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이 되다

백승관 개인展   2004_0617 ▶ 2004_0724

백승관_백일홍_혼합재료_가변크기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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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617_목요일_05:00pm

백승관 홈페이지 psk.on.to

갤러리 PICI 서울 강남구 청담동 122-22번지 Tel. 02_547_9569

백승관은 그간의 작품경력을 미루어볼 때 이번 전시를 통해서 그간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한계단 도약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근거로서 1. 그의 비개성적 작업이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로 정돈되어 가는 듯 하다. 2. 종전에 보여지던 매체의 물성, 혹은 매체 그자신의 주장들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서로 상충되고 혼재하여 잘 읽히지 않던 것이 극복되었다. 3. 그리하여 이번 전시의 철꽃steel flower 인 백일홍도 매체의 물질성이 부각되는 것은 사실이나, 작가가 백일홍이 되는데 성공함으로서 그가 사용하고 있는 매체적 물질 스스로의 발화자가 된다. 즉 매체 자체의 주장과 그것이 보여지는 이미지로서의 언술들이 하나가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작가가 성공적으로 매개하고, 또 그 물질+내용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 매개되는 작가는 갈아붙인 납판의 벌어진 꽃잎이 되고, 꽃잎은 작가 스스로의 존재이유가 된다. 그러한 일치감을 작가도 이전의 작업에서보다 강하게 느꼈는지, 자신이 "백승관, 백일홍이 되다" 로 말하고 있다. 나는 그러한 제목을 염두에 두지 않았었는데, 글을 쓰면서 내 견해가 그의 주장과 후발적으로 일치함을 알았다. 역시 보여지는 것은 정확한 것이어서 나의 봄과 그의 말하기가 접점을 가졌던 같다.

백승관_백일홍_혼합재료_가변크기_2004_부분
백승관_백일홍_혼합재료_가변크기_2004

그리하여 백승관이 된 백일홍은 이제 자신을 매체로도, 물질로도, 백승관이라는 존재로도 말하게 되었다. 백승관이 아니라 백일홍이 말하는 것이다. 이제 스스로 말하게 된 백일홍은 작가 백승관의 열린 귀가 된다. 나는 그의 작업의 접시형태를 이 순간 열린 귀로 보았다. 스스로 말하게 된 자가 가지는 활짝 열린 넓은 귀로 말이다. 자신이 스스로 말할 수 있게 된 그는 이제 그것을 들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백일홍이 되면서 말하고 스스로 듣는다. ● 백일홍 외에도 이번 전시에는 종전의 작업이 계속되고도 있는데, 폴리와 연밥을 아크릴박스에 묶어두는 연밥캐스팅이나 인조잔디로 캔버스바구니에 담는 것 등이다. 나는 백승관의 이전의 작품들을 보면서 자신의 주제인 "진화evolution"의 시발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조그맣고 조용한 그 발아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의 눈을 개미의 시점에 놓고, 꽃이 경이롭게 피는 장면을 관찰하면서 그들의 시간과 진행을 본다든지 하는 것처럼. 매우 미세한 어떤 것이어도 새롭고 우리의 인식과 자극을 자극하고 변환시킬 수 있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진화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백승관의 지금까지의 작업은 매우 다양한 매체를 구사하고(chart plate, photo, silkscreen, object film:kodark EPR 4051 등) 그의 전 '작품세계=매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예술이 물질 그 자체가 목적으로 다루는 일을 지양하고자하기 때문에 그 자체를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반면 백승관이 매체확장을 꾀하면서도 연밥이나 잔디 등의 다른 맥락의 재료들을 공존시키는 것은 무생물에 의사-생물체(인조잔디이므로)를 도입하고, 무기체와 유기체의 역설적 결합을 시도하여 매체적 건조함과 산업적 환경, 복제와 반복, 미케니컬한 프로세스 등이 주는 물질로서의 매체를 넘어가기 위해서이다.

