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25_0308_토요일_05:00pm
주최 /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후원 / ㈜영일프레시젼
관람시간 / 10:00am~06:00pm 토요일_12:00pm~07:00pm / 일,공휴일 휴관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Art Centre Art Moment 서울 금천구 범안로9길 23 H동 Tel. +82.(0)2.6952.0005 artmoment.org @artmoment.doksan
지독하고도 생생한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당신은 먼저 그것이 꿈이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고, 다음으로 악몽의 순간들이 현실로 넘어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렇다면 약간은 다른 상황을 가정해 보자. 웃으며 잠에서 깨어난 순간은 어떠할까? 떠들썩한 웃음소리를 끊어버린 현실의 정적에 허탈감과 공허함을 마주한다. 이내 꿈에서의 여운을 그리워하며, 웃을 수 있는 일상을 기대하는 심정이 자리할지도 모른다. 기쁨이 충만했던 꿈의 허상은 조금도 웃을 수 없는 괴로운 현실이 만들어낸 환상이었을까? 웃으며 깨어난 그날, 우리는 어떤 하루를 기대할 수 있을까? 악몽이 주는 커다란 안도나 해방감과는 달리, 웃음으로 가득했던 허상의 세계는 당혹스러움과 허무함, 바람이나 소원과 같은 상이한 감정들의 층위를 가져온다. 마치 방황하는 청년의 시절과 같이 행복과 괴로움 사이를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마음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없던 일인 듯 지나갈 것이다. ● '(억압된) 소원의 (위장된) 성취'[1]라는 말처럼 꿈은 개인을 둘러싼 무수한 이야기의 세계를 창출한다. 그렇기에 현실과의 긴밀한 연계성을 바탕으로 진실과 허구, 의식과 무의식의 중첩 지점 위에 존재한다. 적나라한 욕망과 순수하고 절대적인 이상의 세계가 공존하는 꿈이 수면 속 '완전한 가상'이자 현실에서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꿈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흥미로운 소재로 펼쳐질 수 있겠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무엇보다 "인간은 꿈의 세계를 산출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예술가이다."라고 주장한 어느 사상가의 오래된 말[2]을 길어 와본다. 그는 꿈에서 형상을 구현하는 인간의 행위를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의 조형 능력에 비유했다. 이번 전시는 그의 말을 빌려, 까맣던 시야를 채워가는 '꿈의 세계'를 아무것도 없던 캔버스 위에 구축되는 회화에 대응시켜 바라보고자 한다. 회화를 예술가의 주관과 정신에 근원을 둔 '환영의 세계'로 간주하고, 이들의 작품 층위에서 발견되는 자아와 실존의 형상, 세계와 사회의 면면이 우리를 어떻게 비추고 있는지, 시대적 필연성과 서사의 확장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전시는 1990년대 출생하고 현재 활발히 활동 중인 회화 작가 6인의 그룹전으로 선보인다. 저마다의 세계 형상과 내재한 이야기는 비슷하면서도 상이한 양상으로 다가온다. 양하와 김민조는 세계 속 개인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곳에서 우리는 여러 모순적 양상이 혼재하는 세상에서 주체가 어떠한 모습으로 자립하고, 어떻게 타자와 공존을 이뤄가는지 본다. 강철규와 윤미류의 세계는 이야기의 세계로 존재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자리한 내면의 세계와 실재적 대상에서 발현되는 허구의 서사성을 실험하는 작가의 화면은 어느 때보다 자극적인 소재거리를 환영하는, 진실과 허구의 경계가 허물어진 현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회화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개인의 내면에 닿을 수 있는지, 그리고 회화에서 확장된 서사가 나와 타자, 그리고 사회적 담론과 만나 어떻게 공감의 영역을 형성할 수 있을지에 관해 보여준다. 손민석과 허찬미는 수행하는 관찰자가 발견할 수 있는 세계 이면의 세계를 보여주며, 예술가의 오래된 방법론인 시선의 지향성을 상기하게 한다. 