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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03_0516_금요일_06:00pm
아티누스 갤러리_이전 Artinus Gallery_moved 서울 마포구 서교동 364-26번지 Tel. +82.(0)2.326.2326
얽히고 설킨 사람들간의 관계에서 굳이 명료한 해결법을 찾고자 하는 것은 덧없어 보인다. 다들 그렇고 그런 믿음과 아픔을 함께 지니고 살아가는 까닭이다. 다만 그 순간 순간마다의 처세술에 능한 얇삭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쇠심줄을 가지고 고리타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사이에도 여러 형태의 삶들이 오늘을 살고 있다. 여기서 누가 더 행복한 삶을 사는가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 더구나 두고보자는 식의 나중에 웃는 사람을 따지는 일은 더 한심해 보인다. 그저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눈앞에 펼쳐져 있을 뿐이다. ● 말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욕심은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남의 삶에 개입을 하여 콩 내놓아라 팥 내놓아라하며 핀잔과 칭찬으로 어떤 위계를 세워 본다. 위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편가르기가 되고 결국에는 스스로 자신의 세상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온다. ● 허황된 위계가 몰고 온 못난 생각들은 작은 다툼을 만들기도 하고 점점 더 커져서 전쟁을 감행하기고 한다. 20세기를 야만의 세기라 반성하면서 새로운 21세기를 일구려는 사람들의 눈앞에 다시 20세기보다 더 야만적인 추한 욕심들을 스펙타클한 영상 이미지로 쏟아 붓는 세력들이 있다. 마치 초식동물을 잡아먹기 위해 달려는 맹수를 촬영한 「동물의 왕국」을 떠올리게 하는 묘한 느낌들은 21세기 인간사회의 여러 모순들을 고민하는 것과 이성에 대한 의심과 회의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새삼 각인시킨다.
이김천의 근작들은 과거 작품들과 약간 차이를 보인다. 예전 작품들이 불투명한 2차원적 평면구성으로 전면회화적 양상을 보였다면 근작들은 공간의 맛과 깊이가 더해졌다. 그리고 한동안 보이지 않던 인물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화면에 등장한다. 물론 과거 이김천의 작업에 인물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혼자이거나 단둘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꾸며진 비교적 구체적인 인물묘사였다. 근작에서 보여지는 인물들은 구체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영혼에 가까운 관념적이며 개념화된 인물들이다. 그것도 울창한 풀 또는 숲 사이에서 중력의 영향도 커다랗게 받지 않고 부유하는 인물들이다. ● 이김천의 작품에 인물만큼이나 자극적인 주인공은 개였다. 이 개들 또한 근작에서는 매우 밝고 더 촘촘해진 털로 묘사된다. 처음에는 작가 자신으로 감정이입되어 화폭에 등장하였던 개가 이제는 어엿한 화면의 주인공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 ● 어찌되었든 예나 지금이나 이김천의 작업은 과도한 노동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흩날리는 꽃씨가 되었건, 풀잎이 되었건, 나무가 되었건, 개가 되었건 말이다. 심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밤하늘도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몇겹의 이야기와 몇겹의 붓질이 스쳐지나간 후에 시퍼런 하늘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하늘에 무심히 그려진 듯한 별 몇 개가 위치된다.
유기진도由技進道라고 했던가. 이김천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첫 번째로 떠올리는 생각이다. 물론 이김천은 도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기술자로 보기에도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하지만 과도한 장식을 위해 필요로 하는 엄청난 작업량은 예사롭지 않는 숙련熟練의 과정을 요구한다. 마치 기예를 연마하는 것처럼 말이다. 포정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심수상응心手相應의 과정이 있었음직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김천의 작품에서 유독 해결되지 않는 것이 인물들이다. 탄탄하고 고단한 밑그림 과정 뒤에 행해지는 인물묘사는 고작 몇 획으로만 쓱싹 그려진다. 인물들뿐만 아니다. 개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무성의해 보일 정도로 순식간에 속필로 별 묘사 없이 그려진다. 어찌보면 그림으로 그려진다기 보다는 글처럼 씌어진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정도로 축약된 기호로 화폭에 자리잡는다.
이김천은 "아직 사람을 그리기에는 아직 제가 부족한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라고 겸연쩍게 웃으면서 변명을 하지만 뭔가 개운하지 않는 구석이 있다. ● 이김천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이입시켰다는 개의 묘사는 결코 배경 못지 않은 밀도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유독 타인들의 모습을 그리는데 있어서는 아직 구체적인 방법을 찾지 못한 것 같은 태도를 취하는 데에는 필시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 아마도 짐작하기에는 이김천이 그리고자 하는 것이 단순한 꽃이나 풀 그리고 산천과 금수가 아니라 삶이라는 인간관계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김천의 작품은 한폭의 만다라曼茶羅를 연상케 한다. 인간관계와 더불어 세상만물의 '깨달음을 이루는 장소'로서 이김천의 화폭이 제시되었기 때문에 굳이 하나 하나의 인물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 그래서 얽히고 설킨 식물들을 취집聚集하여 요지경 세상을 만든 후 그곳에서 삶을 일구며 스쳐지나가는 인물들 몇몇을 강요하지 않고 화폭에 잠시 붙잡아두는 방법을 찾고자 했던 것 같다. 서로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그 스스로 움직이는 그런 세상을 이김천의 화폭은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 최금수
Vol.20030512a | 이김천展 / LEEGIMCHEON / 李金泉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