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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611_금요일_05:30pm
강홍구 홈페이지 www.cicifine.com
갤러리 숲 서울 마포구 창전동 6-4번지 전원미술학원 B1 Tel. 02_338_1240
오쇠리에 관한 시선 혹은 무력감 ● 강홍구의 최근 작업의 대상은 오쇠리라는 특정한 공간이다. 오쇠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이다. 그러나 이 중성적 진술에는 오쇠리가 김포공항 바로 옆, 겨우 담 하나를 두고 바싹 붙어 있다는 사실이 빠져 있다. 국가 권력과 시스템이 공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분할한 공간을 뜻하는 주소는 사실을 담고 있지만 진실은 없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사진은 기묘하게 존 버거 말처럼 '아무리 가짜 모습일지라도 거기에 진정성'을 부여하지만 진실을 말하지는 않는다. ● 앞서 말한대로 오쇠리는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에 있다. 김포공항 바로 옆에 붙어 있기 때문에 항공기 소음이 대단한 곳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김포공항이 생긴 이래 그 끔찍한 소음 아래서 마을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고, 그에 따른 항의와 대책의 요구가 계속되었다. 그 결과1987년 4월 10일 오쇠리는 항공기 소음피해 1종 지역으로 결정되었고, 서울지방항공청과 부천시가 협약하여 마을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그곳을 공원이나 골프장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곳이 골프장이 될지, 공원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곳이 될지는 아직 확정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가옥주들은 대개 원만한 협의가 되어 이주가 거의 이루어졌으나 사정이 어려운 세입자들은 아직도 거주하고 있다. 물론 거주자의 수는 점점 줄어가고 있으나 이주 대책은 아직도 완전하게 결정된 상태는 아니다. ● 작가가 처음 오쇠리 사진을 찍은 것은 99년이었다고 한다. 특별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근처에서 살고 있다는 우연 때문이었다. 그는 순간적인 폭발력은 낮지만 지연성이 대단히 강한 무슨 특수 저강도 폭탄을 맞은 것처럼 페허가 되어가고 있는 마을이 주는 놀라운 인상 때문에 카메라 셔터를 눌렀지만 동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고 말한다. 다만 한가지, 한 마을이 폐허가 되가는 일이 우리 사회 전체에 대한 일종의 상징이자 지표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우선 대상과의 거리와 화각이다. 멀리 떨어진 대상들은 일종의 의사 파노라마적 구조 속에서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의사 파노라마 구조란 강홍구의 사진들이 외견상 파노라마적 구조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균열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 균열은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된 몇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인 자국이면서 동시에 매끈한 풍경 사진이 되는 것을 막는다. 그 뿐만 아니라 그 금들은 풍경이 하나의 통일된 광경이 아니라 강제로 접합되었다는 것을 노출시킨다. 때문에 그의 사진들은 파노라마적 제스춰를 취한 상태가 된다. ● 잘 알려져 있듯이 파노라마는 사진이 발명되기 이전 영국 화가 로버트 버커가 발명한 장치이다. 커다란 원호 모양의 실내에 정밀한 원근법에 의해 풍경을 그려 붙이고 원의 중심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의 구경거리로서의 파노라마는 1793년 처음 선을 보였고 그것이 발전된 형태가 디오라마이며 아직도 박물관, 전시관에서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파노라마는 근대적 시각의 초창기의 발명품으로 모든 풍경들의 깊이를 없애고, 균질화하며 구경거리이자 관리 대상 정도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래서 파노라마 사진은 그럴듯한 관광용 선전 사진이나 대상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사용된다.
하지만 강홍구의 사진은 이미 지적했듯이 지극히 의사적이며 그 의사적 파노라마는 시선의 내적 갈등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오쇠리라는 피해와 갈등의 현장의 외견적 인상이 주는 하나의 구경거리로서의 특징과 국외자로서 바라보고 구경하며 사진을 찍는다는 데서 오는 심리적인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그 갈등은 일종의 변명이자 도주이다. 즉 모든 사진, 혹은 예술가들은 참여자라기 보다는 구경꾼이자, 기록자라는 동시에 솔직한 고백이기도 하다. 그 고백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까 하는 문제는 그 사진을 바라보는 관객의 문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관객 역시 그 사진을 하나의 작품, 정확히 말해서 구경거리로 보는 순간 일종의 공모자가 되기 때문이다. ● 강홍구의 작품은 다큐멘터리적 성격을 가진 것 같지만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것은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그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풍경의 화각은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쓰이는 표준 렌즈의 화각을 벗어나 광각에 가까이 가있다. 광각은 인간의 눈으로는 가질 수 없는 시야이다. 그것은 순전한 카메라만의 시각이며 대상들의 실재감과 거리감을 박탈하고 공간을 뒤틀어 왜곡시킨다. 물론 표준렌즈의 시각이 인간의 시야와 유사하다는 것 역시 카메라의 시야이지만 광각 렌즈로 바라본 풍경은 대상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보다는 공간의 구조와 구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구경거리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해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다큐, 기록적 사진들은 왜곡이 심한 화각들을 피한다.
