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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0219_수요일_06:00pm
대안공간 풀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21번지 B1 Tel. 02_735_4805
드라마 세트 / 파편 / 위장 ● 거의 진짜에 가까운 것에 대한 광적인 갈망은 언제나 기억의 진공 상태에 대한 신경질적 반응으로나 나타날 뿐이다. 절대 모조품은 실체가 없는 현실에 대한 불행한 자의식의 산물이다._ 움베르토 에코, 마법의 성
1. 어느 방송국 휴양 시설 안에 있는 드라마 세트를 본 것은 우연이었다. 이제 더 이상 쓰지 않는, 용도가 폐기된 드라마 세트는 기이했다. 내려 쬐는 여름 햇빛 아래 아무도 없는 가짜 거리가 있었다. 일제 시대 부터 육, 칠십년 대 까지, 공간적으로는 서울에서 평양까지 시간과 공간을 건너 뛰어 한 곳에 모인 새로운 세계였다. 건물벽에는 컴퓨터로 프린트 된 퇴색한 광고지들이 붙어있었고, 바람이 불면 식당문에 내걸린 일본식 등과 천에 쓴 메뉴들이 흔들렸다. 내가 본 어떤 미술 작품보다도 쇼킹했다. 아니 어처구니없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 드라마와 영화를 위한 세트들은 그 자체로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카메라를 통해 영상화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존재한다. 즉 이차원적 영상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재현된, 혹은 가짜 삼차원인 것이다. ● 때문에 용도가 사라진 세트는 관광자원으로 활용되지 않는 한 버려진다. 그 버려진 세트의 폐허는 현실의 폐허보다 더 폐허 같다. 아니 사실 세트는 버려진 다음에 현실이 되기 시작한다. 대충 만들어진 건물의 일부가 허물어지고 가로수 잎이 푸르러지고 창문에 먼지가 쌓이면서 영상화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즉 기호가 사물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트가 가진 일회용 성격 때문에 공허함과 가짜성은 더 증폭된다. 그 때문에 기이함이 더했던 것일까? ● 2. 저 유명한 야인시대의 드라마 세트를 가본 것은 최근의 일이다. 부천 상동지구, 한편에서는 농지를 대지로 만들어 끔찍한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고, 다른 한편은 연립주택과 교회와 상가 건물을 짓고 있는 사이에 세트장이 있었다. ● 절묘한 공간 배치였다. 근처의 모든 것이 거대한 세트라는 것을 너무 잘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세트장 안에는 사람이 너무 많고 촬영이 진행중이어서 전에 본 드라마 세트와는 달랐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한면만 그려진 광화문과 내걸린 태극기와 일제 시대의 충무로, 명동, 종로를 삼천원을 지불하고 구경하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아무튼 감흥은 전만 못했다. 애초부터 관광지로 생각하고 만들었기 때문일까? 어쨌든 좋다. 가짜라는 것, 우리 삶 전체가 세트 같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니까.
3. 내가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 늘 포착했으면 하는 순간은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어떤 때이다. 분명히 현실인데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 순간들. 그렇다고 해서 그 순간들이 에스에프 영화 같은 분위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순간들은 지극히 평범한 풍경들에 있다. 놀이 공원, 식당, 장례식장, 해수욕장, 술집, 그린벨트, 드라마 세트 등등. 나는 지극히 무의미한 가짜 사진들을 만들고 싶었다. 미술 작품을 둘러싼 제도와 말과 이론들이 너무 짜증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사진들이 무의미하고, 공허하고, 황당무계하기를 바랐다. ● 그러나 사진을 찍고, 사진에 약간의 조작을 가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그 사진들 속에서 자꾸 죽음을 읽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죽음은 시간을 정지시키고 그 대상은 죽음의 상태에 있다는 사진 담론 속의 죽음은 아니었다. 현실 자체의 죽음, 그러나 죽음이 아닌 다른 것으로 느껴지는 무엇이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닭을 잡는 대신 죽은 닭을, 물고기를 잡는 대신 죽은 물고기를 산다. 그 죽은 닭과 물고기들은 머리와 내장이 달아나고 마치 죽음이 아닌 것처럼, 시체가 아닌 것처럼 비닐에 싸여 포장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다. 죽음이 아니라 물건과 상품으로 취급할 뿐이다. 죽음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감각도 없다. 삶 자체도 비닐 랩에 싸인지 오래인 것이다. 그 비닐 랩은 매끄럽고 투명하지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러한 상태는 사물 뿐만 아니라 풍경과 인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 된다. 그린 벨트와 골목과 길과 거리와 세트장과 그 모든 곳에도. ● 이러한 죽음, 공허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열심히 생산해낸 것인데 사진 어디에나 들어 있었다. 의도한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러므로 할 수 없이 내 작품들은 결국 죽음에 대한, 시체선호증에 대한 사진이 되고 말았다. 혹은 크라카우어의 말처럼 의도하지 않았어도 피할 도리 없이 사진에 담기게 되는 파편화된 세계의 필연적인 측면일 것이다.