오랜 시간의 관조와 사색은 무용성이나 비효율로 취급되는 대상의 이면을 새롭게 제시하고,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한 목표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현대의 속도를 잠시나마 지연시킨다. ● 90년대의 문을 연 낙관주의는 성장과 자유의 이념 위에 세워졌지만, 그 기대가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도 전에 빠르게 변형되어 갔다. 오늘날 90년대의 흔적은 정치 경제 체제를 비롯하여 개인의 몸과 마음, 집단과 세대, 그리고 기후에 이르는 각종 '위기'론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테러, 이념 갈등과 전쟁은 자신의 모습을 미세하게 변화시켜 가며 지속되고 있다. 일상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힘을 가졌다는 기술혁명은 취한 자와 배제된 이들을 구분하며, 희망과 불안의 두 얼굴을 한 채 다가오고 있다.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들은 90년대에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2025년 현재에는 인간의 생애주기에서 '청년기', 작가로서는 신진과 중견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청년기를 살아가는 인간군상에는 성장이나 도약, 발전, 그리고 미숙함, 불안, 방황 따위의 상반된 수식어가 뒤섞여 있다. 하지만 이들은 세대 간의 연결 집단이자 사회의 근미래를 예측하게 하기에, 언제나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 왔다. ● 작품과 작가 또한 시대와 사회의 일부로 존재하기 때문에 어떠한 형태이든 시대가 주는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때로 그것이 속해 있는 사회를 공부하고, 작품에 내재한 요소를 감각하고 분석함으로써 시대를 해명한다. 이번 전시 작가들 또한 현대사회에 기반한 물질문명을 활용하고, 익숙한 환경과 문화적 소재를 내세우기에 시대에 발맞춰 걷는 듯 보이면서도, 시대의 지향점을 역설적으로 부정하거나, 실존하는 개인을 마주하게 하는 은유와 상징의 세계를 설정하며, 오늘날을 이루는 것들을 반추하게 하는 시선을 끌어내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의 화면은 실재와 가상, 외연과 내연의 경계 위에서 마치 꿈처럼 펼쳐진다. 이번 전시는 저마다의 '환영의 세계'가 어떤 맥락으로 확장되고 유효할 수 있을지를 기대하며, 생애에 있어 불안정한 격동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을 이들의 회화를 현시점 가장 생동하는 예술로 바라보고자 한다.
부드러운 폭발이 존재할 수 있을까? 양하 작품의 주된 요소인 폭발하는 이미지는 전혀 위험하지 않을 것 같은, 마치 뭉게구름의 포근함으로, 때로는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익살스러운 인상으로 다가온다. 작가의 '시각적 아이러니'는 그것이 속한 세계(사회)와 관계에 존재하는 아이러니를 내포한다. 작가의 폭발은 실제 사건이나 폭력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이번 전시 작품에 등장하는 폭발은 작가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개별자 존재를 상징한다. 이들은 비정형의 연기가 자연스럽게 다른 형상을 연상시키는 것과 같이 꽃이나 동물처럼 보이기도 하며, 존재의 '개성'이나 '기분(stimmung)'처럼 표현된다. 개별자가 왜, 어떻게 폭발하고 있는지에 관한 궁금증은 개인의 내면 상태나 현대인의 존재 속성,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성 등의 키워드로 확장된다. 작가가 지속하고 있는 연작 제목 "울라고 만든 장면인데 울어야지, 뭐"는 다분히 의도적인 신파극의 하이라이트에서 알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시니컬하지만 순응적인 감정이 혼합된 태도는, 세계의 모순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바라보거나 소비해 버리고 마는 현대의 무신경한 시선과 연결된다. 