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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0205_수요일_05:00pm
갤러리 라메르 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 홍익빌딩 Tel. 02_730_5454
새벽은 새벽에 눈뜬 자만이 볼 수 있다. 즉 때되면 스스로 알아 날아오르는 새처럼. 자신의 생명력에 의해 조용히 눈뜨며 일어나 아침을 맞이하기를 꿈꾸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리고 가슴이 기쁜 일을 행할 때 영혼의 성장을 위한 삶의 여명을 느끼며 만남과 선택을 통한 살아있음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추인엽은 늘 깨어있는 맑고 투명한 마음의 눈으로 매 순간 사물을 응시하며 항상 무언가와 '새롭게 만나고 있음'을 지각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거룩한 시간과 공간 속의 그 숱한 만남을 통해 예술가적 소양을 키워 온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적인 예술가적 삶의 여정 속에서 맞이한 마음의 하늘 아래 피워내고자 하는 꽃의 향기가 작가로서의 존재확인이기도 하다. 당당하게 새벽의 삶을 마주하며 홀로 걷는 고독과 철저한 상실감 속에 외로움을 뼈저리게 느껴본 사람만 이 참으로 전체가 무엇인지 깨달으며 큰 진리를 받아들여 내 안의 하늘에 꽃을 피워내 우주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것이다.
봄이 올 때 막 알을 깨고 나온 하루살이를 먹기 위해 맞춰 날아오는 새처럼, 겨울잠에서 깨어나 가슴의 문을 활짝 열고 진정한 작가의 이름으로 다가서는 추인엽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작품세계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 현실의 모습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를 통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추인엽이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작품세계 또한 개인적 역사성에 바탕을 둔 현재와 과거와이 대화일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초 추인엽은 주로 폭포 이미지를 통한 소통과 관계구조를 통하여 개인적인 역사성와 정체성을 담보하는 미분화된 의식세계와 조형적 창조의 인식대상의 사물과의 관계설정에 대한 실험정신을 진지하게 보여준다. 역사성에 바탕을 둔 전통적 문화가치로서의 심상과 현대 산업사회가 빚어내는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삶의 터전에 대한 절박한 인식이 축을 이루면서 구성된 초기작품의 이중구조는 다분히 추상적이며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된 중층을 통해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꿈꾼다. ● 다시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 자연의 질서와 생명력의 표출에 대한 다원적인 시도로 작품세계가 심화되는데, 한국적 정서와 상징에 대한 각별한 관심 속에서 음양오행사상 등에 바탕을 둔 동양적 자연관을 토대로 생명력과 시공간의 관계를 인식하면서 작품세계를 발전시킨다. 특히 우리 역사의 상징물인 고구려 고분벽화와 선돌, 고인돌 및 비석에 대한 인식틀을 동적인 구조와 정적인 구조의 전형으로 파악하여 생명력이 살아 숨쉬는 시공간으로 자리잡게 함으로써 뮈토스(mythos, 신화·이야기)적 상상력을 일깨운다.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이 있고 들리지 않아도 소리내는 것이 있듯이,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더라도 나는 결코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라는 자연과 역사의 내적 질서와 원리를 깨닫는 작가로서의 덕목이 어렴풋이 나타나는 가운데 개인적 역사성에 바탕을 둔 소통과 순환의 고리로서 폭포의 표현과 이미지도 한 단계 성숙한 모습으로 상징적 의미가 부여된다. 노자가 '상선약수(上善若水_가장 훌륭한 도는 물과 같다)라 말했듯이 추인엽도 이 시기의 작품 속에 담아내고자 했던 자연의 질서와 생명력의 표출에 대한 다원적인 시도를 다양한 폭포의 표현을 통해 극대화시키고 있다. 「묵시적 기념비」와 「폭포」의 조형적 탐구 속에서 이루어진 인식의 치열함과 일관성을 견지하면서 추인엽은 자신이 고뇌하며 숨쉬는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생성과 소멸 순간에 대한 포착으로서의 기념비를 정직한 작가로서의 의무로 새겨 세우고자 한 것이다. 