4. 크라카우어는 자신의 영화 이론의 전개를 위해 사진에 관해 말한다. 그는 우선 사진의 특성을 연출되지 않는 현실unstaged reality, 우연성the fortutious, 무한성endelessness, 비결정성indetermines이라고 주장한다. ● 비연출성이란 사진에 필연적으로 담기게 되는 찍는 사람의 의도와 상관 없는 현실의 파편 때문에 발생하고, 그 우연성이 사진의 기술적 원근법적 질서에 금을 가게하며, 거기서 얻어지는 필연적 종합없는 파편성 때문에 무한하며, 바로 이러한 까닭으로 해서 사진은 결국 불명료한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 비결정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크라카우어의 관점에서 사진은 이상의 특성 때문에 현실의 총체적인 어떤 것을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더 이상 통일성, 총체성이 불가능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진은 현실의 파편성을 통해, 그러한 파편이 새롭게 짜여질 수 있는 전망을 통해, 진정한 변혁의 수단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크라카우어는 주장한다. 어차피 현실은 늘 파편, 폐허의 모습으로만 주어지며 그것을 가장 정확하게 담는 매체가 사진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파편 밖에 볼 수 없는 세계에서 그 파편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사진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 크라카우어의 주장은 옳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적 관점에서 보면 잡음noise으로 가득찬 정보인 사진은 세계의 파편만을 담을 뿐이며 그 파편들을 아무리 의도적으로 배열하고 정리해도 결국은 우연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크라카우어 자신이 말하듯이 아무리 뒤로 물러서도, 어떤 위치에서도 사진은 세계 전체를 담을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바르트나 크라카우어가 예술 사진 이외의 사진들이 사진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5. 디지털 사진은 전통적인 사진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더 자본주의적이고, 더 기계적이며, 동시에 더 파편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사진적인가? 아니면 컴퓨터로 조작되고 레이저 프린터로 출력 된다는 점 때문에 기술적 측면과 의미구성체적 측면에서 더 비사진적인가? ● 제임슨에 따르자면 예술작품에는 의미해석에 대해 이질적인 것으로 존속하는 기술적 요소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적 요소를 지속적으로 의미 안으로 통합시키려는 미학적 해석의 요소가 있다. 기술적 요소와 미학적 요소는 그 자체가 일정한 역사적 시기의 규정성을 동시적으로 드러내는 측면들이다. 그리고 사진의 경우에는 기계적 이미지 복제라는 기술적 요소와 일관된 의미구성체라는 해석적 요소가 공존한다. ● 디지털은 기술적 측면에서 완벽한 복제를 실현 시켰다는 점과 그 복제가 사진의 파편성과 우연성을 교활하게 가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작가의 주관성과 대상에 대한 의미 부여를 더욱더 강화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주었다. 이것은 사진의 아우라, 인증력, 우연성 등을 붕괴시키면서 동시에 강화했음을 의미한다. 이 패러독스는 의미구성체로서의 사진에도 적용된다. 간단한 조작을 통해 사진은 그 의미가 강화되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디지털 사진도 여전히 파편이라는 것이다.