이러한 세계에서 개별자는 폭발의 버금가는 표현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들의 폭발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내면을 감추고 살아가는 현대인, 또는 타인의 고통에 무심하게 거리 두는 사회가 가진 시선적 폭력의 은유로 비춰진다. 양하의 폭발은 종종 창문이나 문을 마주하고 있거나 벽을 부수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경계의 허묾이나 경계로 넘어감을 갈망하며, 세계와 세계를 연결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을 보여준다. ● 비행기, 새, 여객선 등 김민조 작업에 등장하는 소재는 작가가 거주해 온 삶의 반경에서 일상적으로 마주해오던 대상으로, 작가의 내면에 친숙하게 자리한 것들이다. 작가는 발견한 대상에 때로 자신을 투영하고, 당시의 삶이 지닌 의미와 내면의 감정을 함께 녹여낸다. 여러 기억과 감정의 모양들은 작품에서 한데 어우러져 비현실적인 내면의 풍경과 같이 구현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morning kiss」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비행기 집단의 활공을 선보이며, 마치 육신을 가진 존재들이 어우러져 추는 군무나, 친밀한 이들 간의 애정이 담긴 스킨쉽처럼 묘사된다. 이들이 그리는 화면은 마치 비행기가 된 꿈을 꾸듯 펼쳐진다. 김민조의 대상들은 언뜻 자유로워 보이지만 몸에 남아있는 그물이나 엮인 끈, 과도하게 뒤엉킨 모습 등은 이들이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인지에 관한 의구심을 유발한다. 연작 「하얀 눈」의 올빼미들은 날카로운 장애물과 거칠게 찢긴 철조망 사이로 비행한다. 하늘 높이 날아오를 능력이 있는 새들은 철조망과 관계없이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기에, 이들이 자아내는 풍경은 알 수 없는 공존을 재현한다. 작가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철망으로 인해 자유롭게 뛰놀지 못하는 노루에게서 새가 되고 싶은 꿈을 본다. 그리고 그것은 곧 당시 작가의 삶의 기억이자 자신에 관한 시선으로 연결된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는 전진/상승하고자 하는 기류와 이를 억제/방해하는 요소가 함께 등장한다. 이 방해 요소들은 강력한 제제가 아닌 하찮거나 무의미해 보이는 방식으로 표현되기에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지 못하지만, 마치 작은 가시처럼 마음에 남아 우리를 괴롭힌다. 솟아오르고자 하는 존재자의 욕망과 의지는 결코 폭발적으로 상승하지 못한 채 붙잡힘을 반복한다. 우리는 이 요소에 시대, 환경, 사회적 기준 등의 외부 조건이나 불안, 우울 등의 내면 상태 모두를 대입할 수 있다. 작가는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보다 삶의 지속과 그 과정에서 실존하는 개인에 더 많은 관심을 둔다고 말하는데, 이와 같은 작가의 태도는 상승과 억제가 이루는 불안정한 모순상태가 오히려 삶의 행보를 위한 동력이자 기묘한 균형상태임을 제시하는 듯하다. ● 양하와 김민조의 회화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바라본 개인과 그가 속한 세계를 재현함으로써 '내가 있는 세계'를 보여준다. 여기서 비춰진 세계는 평화와 폭력, 풍요와 빈곤이 혼재하는 모순적 세계이다. 때로 개인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사회의 기준이나 문화 풍조, 혹은 내면의 불안 등은 억압의 요소가 되어 등장한다. 세계 속 개인의 정립은 끊임없는 공존 가능성을 맞춰가며 지속되는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기이한 존재들이 이루는 환상적이거나 끔찍한 장면의 연출은 강철규 작업에서 공통으로 전달되는 인상이다. 작가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감정과 품고 있던 상념들은 독창적인 조형으로 형상화되어 판타지 소설이나 신화 속 장면과 같이 구현된다. 그렇기에 작가의 작업은 자전적 성격을 함유하고 있는데, 특별한 사건이나 기억에 관한 묘사가 아닌 삶 전체를 범주로 아우르기에 일종의 단계적 서사로 읽혀진다. 이 단계는 직면-극복-다가올 것에 관한 불안을 반복하며 '삶을 살아내는 것'에 관한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불면증, 과거로부터의 단절 의지, 욕망의 충동과 억제 등의 내적 상태는 자연으로의 도피, 벌목과 사냥, 도축과 제의적 장면 등으로 예시된다. 