강홍구의 작품에서 광각은 독특한 역할을 한다. 그가 말하는 구경군의 시각은 그것을 통해 강조되면서 동시에 우리가 가진 일상적인 구경꾼으로서의 경험을 끌어낸다. 우리가 가진 시각적 욕망은 대단히 강렬하다. 자신의 안전만 보장 된다면 무엇이나 기꺼이 구경하려 들고, 경우에 따라서는 신상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그 욕망을 충족 시키려 든다. 싸움, 전쟁, 불, 시위 등 폭력적인 것들일 수록 더 구미를 당기는 구경거리가 되며 그것은 우리의 경험적 리얼리즘을 형성하는데 일조한다. 즉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어서 세부는 보이지 않더라도 전체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는 구경을 위한 좋은 자리가 되며, 거기서 얻어진 시야는 일상적 경험 속에 자리 잡는다. 강홍구의 사진이 의사 파노라마적 시각과 극단적이지 않은 광각을 결합함으로써 얻는 것은 바로 그 경험적 리얼리즘이다. ● 물론 그 경험적 리얼리즘은 한계가 분명하다. 그것은 우선 대상에 대한 애매한 태도와 어정쩡한 거리로 나타난다. 오쇠리라는 특정한 공간이 가진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갈등, 고통의 구조를 드러내는데는 성공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강홍구의 작품이 가지는 한계이기도 하지만 사진 혹은 우리 시대의 모든 재현 매체들이 가지는 본질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근래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많지만 그 분위기는 대단히 공허하다. 기이하게도 다큐멘터리적 목적으로 찍은 사진들까지도 전시장에 모아 놓으면 유사한 대상, 동일한 프레임과 형식적 태도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면서 공허해진다. 그것은 최근에 국내에 전시된 베허 부부의 사진에서도 확인되며 몇몇 다큐멘터리 사진전에서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이는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프린트가 보여주는 냉담한, 무감감과 지극히 유사하다. 이 유사성이 핼 포스터가 어디선가 말한바 있는 일종의 외상적 증후군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사진가들 조차도 사진의 재현성에 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마가렛 버크 화이트처럽 '중요한 것은 철저한 진실이며, 나를 감동시키는 것은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그 진실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 이제 사진은 무엇인가를 재현하지만 재현 자체에 대한 믿음이 없으며 그에 대해 다루지도 않는다. 물론 대중 매체와 관습적인 권력 속에서 사진은 사실에 대한 증거로 그 인증력을 갖지만 그것은 문자 그대로 관습적이다. 심지어 최근에 충격을 준 미군의 이라크 포로를 학대한 사진조차도 사실의 단편을 보여줄 뿐 배후의 진실을 결코 재현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디지털 사진은 바로 그 재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사진의 세계에 결정타를 가하는 마지막 일격일 수도 있다. 강홍구가 이용한 디지털 사진도 프린트된 상태, 의사 파노라마적 성격, 어정쩡한 광각적 시야 등에 의해 뭔가를 재현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 사진이 된다. 재현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희망을 뒤흔들고, 표면에 금을 내서 이미지들은 그저 인화지 위에서 떨며 머물러 있을 뿐이다.
오쇠리는 단순히 비행기 소음에 의해 피해를 본 한 마을로 그치지 않는다. 얼마전에 미군 사격장 폐쇄를 결정한 매향리와 수많은 수몰지구 마을들과, 신도시 지역 더 나아가면 온 나라 전체의 동네들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강홍구의 작업들은 그에 대한 일종의 환유이자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환유로서의 사진은 오쇠리라는 동네를 통해 우리나라 전체를 들여다보는 통로 역할을 한다. 전시된 사진뿐만 아니라 전시되지 않은 많은 사진 속에 오쇠리는 다양한 이미지로 존재한다. 문닫은 지 오래된 퇴락한 이발소, 세입자들이 투쟁하던 건물과 거기에 걸린 물 빠진 태극기, 장다리꽃이 노랗게 핀 밭, 불탄 집들, 집이 사라진 자리에 쌓인 쓰레기와 멀쩡하게 자라 잎이 푸른 나무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오쇠리에 수십여 차례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났고 2003년에는 열살도 안된 어린 남매가 불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역시 존 버거의 말처럼 '사진은 거짓말을 못하지만 마찬가지로 진실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 어쩌면 그것이 강홍구의 사진을 비롯한 근래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여러 특성들을 들여다보는 창구 역할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강홍구를 비롯한 요즘의 사진들이 보이는 공허함은 무엇인가를 재현하면서도 결국은 재현 자체를 다루지는 못하고 있으며, 진실을 말하지도 영향력을 갖지도 못하고 있다는 무력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력감은 일반화된 경향이 된다. 그래서 사진은 재현의 성격을 모두 포함하면서도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노골적으로 무력감을 드러내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 가능성조차 배제해 버린다. 재현은 포기된 것이 아니라 재현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강홍구의 사진을 비롯한 우리 시대의 모든 이미지들 볼 때 우리는 그 이미지를 생산하고 동시에 침묵시키는 배후의 아이러니 보아야 할 것이다. ■ 갤러리 숲
Vol.20040611a | 강홍구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