6. 나는 원래 사진의 이런 측면들, 특성들에 별 관심이 없었다. 사진은 그저 이미지일 뿐이어서 내가 본 세계를 가장 그럴 듯하게 복제하고 보여주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의문은 그냥 찾아왔다. 사진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전시장에 전시되는 사진들은 저널리즘 사진, 개인적 기록과 기억으로서의 사진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뒤져보니 언젠가 쓴 메모가 나온다. ● - 세계에 대한 개인적인 시선이 무의미해진 지금 미술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더욱 더 개인적인 되거나(그것이 가능하다면) 개인적인 시각을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인 영상적 시각과 최대한 충돌 시키는(이 역시 가능하다면) 길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 개인적 시선의 의도적인 선택은 미술사와 싸우는 길이다. 그 싸움은 독창성, 차이의 획득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고정된 의미들을 깨부수고 재건축 해야하는 싸움이다. 돈키호테적인 이 싸움의 배경에는 아직도 미술의 신화와 압력이 스모그 보다 짙게 끼어었기 때문에 그 싸움은 변질되거나 목표가 흐려져 버린다. 하지만 그 신화와 압력은 미술을 둘러 싼 광휘이기도 한데 그 광휘는 물론 함정이다. 빛나는 함정은 도처에 널려 있어서 빠지면 나올 수가 없다. 나와도 눈이 멀어버린다. / 영상 매체의 힘은 개인적 시선을 중성화 시키고 탈개인화 시키며 사회에 공개되었을 때 개인적 의미를 거의 제거해 버린다. 개인은 사라지고-카메라와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에 먹힌다- 오양의 비디오처럼 형식적으로는 블랙 마켓이지만 사실상 공식적인 시장에 공개될 때 철저하게 사회와 제도에 의해 씹힌다. 미술은 이 두시선 사이의 틈새를 아슬아슬하게 벌려놓자는 시도인데 그런 쐐기가 정말 가능할까. ● 지금 생각해보면 개인적 시각이란 제한된 영역에서 겨우 허용되는 것이고, 더구나 그 시선은 미술사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내부에서 지르는 비명에 가깝다. 이제 미술, 혹은 사진 따위를 통한 개인적 시선이란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것처럼 보이는 미술 시스템의 눈치와 보다 결정적으로는 대중매체와 그것을 지배하는 거대한 시스템의 눈치를 보면서 겨우 생존하고 있다.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전통적 의미의 미술 시스템이 아니라 거대 시스템이다. 즉 싸구려 엔터테이너로서의 역할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아니면 대중 매체의 조명을 잘 받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 더 나쁜 것은 개인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때문에 고독한 예술가 따위의 수사는 상품화 외에는 쓸모가 없는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
7. 그렇다면 개인적 시선이 불가능하고 무의미한 시대에 미술, 혹은 사진을 붙들고 있는 것은 무슨 의미나 가치가 있는 것일까? 솔직하게 말해 상품으로서의 가치도, 굉장한 예술적 가치도 없는 무의미한 일을 왜하는 것일까? 아도르노의 말처럼 그 무용성, 무용한 것이 생산되지 않는 시대에 무용함으로써 역설적 유용함을 증명하기 위해서일까? 그렇다고 답하면 멋있어 보이기도 할 것 같다. 하지만 아니다. ● 내가 생각하는 답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종의 존재증명 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삶 자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이런 대답은 사실 자신의 비참함과 무력함을 숨기기 위한, 또는 변명하기 위한 위장이다. 그러므로 사진 혹은 미술은 내 변명이자 위장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위장 이외에 다른 것을 솔직히 말해 믿지 못하겠다. ● 8. 결국 내 사진은 파편화된 세계를 파편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위장이다. 이것이 과연 크라카우어가 말한 것처럼 그럴듯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모르겠다. ● 의미라고 하니까 오래전에 읽은 어느 문학평론가의 말이 생각난다. 예술이 가치가 있는 것은 세상의 무의미와 싸우기 때문이라는. 돌이켜 보면 그 말은 아직도 전통적인 예술의 힘을 믿는다는 뜻이었다. 물론 나는 그런 로맨틱한 언사에 속을 만큼 젊지도 않고, 도저히 그런 말에 동의할 수도 없다. 아마도 무의미한 세계는 무의미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 강홍구
Vol.20030219a | 강홍구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