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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0926_금요일_05:00pm
갤러리사간 서울 종로구 소격동 55번지 Tel. 02_736_1447
안재홍이 만든 몸들 ● 얇고 가는 구리선이 무수하게 엉켜 체적을 이루고 자잘한 선들이 모여 부피를 만들며 볼륨과 입체감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곤 그것이 사람이 되었다. 짚으로 만든 인형 혹은 실뭉치로 채운 상을 떠올려 본다. 표피를 벗겨낸 청동선을 사용하고 있는 작가는 그것을 뭉치로 만들고 이를 다시 굵은 청동선으로 엮어내는 방법론을 보여준다. 앞서 언급했듯이 섬세한 인공섬유처럼 실선의 모양을 하고 있는 동선들은 육체의 피질을 제거한 신경조직이나 미세혈관을 연상케 한다. 철골로 용접된 기초 모형의 틀 위를 동선뭉치로 겹겹이 덮고, 씌운 다음 인체를 결박하듯 묶어 지탱하는 두꺼운 철사의 조형성을 통해 폭력과 억압의 의미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가 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피어난 청동의 부식현상(동선들을 암모니아수로 습기를 먹여 밀봉해 두면 그런 효과가 나온다)은 흡사 부패한 인체를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우연히 고물상에서 뭉쳐져 나뒹구는 구리선을 발견한 작가는 한 번 쓰고 버려지는 그 구리선이 자신과 동일시되기도 하고 자신의 속살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느낌, 마치 자신의 초상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어 그 재료를 선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화성 봉담 근처에 있는 작가의 작업실에서 만난 다소 기이한 이 물질의 다발은 흡사 바위에 잔뜩 낀 이끼나 벽에 무섭게 매달린 담쟁이 넝쿨처럼 그렇게 번져 나가거나 부풀어오르면서 자연스레 인간의 몸을 떠올려 준다. 녹이 슨 동선이 자아내는 진한 청록의 색감과 자잘한 선들로 빼곡이 채워진 인체는 기이한 흥미를 던져준다. 아울러 특정한 성의 표식이 지워진 이 중성적인 인간형들은 벽에 걸려있거나 바닥에 웅크리고 있다. 바위나 돌이 돼버린 인간, 모든 음성을 지우고 오로지 침묵으로만 굳어버린 사람, 감정을 억누른 채 부동으로 존재하는 이 몸들은 다분히 연극적인 상황설정을 만들어준다. 전시장은 따라서 한편의 극이 전개되는 특별한 무대가 되고 이 '몸'들은 저마다의 배역을 맡고 있어 보인다. ● 안재홍은 자신의 분신 같은 이 몸들을 공간에 부려놓으면서 결국 자신의 몸, 모든 것을 함축하고 저장하고 기억하고 있는 그 몸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 동안 작가는 언제나 인체로 이야기를 풀어왔다. 그러니까 그녀의 작업은 언제나 인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저런 모습으로 묶여 있는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는 매개가 됨과 동시에 무엇보다도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의 내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드러내고 자기 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힘, 의지를 보이고 싶어한다. 아니 자신의 작업이 그냥 사람이고자 하는 것이다.
다소 비장하고 더러 엄숙하고 무겁게 자리한 이 인간의 형상은 다분히 실존적인 뉘앙스를 함축하고 있어 보인다. 고뇌에 찬 몸짓이거나 속박과 굴레를 머금은 인간의 보편적인 운명에 대한 부드럽지만 예민한 시선이 감촉이 긷든 조각으로 다가온다. 한편으로는 그런 것들이 다소 상식적으로 눈을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그러한 상투형의 인상을 벗어나 다시 그 조각들을 본다면 꽁꽁 묶인 체 웅크리고 있거나 묶여서 밑을 내다보는 인간 군상들보다는 벽의 피부에 걸쳐있는, 단절과 생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인체들이 좀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것들은 일종의 부조이자 동시에 벽의 표면에 그려진 그림의 일종이다. 커다란 벽면에 힘찬 드로잉을 하듯 작가는 동선으로 그림(부조)을 그렸다. 무척이나 회화적인 충동을 감지하게 하는 그런 작업이다. 그래서 조각 작업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회화, 벽화로 다가온다. 가는 동선다발을 물감 삼아, 전시장 벽면을 화폭으로 삼고 그 위에 인간의 몸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 선으로 이루어진 이 부조(회화)는 덩어리로 존재하는, 특정한 3차원적 공간을 물리적으로 점유하는 조각의 관행에서 슬쩍 빠져 나와 평면에 기생하면서 납작한 평면이면서도 동시에 일정한 높이를 지닌 입체로서의 삶을 횡단한다. 또한 주변 벽면(환경)을 자신의 영역으로 빨아들이면서 분리시키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흰 벽면을 실존의 공간으로 삼아 무언의 몸짓을 펼쳐 보인다.
안재홍이 만든 몸은 구체적인 표정이나 특별한 몸짓 이전의 본능적인 살덩어리, 피와 혈관과 수분으로 뭉쳐진, 살과 뼈가 합쳐진 그런 몸으로 다가온다. 마치 살 껍질을 죄다 벗겨내 드러난 살의 안쪽 같다. 조각이 결국 몸의 외형만을 재현할 수밖에 없다면 이 작가는 그 안쪽, 깊이를 지닌 그 내부를 들여다보고자 염원하는데 그것은 다소 절박하다. 인간의 몸이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텅 빈 공간 같다. 한 개인의 감정과 사유가 분명 거주하는 곳이지만 동시에 그저 장기들로 가득 채워진 고무봉지 같은 것이 몸이기도 하다. 동물성으로서의 몸이 고상하고 숭고한 정신의 거처라는 아이러니는 화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이라면, 부정할 수 없다면 그 두 개의 영역을 함께 인정하는 선에서 살아갈 것이다. 미술은 그 두 개의 영역에서 언제나 정신의 우월성을 강조해왔지만 최근에는 몸 자체를 억압하지 않고 솔직하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몸의 재현이 동시대 미술의 화두가 되었음을 떠올려 보라. 안재홍은 인간의 안쪽을 표현하고자 한다. 자기의 내부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척 어렵고 지난한 일이다. 과연 미술은 인간의 그 내부를 재현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들을 길어 올려 시각의 영역아래 두고자 했다. 미술이 정신의 표현이고 내면을 투영하는 적절한 수단이라고 여겨왔다. 아마도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없고 보여줄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시각화의 욕망에 지배되어 왔다. ● 우리의 눈은 인간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는 없다. 우리가 내부를 보기 위해서는 절개를 해야 한다. 그러니 절개한 몸에는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없다. 그저 동물성으로서의 몸뿐이다. 안재홍의 조각은 일종의 절개와 단면의 조각인 셈이다. 외면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그 안쪽을 다시 보게 하는 것이다. 장기로 흘러 넘치는 안의 육체를 은유화 하는 동선들은 그것을 넘어서 인간 내부의 복잡 미묘한 심리와 정신의 예민한 가닥들 또한 효과적으로 재현한다. 피상적인 외피의 창백한 재현보다 적나라한 내부를 응시하게 하는 것이다. ■ 박영택
Vol.20030921a | 안재홍展 / ANJAEHONG / 安在洪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