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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 SEJONG CENTER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175 (세종로 81-3번지) 데크프라자 Tel. +82.(0)2.399.1777 www.sejongpac.or.kr
이기일의 프로파겐더는 거대 로봇형태의 강철빔 구조물로서 현대의 신화 속에 드리워진 지난 시기의 그림자와 미적체험을 상징하는 듯 하는데, 70년대의 영웅 이순신을 대신하여 세종로를 경계하는 2000년대의 영웅은 현대자본주의의 거대 대중매체들과 기업들 그리고 대중소비문화와 그 감수성들을 떠올릴 수도 있다. 여기서 전시 제목 프로파겐더는 잠시 잊고 작품이 놓인 장소 또는 공간에 대해 생각해보자. ● 1970년대 건축된 세종문화회관은 석조기둥과 건물이 ㄷ형태로 야외마당을 에워싼 구조를 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은 석조건물이 그렇듯 꾀죄죄한 세월의 때가 묻어있어서 어떤 장엄한 시간의 무게와 고급예술문화의 산실로서 그동안 한국문화계에 차지하는 묵직한 권위와 풍모가 느껴진다. 세종문화회관 옆에는 모던건축 스타일의 정부청사건물이 이웃하고 있고, 경복궁과 광화문이 있고, 또한 조선일보사, 동아일보사, 대한매일신문사와 같은 대형언론사들이 세종로를 사이에 두고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끝으로 광화문 사거리 중앙에 서있는 거대석상인 이순신 상도 떠올려보자. 이 공간은 한국 근현대사의 대소사들과 지속적으로 무수한 변화를 거듭해온 문화적 사건들과 흔적들이 짙은 알레고리와 은유를 담아낸다. 프로파겐더는 여기에 위치하게된다.
작가는 작품의 높이와 시선을 이순신장군상에 맞추고 있다. 작품은 마징가제트나 로봇태권브이 류의 거대로봇 형태를 하고 에펠탑과 같은 철탑의 구조물 또는 건물의 기초골격의 구조를 그대로 노출한 모습이다. ● 프로파겐더라는 말을 떠올려보자. 거대 로봇 구조물은 프로파겐디스트(선동가, 전도사)로 나타나는데, 이 프로파겐디스트는 1970년대의 이념을 상징하는 영웅상 이순신장군과 대등한 자세로 동등한 높이의 시선으로 이순신장군과 마주하고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순신장군의 뒤통수를 보고 있다. 동시에 이순신장군을 사이로 동아일보사와 대한매일신문사를 바라보고 있다. 맞은 편에는 미문화원과 한국일보사를 보고있으며 좌측으로는 광화문을 보고있는 형국이다. 이 프로파겐디스트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 십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80년대 미대를 다닌 학생들 중 상당수는 한국의 사회현실의 중심에 서있었거나 서있다는 대리체험을 하고있었다. 이러한 현실체험의 조숙성과 함께 1989년 초 대대적인 사회과학도서의 해금조치에 따라 사회주의 미술이론을 포함한 예술사회학의 세례를 받게 되는데, 이러한 환경의 변화와 현실의 격변에 대처해 미술가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시각과 포지션을 만들어갔다. 이 시기 미술계는 현실주의의 시대였고, 프로파겐더로서의 미술은 당시 미술가들의 하나의 유력한 모델이었다. 그러면 이기일의 프로파겐더는 그러한 프로파겐더인가?
다시 한번 미술사를 짚어보자. 19세기 후반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혁명적 형식실험들을 떠올려보자. 또는 미니멀이나 팝아트와 같이 새로운 개념적 실험들을 떠올려보자. 새로운 세계현실과 세계관을 은유하는 다양한 현대미술들을 떠올려 볼 때, 이기일의 프로파겐더는 새로의 감성의 천년왕국을 약속하면서 예술형식상의 또는 미적감수성의 새로운 구원과 은총을 약속하는가? 이기일은 전적으로 관습적이며 전통적인 내용의 예술적 체험과 감상을 만화영화나 연속극에 등장할 만한 이미지를 패러디한 새로운 미적형식을 제시하는가? 작품과 전시는 매번 관객과 작가 자신조차 속이며 배반한 채 은유적이거나 알레고리적으로 나타난다. 결코 직접적이지 않다. ● 거대한 철조구조물 프로파겐더는 이렇게 진지한 의문을 벗어놓고 주위의 무게를 덜어내려는 듯 매우 경쾌하고 가벼운 칼라로 채색하고 있다. 막 문방구에서 나온 앙징맞은 로봇프라모델인양, 이기일의 작품은 팝적인 취향과 감수성을 들고 나온 프로파겐더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거대한 강철빔 구조물의 물질성과 중력은 전통적인 근현대 조각의 미덕을 지니고 있다. 강철은 근대성의 상징이며 수직 수평의 교직형태의 구조는 강철과 함께 현대도시의 풍경을 만들어낸 주역이다. 성장하는 현대인의 자신감은 이러한 강철빔으로 구성된 수직 수평의 역학적 구조를 통해 마천루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기일의 프로파겐더는 수직 상승하는 인간의 기술문명의 미학을 담고 있다. ● 지상으로부터 7m이상의 높이로 만들어진 거대로봇은 사실 걷거나 뛸 수 없다. 이기일의 프로파겐더는 감상적 체험이나 상상력의 비물리적 힘에 의해 지탱하는 상상의 구조물인 것이다. 동시에 어떤 형태로든 이념적 힘과 이미지의 힘을 동력으로 삼아 움직이는.
이 거대한 로봇은 2002년 겨울 세종로로 걸어들어와 한번 이순신장군의 뒤통수를 쳐다본 후, 세종문화회관 계단을 느릿느릿 걸어올라가 뒤돌아선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선전한다. 그 무언가는 앞서 말한 이념의 빛이거나 서울에 거주하는 현대인들의 미감에 대한 어떤 호소이다. 여러 차원의 의미와 미적 감수성이 그물망의 그물코처럼 걸쳐있는데, 한번 다시 생각해보면 역설적이게도 프로파겐더는 전통적인 미술양식의 몰락과 대중소비문화의 번영을 전하는 전령일지도. 무엇을 역설하는지는 모르지만 프로파겐디스트의 선전이 21세기 한국조각에 팝아트의 미학을 내비치는 것만은 분명한데, 그러나 이 또한 확실치 않을 것이다. 각종 의미와 가치관의 연쇄와 역설의 문화와 의미실종의 연쇄 속에 비비꼬인 한국미술의 상황이 프로파겐더의 의미를 끊임없이 유보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니 프로파겐더의 선전의 의미와 믿음과 확신은 금물이다. 누가 알겠는가? 매번 작가 자신도 속아버리는 그 의미를 종잡을 수 없도록 뒤틀어 놓거나 배반하는 미술의 음모를. ■ 김기용
Vol.20021226a | 이기일展 / LEEKIIL / 李起日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