작품에서 보여지는 은유적인 도상들과 상징적 행위는 무의식과 같이 심연에 깔려 있던 마음의 증상과 징후를 암시하듯 펼쳐낸다. 「가면 Mask」 속 거센 폭풍의 위력은 얼굴 가죽을 벗겨낼 듯 매섭다. 금방이라도 자아의 또 다른 이면을 폭로할 것 같은 바람은 내면에 자리한 강력한 욕망을 지시한다. 작가의 화면 전반에 흐르는 불가해, 혹은 불확실성의 분위기는 이끌림, 끌어당김 등의 동적 요소와 기저에 깔린 불안정함을 동반하며 유지된다. 「운디네 Undine」의 매혹적인 정령은 죽음과 함께하며, 「아고니스트 Agonist」의 근원에는 이롭게 함과 자기 파멸적 속성이 공존하기에, 그것이 무엇으로 발현될지 알 수 없다. 「이면화 diptyque」는 혼란스러운 마음의 양상을 지시적 서사로 재현한다. 야수와의 싸움에서 보여지는 투지, 거친 풀을 헤쳐가는 진취적인 저항은 어리석은 방랑자의 무력함, 위협 앞에 엎드려진 체념적 마음과 함께 존재한다. 하늘을 정찰하듯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악마적 형상은 어느새 마음에 불안이라는 폭풍을 일으킨 듯하다. 작가의 이야기는 어디로 흘러갈지에 관한 궁금증을 자아내며, 수많은 삶의 갈래와 감정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가 제시하는 상징, 비유, 알레고리는 직관적 인상과 해석의 광범위한 자유도를 동시에 제공함으로써 폭넓은 공감과 해석의 영역을 창출하며, 우리를 끌어들인다. ● 이들은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며, 왜 이곳에 있는가? 윤미류의 작업은 '거대한 등장'으로 시작한다. 등신대, 때로는 그보다 더 큰 인물은 거인처럼 우리 앞에 존재해 있다. 흐트러진 머리칼과 햇살이 느껴지는 피부의 명암, 몸의 행위에 따라 형성되는 굴곡이 확연한 옷의 표면 등 윤미류가 그려내는 대상의 외형은 마치 슬로우 모션에 담긴 카메라의 시선처럼 밀도 높은 질감을 동반하며, 강렬하고 직접적인 감각으로 우리를 압도한다. 더욱이 작가는 같은 대상의 작업을 2점 이상의 장면으로 제작하여 연출하는데, 이때 인물의 행위나 몸짓이 연속적으로 포착되기에,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각에서 발생했을 법한 맥락의 상상을 유도한다. 그리하여 작가의 작업은 특별한 서사의 일부분이 노출된 듯한 인상과 함께 수수께끼와 같이 주어지며 신비로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자극한다. 분명 작가의 작업은 실재했던 순간이다. 「Snowstorm Ⅰ」과 「Snowstorm Ⅱ」에 심드렁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는 인물은, 작품에서 보이는 그대로 눈이 내리고 있던 제주의 어느 장소에 서 있었고, 「I Think I Got Out, Dear 1」, 「I Think I Got Out, Dear 2」의 물에 젖은 몸과 가죽 자켓 또한 그곳에 존재했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카메라를 활용하여, 특정한 상황이나 장면을 연출하는 감독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대상이 작품이 될 때, 인물의 사적인 서사는 지워지고 인상만이 남아 각인된다. 사실주의적 실재성과 완전한 허구적 서사성의 공존은 감각과 인지 사이의 지속적인 상상력을 요구하며 독특한 즐거움을 유발한다. 작가의 작업은 서사를 기다리며 존재하고 있다. 이 서사는 작품을 마주한 사람들의 수만큼 생성될 것이며, 공포, 스릴러, 미스터리 등 이야기의 변주는 끝이 없게 뻗어갈 것이다. 이곳에서 생성된 서사는 불확실한 경로로 나의 내면을 마주하게 되거나, 나와 우리의 이야기, 또는 우리가 속한 사회와 커뮤니티의 담론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 윤미류와 강철규의 회화는 자신을 지우거나, 은폐함으로써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의 세계를 구축한다. 강철규의 이야기는 내면에서 충돌하고 혼재하는 마음의 양상에 관한 '내면의 세계'를 지시하지만, 상징과 알레고리를 통한 우회적 접근은 이해와 공감의 폭을 확장한다. 작가의 세계에서 우리는 내면의 자아를 어떻게 마주할 수 있는지 상상한다. 반면 사실적 대상의 허구적 서사를 유발하는 윤미류의 작품은 '내가 필요 없는 세계'이다. 이곳에서 작가는 감독으로서 이야기를 구성하고 감각적 연출로 전달한다. 작가의 이야기는 독립적인 서사의 생성을 유발한다.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가 개인, 혹은 사회의 어느 지점에서 마주할지 기대하며 존재한다.