안타깝고 각박한 삶의 터전에서 고뇌하며 살아가는 영혼이 깨어있는 화가가 이 땅 위에 남기는 치열한 삶의 흔적, 그 흔적의 이어진 고리가 바로 추인엽의 1990년대 말까지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1990년대 말에 추인엽의 작품세계는 나름대로 세계와의 관계인식에 대한 일관성과 역동성의 끊임없는 추구와 모색 속에서 점차 정제된 형식의 틀을 갖추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10여 년의 작업에 대한 작은 완결로서의 매듭을 묶어보고자 하는 것이 이번 전시에 임하는 작가의 결연한 의도다. 「중용」의 말처럼 치열한 작가정신을 견지하며 노력하는 가운데 체득한 '자신이 올바르다고 믿는 예술세계를 선택하여 흔들림 없이 고집하는_擇善而固熱' 추인엽의 작가적 덕목 속에서 형성되어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이번 작품들의 형식과 내용이 보이는 특징들을 꼼꼼히 살펴보자. 그 동안의 작품이 정신과 물질, 음과 양, 내용과 형식, 응축과 이완 등의 관계인식 속에서 동일한 메시지를 개별적으로 다양하게 전달하는 중층적 형식체계의 산물이었다면, 이번의 작품들은 오방색 등 오행의 생성원리에 바탕을 둔 조화의 세계를 다양한 형식틀로 구성하고자 한다. 부분의 조합으로서의 전체와 전체의 구성요소로서의 부분이 결코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다양성과 통일성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역동적인 생명력의 숨결을 북돋우는 추인엽의 최근 작품들은 그가 시도하는 조형적 실험과 내적 울림과의 절묘한 조화로 산뜻한 화음을 만들어내고 잇다. 석도(石濤)가 『화어록(畵語錄)』에서 '일획' 즉 한번 긋는 예술적 행위는 그의 흔적을 남기는 원초성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이 긋는 행위는 일획이며 동시에 만획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가의 행위는 단 일획 속에 그의 예술의 전체가 포섭되고 통섭될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인간이 창조해낸 가장 추상적인 형태인 각각의 네모꼴들이 서로 밀어내지 않고 유기적 통일과 상호 공명을 통해 부분과 전체, 즉 外와 一의 생산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로 승화된다. 특히 마름모꼴의 형태와 오방색의 대립과 조화가 빚어내는 역동적인 긴장감과 운동성은 정제된 삶의 흔적으로서의 기념비적 폭포 이미지를 더욱 살아 숨쉬게 한다. 이 단순화되고 정제된 폭포 이미지에는 10여 년에 걸쳐 추구해온 추인엽의 회화세계가 응축되어 있는 것이지만, 오방색 등 다양한 색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력의 다양한 모든 이미지-우주라는 무한한 시공간 속에서 끝없는 윤회를 거듭하다 이승에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한 점으로 화하여 사라진 영혼, 태고의 생명, 내 의식을 일깨우는 역사성, 일상 등의 복합적 의미-로 분출된다. 물론 작가는 전통적인 오방색의 형식틀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성과 통일성의 관계로부터 파생되는 조화로운 조형적 관계를 모색하고 있다. 바로 태극, 즉 음양의 원리에 따라 청색과 홍색을 역동적으로 대비시키기도 하고, 각기 독립된 하나의 틀 속에서 독자적인 조형적 시도를 내세우기도 하며, 또 알루미늄과 무쇠로 주물을 떠 현대적 물성의 요소를 가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내용과 형식, 外와 一의 조화로운 만남 속에서 추인엽이 남긴 살아있음의 흔적으로서 남긴 쉼표는 보다 성숙한 작가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숨고르기에 들어가는 중이다.
알을 깨고 나와 또 다른 비상을 꿈꾸며 새로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야 할 책무를 안게 된 작가 추인엽은 그동안 현실적 삶과 예술적 삶 사이를 오가며 가슴 속의 젊음과 열정을 담금질하며 자신이 나아가야 할 예술적 목표를 찾기 위해 일관된 노력을 해왔다 하더라도, 이제는 한발 더 나아가 진정한 탐험가로서 자신의 예술세계로 길 떠나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꽤 오랫동안 예술가적 정체성을 묵묵히 담금질해 오던 추인엽은 이번 전시를 통해 모처럼 내면에 깊숙이 도사리고 잇던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녀 자신있게 드러내고 잇는데, 이것은 그동안 방황과 모색의 과정을 통해 찾아낸 작가로서의 나아갈 길에 대한 다짐이자 몸짓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추인엽이 보여주었던 소극적 관조를 통한 자신과 대상에 대한 이해와 관계방식으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 신념을 갖고 작가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과 조건들에 대해 많은 노력을 통해 다듬고 가꾸어 나간다면 늘 새벽을 맞으며 꾸준히 발전하여 거듭나는 작가로서 우뚝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 안영길
Vol.20030203a | 추인엽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