백승관_백일홍_혼합재료_2004
백승관_백일홍_혼합재료_2004
백승관_백일홍_혼합재료_2004_부분

문제는 그동안 백승관이 사용한 이러한 매체들이 그 자체로 하나의 지표나 기호로서 얼마나 전환되는가 하는 것이다. 연밥이 폴리 속에 잠겨서 아크릴박스 속에 들어가 있다든지, 사진, 오브제필름, 실크스크린등이 차트플레이트등에 걸려 보여주는 내용들이 가지는 의미화 맥락을 읽어야겠지만 그의 매체들은 자체적인 강조와 스스로의 물성적 주장 때문에 이들이 내포하고자 한 기호나 함의와는 실제로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매체와 내용이 공존하기보다는 혼재하는 것으로 읽었다. 이것은 일부 백승관이 의도적으로 유발하는 효과d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산업적 환경을 강조하고, 그러한 가운데 유기적이거나 생물학적인 것을 결합하고, 미세하고 거대한 것 사이의 차이를 역전시키기도 하면서 말이다. ● 그러나 이러한 지점에서의 합일은 이질적인 것이 공존하고, 역설을 불러일으키고, 그리하여 제3의 기표적인 대치를 유발하더라도 이것은 등가한 것들끼리의 자리바꿈이고 공존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매체와 스토리간의 자리바꿈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공존은 잘 읽히지가 않는다. 매체는 그 자신을 내용 자체로 주장할 수 있고 다른 매체와의 공존이나 자리바꿈을 유발할 수 있다. 또 이미지나 내용은 그것 자체로 형상을 가진다. 이 두가지의 공존, 매체와 스토리간의 직접적인 공존은 좀 혼돈스럽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백승관의 작품에서 이미지가 가지는 내용적 함의, 혹은 스토리는 적지 않다). 백승관의 작품에서 하나의 사물 기호로서의 기표는 이미 매체적 속성 속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기호와의 공존, 그것이 아무리 다른 것끼리의 역설적 공존이라고 하더라도 자리바꿈을 이루어내기보다는 혼돈으로 빠지는 것이다. 작가도 그러한 불일치를 체감하는지, 혼돈과 카오스를 언급하고 있다. 역시 그 혼돈을 작가는 의도적으로 유발한다는 뉴앙스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백승관_백일홍_캔버스에 혼합재료_97×40cm_2004
백승관_백일홍_캔버스에 혼합재료_40×97cm_2004
백승관_백일홍_캔버스에 혼합재료_97×40cm_2004

이러한 이미 하나의 사물과 기호sign로서의 주장을 가지는 매체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지표index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표라는 것은 작가가 사용하는 기호적 매체나 내용들이 그의 작품 내에서 그리고 주변의 환경 속에서 하나의 고유한 지시체로서의 역할을 사회적으로 통용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즉 백승관의 연밥이나 플레이트에 거는 이미지들이 작가 고유한 유통적 코드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의 매체와 기호들이 벤자민적 산업화된 복제물이자 부산물이고 21c 후기 산업사회를 반영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의 지시체의 층들은 더욱더 역설적으로 그러한 지표화작업이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한 "매체의 홍수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고자"한다는(2004 PICI전시에 대한 작가의 변) 작가는 이러한 과정을 소망한다고 할 수 있다. 매체와의 합일 속에 자신의 욕망과, 자기됨, 행위하고픈 소망과 존재로 현현시키고자 하는 바램 등을 말하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할 때 매체는 더 이상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가 되고, 그것이 부식시킨 철판이고 납이 얹어져 있어도 촉촉하고 부드러웁고 섬세한 개화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 스틸, 이미지 복사 등의 반복도 점차 정돈된 유사의 종목으로 묶여져 하나의 백승관적 지표로 역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풀어가는 것이 그의 진화의 세계가 될 것이다. 사물을 새롭게 해석하게 하고, 인식을 흔들어 놓고, 혼돈시키고 혼돈 속에서 새로운 진화의 싹을 고요히, 그러나 강력하게 찾는 것으로서 말이다. ● 이번 전시의 백일홍은 그의 지표이자 기호이자 그것을 담는 그릇(매체)가 되어가는 것 같다. 여기에는 공존과 합일과 산업사회꽃으로서의 우아와 섬세함이 있다. 인조잔디도 매체와 내용간의 결합이 보이기 시작하여 자신의 고유 언어로 과정되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포토에칭인 금속판 위에 전사 후 질산부식하여 보여주는 비행기의 밑모습이나, 아크릴릭으로 피어오르게 하는 꽃송이다발의 이미지들을 보면서 이미 또 다른 지층으로 넘어가고자 하는 그의 특유의 혼돈기법은 계속되는 것같다는 생각을 한다. 정착보다는 이동을, 고착보다는 혼재를 그는 선호하는 듯하다. 그가 다루어어야 할 또 다른 새로운 재현이미지는 이 산업사회에 너무나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신방흔

Vol.20040617a | 백승관 개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