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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걸음의 족적들을 포획하는 덫 ● 현대미술의 영역에서 전시회란 일종의 관계를 만드는 일이다. 작품과 작품 사이의 관계, 관객과 작품 사이의 관계, 나아가서는 작가와 관객 사이의 관계를 연출해 내는 일이다. 관계의 범주는 그 외에도 공간, 언론, 환경 등에도 적용되며 두 개체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보다 세가지 또는 네가지 요인이 상호 얽혀있는 복잡한 구조로 확대되기도 한다. 관계설정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은 예술적 소통이며 그 의미들 역시 확정되거나 완성된 것이 아닌 불확실하며 가변적 성질을 지닌다. ● 네번째 개인전을 개최하고 있는 이기일의 근작들 역시 관계설정을 위한 장치들로 무장되어 있다. 그의 작업은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주변적 요인으로서 전시공간이나 관객 그리고 전시방식등에 의해 다중적 의미들을 제공하고 있다. 작품으로 선택된 자동차와 못 그리고 신발등의 오브제는 하나의 주제를 위한 도구들로 사용되고 있으며, "걸음의 무게"는 작가가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 제시한 키워드이다.
이번 전시회는 크게 두가지 유형의 작업으로 나뉘어져 있다. 우선 전시장에서 만나게되는 것은 검정색 전기절연테이프로 표면 전체가 뒤덮힌 프라이드 자동차 한 대이다. 일상적 오브제에 대한 덮기, 싸기, 포장하기 등의 기법은 새삼스러운 조형방식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특별한 시각적 충격이 발생하는 이유는 그것은 바로 작품을 둘러싼 관계설정의 의도가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관계는 전시장 공간 안에 놓인 소형자동차와 그 위에 덮인 테이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 사이에 위치한 심리적 틈을 진동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오브제로서 탈것이 지닌 기호적 상징은 속력, 이동이며 표면이 거칠은 전열용 면 테이프에 의해 차단되어 있음을 관객들은 어렵지 않게 받아드린다. 검정테이프는 내용물을 뒤덮음으로써 오브제를 익명화 시키는 한편, 관객의 심리를 압박하는 힘을 발생하여 의식을 제3의 영역으로 전환시키게 된다. 이때 작가가 선택한 주제는 관객의 의식을 작가의 그것과 연결시키려는 열쇠로 작용한다. ● "걸음의 무게"는 현실에 대한 인식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네발에서 두발로 그리고 세발로 향하는 인간의 행보이며,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현실을 체험하는 우리들의 삶을 상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걸음을 위한 도구로서 그것의 기능이 박탈된 채 전시장 한가운데 서있는 자동차는 현대적 걸음의 족적들을 포획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전기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는 테이프는 위생붕대 처럼 아픈 일상의 기억들을 치유하기 위한 장치인가. 이렇게 그의 테이핑된 자동차는 우리의 의식을 각성시키면서 공간 위에 정지되어 우리의 의식을 사로잡는다. ● 테이프로 덮인 한쌍의 신발은 작은 오브제이지만 자동차의 그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 역시 삶을 운반하는 도구로서 이동과 신체의 보호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 기능이 전열 테이프로 차단됨으로써 다른 차원의 오브제로 변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면테이프의 반복되는 감싸기 과정에서 나타난 힘이 느껴진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박제화 되어가는 미이라처럼 겹쳐진 테이프의 에너지는 신발의 원래 형상을 변 형시키고 있다. 테이핑된 신발은 다시 테라코타로 복제되어 아크릴 박스에 놓여지게 되는데 이는 대량생산으로 일관된 현실의 문제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작가가 실행하는 복제는 손 작업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기계적 생산성과는 차별화된 분위기를 발생시킨다.
이번 전시회에 선보인 또하나의 작품유형은 중고목재상에서 모았던 쇠못들을 쌓아올린 것이다. 구부러진 쇠못들은 무게 때문에 자체적으로 얽히고 표면의 녹은 그 접착의 효과를 강화시키며 원통형의 무덤을 지탱시킨다. "잠정"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작업은 형태의 불확정성, 가변성 또는 개체와 집합 등의 개념을 생산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말로 생성과 소멸간의 끝없는 관계항을 가시화 시키는 작업이라 할 것이다. 통에 담아 뒤집는 쇠못작업의 방식은 매우 간단한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의 위대한 발견이며 작가의 재치와 예술적 감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성과로 보인다. ● 이기일의 "잠정" 시리즈는 설치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 전시장 바닥 위에 위태롭게 쌓여진 작은 매체의 집합은 와해되기 위해 태어난 물질일 뿐이기 때문이다. 소멸을 전제로한 생산물의 의미가 해체될 운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확산되는 이유는 그것이 관객의 의식과 소통관계를 형성시키는 매체로 작용하고 있음을 대변한다. ● 개체적 단위로서 못들은 하나하나의 단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집합이 이루는 거대한 구조체와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힘을 부여받는다. 전체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는 집적의 예술방식 역시 현대미술의 영역에서 오래 전부터 상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기일의 경우 세자르나 아르망의 그것과 차별화되는 것은 앞서 말했던 불확정적이며 가변적 성질 때문이라 할 것이다. ● 소멸과 파괴 그리고 해체에 대한 강렬한 집착이 작금에 새로운 비평적 가치를 부여받는 이유는 오늘의 상황을 대변하는 생산적 기능을 역설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시대의 정신구조는 이념과 가치들의 급속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조용한 명상의 장소인 화랑공간에 놓인 이기일의 작품이 어떤 힘을 품고 있는 것은 그것이 현실적 비평계의 상황과 현대적 삶의 현상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국제적으로 진행되는 이슈에 대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 작가에 대한 평가는 하나의 작업을 통해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이다. 예술의 행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모색의 단계를 걷고 있는 이기일의 경우 그가 걸어온 걸음은 예술가로서 그의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나름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다음의 작업에서 보여질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그것의 시각적 표현형식에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의 작업이 적어도 작품과 관객, 작품과 작품, 나아가서는 관객과 작가자신의 관계를 긴장된 것으로 유도하려는 예술의 전략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 김영호
Vol.19990305a | 이기일展 / LEEKIIL / 李起日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