어딘지 익숙한 장면에서 친근한 감정이 솟아오른다. 손민석의 작품은 도시의 길거리나 공공장소, 친구들과 같은 주변인을 대상으로 하기에, 매일 마주하는 것들, 미디어의 한 장면이나 SNS에서 본 듯한 친숙함을 전달한다. 작가는 익숙하고 평범한 대상을 소재로 보편적이지 않은 감각을 전달하고자 하는데, 이와 같은 시도는 의식으로 들어온 대상을 현상적으로 탐구함으로써 시작된다. 작가는 멈춰 있는 대상일지라도 그것이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으며, 다른 대상(타자)과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한다. 작가의 흥미로운 시선은 대상을 이루는 외곽을 부드럽게 흩트려가며, 대상의 주변에 존재하는 인물, 사물의 경계로 이어가고, 이윽고 시공간 전체를 감싸 안으며 부드러운 형상으로 구현된다. 그리하여 작가가 재현하는 장면은 마치 보이지 않던 매질(transmission medium)이 드러난 듯 표현되며, 그곳에 흐르던 시간의 지속으로 다가오거나, 당시 상황의 분위기와 같은 느낌을 전달한다. 「쓰다」, 「수조」 속 인물은 나이, 직업 등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닌 바로 그곳에서 작가의 의식에 맺힌 현상 자체로 파악된다. 그렇기에 이들은 마치 하나의 풍경처럼 인상 지워진다. 「분홍을 위한 춤」의 무심히 놓인 사탕과 종이학은 마주한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며 마치 춤을 추듯 존재하고 있으며, 「케잌 멀리서 첨벙이며 자르기」, 「케잌 휘날리며 자르기」 화면의 모든 부분은 즐거운 분위기로 빈틈없이 가득 차 있다. 지워진 얼굴에서 구체적인 표정들이 식별되지 않음에도, 서로 간 연결된 듯한 느낌은 마치 소리의 파장처럼, 당시의 흥겨움이 전달되는 듯하다. 「계시」에서 우리는 도넛을 향해 비장하게 전진하는 꼬마의 열정을 느낀다. 작가의 관심사는 대상의 '있음' 자체에서, 존재와 존재가 어떤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에 관한 사유로 나아간다. 이를 통해 존재를 이루는 관계성을 향한 새로운 시선을 제안한다. ●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가 있다. 허찬미는 실제로 오가는 길이나, 거리에서 발견한 대상을 작품으로 가져온다. 작가는 일기를 쓰듯 자연스럽게 기억에 남아있거나 기록하고 싶은 시선을 작업으로 재현한다. 「Between ground and wall」, 「골목과 화분」, 「땅과 벽 사이」에서 보이듯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는 도시의 풍경과 골목길 사이사이 흔히 발견되는 방치된 화분들은 말라버린 식물과 함께 익숙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작가는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대상을 기록하고 있는데, 틈이 난 담벼락의 밑부분이나, 메마른 바닥에서 솟아오른 잡초를 바라보게 하며, 자연스럽게 우리의 시선을 아래로 향하게 한다. 작가의 작품에는 붓이 거칠게 지나간 자리나, 흐르는 물감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로 인해 거칠게 부서지는 대상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대변하듯 마르고 버석거리는 형상으로 존재한다. 겹겹이 쌓인 마른 가지와 천 등은 오랜 시간이 흘러 잊힌 대상의 존재 상태를 감각하게 한다. 반면 동일한 작가의 표현은 「Moving Water」에서 흩어지는 물줄기와 식물이 하나가 된 듯 표현되어 경쾌하고 신선한 장면으로 다가오며, 「서 있는 것」 장면 속 지나가는 인물의 어그러진, 혹은 지워진 얼굴과 몸은 매일 스쳐가는 익명의 수많은 사람들을 향한 현대의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의 시선이 깃든 파편적 화면은 대상의 존재상태를 깨우며 각기 다른 감각과 느낌을 전달한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무뎌지는 감각은 시선과 공감의 폭을 좁혀간다. 작가는 때로 같은 장면을 여러 크기로 재현하는데, 거대한 크기의 작업은 일상에서 외면당하고 기억에서 지워져 온 대상을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확대하여 우리 눈 앞에 선명히 제시한다. 그리하여 작가는 보잘 것 없는 대상에서조차 발견 가능한 감각을 제안하고 이를 통해 존재 상태를 사유하는 시선을 이끌어낸다. 이 성실한 관찰자이자 기록자의 작품은 건네지는 대화처럼 자리한다. ● 손민석과 허찬미는 발견 가능한 '이면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들이 제안하는 관조의 시선은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가고 쉽게 대체되는 현대 사회의 속도와 대척점에 있다. 손민석은 측정이나 분류, 또는 객관적 사실로 대상을 파악하거나 이해하는 방법이 아닌, 대상이 그곳에 존재했다는 의미에 관한 새로운 시선을 제공한다. 허찬미는 익숙한 일상에서 무심코 지워버린 존재들을 감각적으로 마주하게 함으로써 시각적 언어로써 회화의 역할을 보여준다. 이들의 세계는 반복되는 일상이나 습관화되어 가는 인간관계에서 잊힌 대상이나 존재가치를 새로운 시선의 방법론을 통해 일깨운다. ■ 김민경
[1] 지그문트 프로이트(Sigismund Freud, 1856-1939) [2]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비극의 탄생』(1872)
Vol.20250308a | 나는 웃으며 잠에서 깼다 I woke up laughing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