것이다. 그 소통의 결과로써 까르마를 털어내는 정화야말로 참된 작가가 추구하는 귀결이 아닐까 한다. 추인엽은 물과 풍경에서 바른 생명 질서에의 순환을 바라보고 그것을 추구하는 '전령사'로서의 작가적 태도를 느끼게 한다. ● 그는 이전 작품에서 형상과 색채를 다루는 조형운용방식을 통하여 존재의 '동적요소'와 '정적요소'를 능동적으로 활용하였다. 밧줄을 사용하여 만든 「폭포」(동적요소)와 시공의 이미지를 추구한 혼합질료의 평면작업 「지리산 장터목」(정적요소)은 하나의 세계가 가지는 전체를 동(動)의 모습과 정(靜)의 모습으로 양면적 표출을 해내고 있다. 추인엽은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세우려하거나, 새로운 하나의 전형을 의도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항상 전체이다. 그 전체의 양측면(兩側面), 또는 다면(多面)에서 추구되는 노력은 고정되지 않는 다양한 표현 방식을 수반하며 그 다른 표현방식들이 연결되는 통로를 가지게 되므로 그러한 점이 자연스럽게 추인엽의 작가적 성격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추인엽_동강-백운산_캔버스에 유채_48×145cm_2004

추인엽이 그리고 있는 '풍경의 내면'은 그의 이전 작품들에게서 보여지는바와 같은 자연의 상징성이다. 그는 단순한 풍경으로서의 자연에 회귀한 것이 아니다. 그가 얻으려는 바는 자연과의 직접 부딪침을 통하여 보다 큰 열려진 세계로의 전환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자연 질서의 발현으로서의 풍경'은 추인엽이 사물의 내면적인 생명코드와 시각조형으로 끄집어내려고 하는 "소통"과 "순환"이라는 기적 작용(氣的 作用)에 따르는 조형운용방식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추인엽이 그리는 『풍경』―'산','구름','물','나무','숲'―의 형상에 내포된 사실적 형상의 내면은 추인엽이 몸으로 느끼고 바라보는 '기적(氣的) 소통과 순환의 형상'으로서의 '자연'인 것이다. 실타래처럼 얽힌 연필구조의 「풍경」에서 그는 자연의 외관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 「풍경」이 인간에게 자신의 외양을 보여주며 묘사케 하는 모델로서의 풍광이 아닌, 자연이 인간에 대면하여 자연 자신이 가지는 기적 체계를 보여주고 느끼게 하여 전이(轉移)시키려는 소통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물(폭포)은 하늘과 구름 또는 바위 등과 차별 없는 연결 구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추인엽_循環界-폭포_캔버스에 유채_142×72cm_2004

그의 '물' 연작 밑에 어느 선생님께서 강원도 절집 기둥에서 적어 오셨다는 싯귀를 붙여보았다. ● 華欲開時 方吐香, 水成潭處 便無聲 / 꽃 피려 하니 향기 퍼져나고, 물 흘러 못에 이러 소리가 없네 ● 추인엽은 태백에서 났다. 요즈음 그는 어린시절 살던 집 뜰 앞,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서있는 소나무를 찾아내어 그린다. 추인엽 내면의 태백은 순수한 자연의 모습과 탄광촌의 모습이 함께 있다. 자신이 태어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자전적인 삶과 유년 시절 함께 했던 그곳 사람들의 삶이 태백의 순연한 자연과 어우러진 모습으로 함께 있다. 태백의 탄광촌은 과거의 번영이 바로 현재의 폐허인 곳이다. 그곳은 '삶'의 한 모습이면서, '삶'의 한 상징이다. 추인엽은 함백산의 맑은 하늘과 사람들의 삶을 말한다. 추인엽은 태백에 대한 연민이 있다. 추인엽의 또 다른 풍경작업인 「디지털 풍경」은 프린팅 과정을 거친 대형 사진작업으로 태백을 주제로 한 「철암Ⅰ-Ⅱ-Ⅱ-Ⅳ」와 「북망」, 그리고 「한강」, 그가 재직 중인 학교명 「예원」이 있다. ● 추인엽의 「디지털 풍경」은 꼴라쥬로 변형된 원형적 구조로써, 이것의 모티브는 '삶'과 '하늘'이다. 작가의 주변을 형성하고 있는 삶의 형상(태백의 철암, 아버지와 조모의 무덤, 자신의 화실 옆의 한강, 그리고 직장인 예원)들이 견고한 조형구조로 다시 구축되어 한 울에 모여 있다. 그 '삶'의 형상들은 중심부에 하늘을 이루고 또 그 하늘을 지향한다. 그 중 '북망'은 무거운 주제이다. 삶과 욕망의 귀결로서의 무덤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聖, 俗, 富, 貧의 모든 삶이 동등한 죽음. 그 죽음의 현재 모습인 무덤이 향하는 하늘을 향한 질문들이 울림으로 다가온다. 추인엽의 「디지털풍경」의 메시지는 '삶'의 현재, 과거, 미래에 대해 던지는 '질문'과 같다. 삶의 현재 모습과 그것이 향하여 보여주는 하늘의 모습. 현재를 이루어온 과거가 함께 있다.

추인엽_循環界-五色瀑布_종이에 콘테와 염색실_150×300cm_2004

추인엽의 「디지털 풍경」은 거대한 눈의 모습이다. 「디지털 풍경」을 한참 보고있으면, 마치 '그림이 나를 보는 것' 같다. 거대한 '「하늘의 눈」에 비친 삶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추인엽의「디지털 풍경」은 삶과 세계의 전체를 들여다 보기위한 통시적(通示的)구조를 갖고 있다. 그림을 보고나면, '역(逆)으로 하늘이 나를 바라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나를 투사하기 위한 '투명한 나를 되비추기'로서의 의미이다. 추인엽의「디지털 풍경」은 자연으로부터 삶으로, 나아가 삶도 자연 질서 속에 감싸 안겨 순환의 메시지로서 통시적(通示的)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 전체에 대한 통시적(通示的)인식, 그것은 추인엽의 힘이다. 삶과 자연전체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려하는 의지이자 삶의 실상을 보고자하는 의지이다. 그것은 추인엽 자신에게도 우리에게도 함께 중요한 일 일 것이다. ■ 이눌웅

Vol.20041027a | 추인엽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