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연 인스타그램_@over_exit 전보배 인스타그램_@jeonbobae__ 정재인 인스타그램_@janiomi 진지현 인스타그램_@jin___ji
초대일시 / 2025_0307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02:00pm~07:00pm / 월,화요일 휴관
갤러리인 HQ GALLERY IN HQ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 97 (연희동 719-10번지) 1층, B1 Tel. +82.(0)10.9017.2016 @_innsinn_
'방카르'는 몽골 유목민과 함께 생활하는 반려견을 부르는 말이다. 전생의 업보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 개의 생을 거쳐야 한다고 믿는 그들은 방카르가 죽으면 꼬리를 잘라 머리맡에 두고 함께 묻는다. 다음 생은 부디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다. 제 기능을 잃어버린 지 오래지만, 인간의 몸에는 아직 꼬리의 흔적이 남아있다. 닳고 닳은 꼬리뼈,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뼛조각 안에 기억하지 못하는 머나먼 과거가, 혹은 전생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꼬리뼈는 불완전하게나마 우리를 두 세계에 동시에 속하게 하는 다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일부이면서 현실과 도무지 일치하지 않는, 누락된 것들을 잠시간 복원하고 시간의 편린을 다시 짜맞추기 위한 다리. ● 『개 꼬리 무덤』은 존재하는 시공간의 모순을 끌어안으며 머리와 꼬리, 혹은 전생과 현생의 간격만큼 붙어/떨어져 있는 두 세계를 기꺼이 횡단한다. 전시에 참여하는 김서연, 정재인, 전보배, 진지현은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 언어를 능가하는 이미지를 위치시키거나 비교적 단단하고 가시적인 사물로 일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순간을 구현한다. 이는 허구 없이 회복시킬 수 없는 것들을 회복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여기서 미술은 스스로 허구적인 실천이 되어 실재 속으로 녹아든다.
김서연은 사랑과 슬픔, 절망과 희망, 찰나와 영원 같은 양립되는 상태나 감정을 하나의 화면 안에 겹쳐 본다. 그는 개별적 대상과 공간을 접붙여 만든 가상의 풍경이 아니라, 현실의 한 부분을 확장해 바라보고 그에 깃든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는 도구로서 작업을 대한다. 「Mama, Grandma's baby Girl」(2025), 「메라키메라」(2023)에서처럼 작업에서 종종 등장하곤 하는 종교적 도상은 범접할 수 없는 초월적인 신성성 대신 삶 속에 잔존하는 순수함이나, 상대에게서 나에게로, 혹은 그 반대로 전해지는 무해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상징한다. 삶이 있기에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한편, 같은 이유로 언젠가는 이들을 떠나보내야만 한다. 유한한 시간의 굴레에 저항하며, 때로는 순응하며, 작가는 화면 내부에서 시간을 새롭게 구조화한다. 그에게 그리기란 쓰는 행위와도 같아서, 물감을 쌓고 문지르고 벗겨내는 모든 과정은 그 자체로 비동질적인 서사의 직조로 이어진다. 지난한 쓰기가 종료된 후 눈앞에는 하나의 이미지가 남는다. 이는 눈에 잘 띄지 않을 뿐 현실과 늘 공존해 온, 시적 차원이라 부를만한 것이다.
전보배는 존재와 부재를 재배치하고, 궁극적으로는 부재의 증명을 매만지는 일로부터 매체의 잠재성을 발견한다. 부재는 무언가 이미 사라지고 없는 상태를 일컫기도 하지만 아직 어떤 것이 도래하지 않고 있음을 지시하기도 한다. 이는 작가에게 주어진 여러 매체 가운데서도 주요한 지위를 점하는 조각에 관한 정의를 상기시키는데, 그에 따르면 조각이란 일상의 사물 안에 선험적으로 내재한, 그러나 필연적이지는 않은 가능성으로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이 조각으로 이행되는 과정은 특별한 환영이나 가상이 아닌, 그것이 점유하는 현재를 배경 삼아 이루어진다. 한편 전보배의 조각은 부재하는 대상을 직접 가시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통해 대신 보여준다는 점에서 허구이며, 이로 인해 현실과의 완벽한 등가물일 수 없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사물의 시간과 허구, 달리 말해 미술의 시간은 이를 조건으로 삼아 형성되는 상황 속에서 일시적으로 교차한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시간의 교차가 발생하는 순간 상황은 종결되며, 이것이 전보배의 조각에서 명백함 다음 의문이, 이해 다음 몰이해가 뒤따르게 되는 이유일 테다.
정재인은 한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의 전환이 발생하는 결정적 순간을 길게 늘어뜨린 회화로 세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의심하게 만든다. 아침과 밤 가운데 새벽이, 파괴와 존립 가운데 허물어짐이, 소유와 포기 가운데 무언의 다툼이 있는 것처럼, 그는 불연속적으로 보이는 두 항 사이를 매개하는 제3의 항, 혹은 이들이 중첩된 상태에 관심을 보인다. 공백처럼 보이는 구간을 실은 명멸하는 존재들과 희미한 정동이 채우고 있다는 사실은 세계가 샅샅이 밝혀지고 난 다음에도 진실에 대한 탐색이 지속되어야 하는 당위를 제공한다. 다만 정재인의 회화는 진실 자체보다 진실을 찾게 만드는 힘, 즉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우리를 계속 이동시키고 배회하게 만드는 동인을 따라간다. 사람의 얼굴을 한 사물, 하늘에 나 있는 구멍 등 작업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회화적 모티프들은 공백을 채운 힘의 정체를 폭로하기보다 불확실한 상태로 유지시킨다.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발명된 의미론적 언어와 달리 이러한 이미지-언어는 상이한 두 미완성 서사의 교집합, 시간을 두고 바라볼 필요가 있는 공백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 의무를 다한다.
진지현은 현실의 풍파와 이상향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를 딛고자 그림에 골몰한다. 삶은 직선으로 흘러가는 듯 보여도 늘 믿음과 배신, 농담과 냉소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진동하기에, 작가는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일들에 애쓰기보다 그림 안에서 생성되는 삶의 감각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가 자신의 작업을 "냉엄한 현실의 도피처"라고 말하게 되기까지 가로질렀던 시간과 장소의 부피를 가늠해 본다면, 자연스럽고 평온해 보이는 화면 속 배치와 구성이 결코 마땅히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선이 누적되어 면이 되기까지 종이 위에 갈필을 여러 번 덧대고, 그 위에 먹을 올려 마무리하는 과정은 새, 나무, 구름, 별 등 화면 안에 유기적으로 존재하는 대상들을 마냥 편안하고 부드럽게만 형상화하지 않는다. 붓과의 마찰로 인해 발생한 종이의 요철과 갈라진 붓끝이 유발하는 거친 질감은 작가의 그리기가 현실로부터 손쉽게 분리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와 대항하기 위한 행위라는 인상을 남긴다. 꽃으로 구름을 뚫듯, 그는 자신이 포기할 수 없는 가장 무르고 둥근, 그러나 절대 약하지만은 않은 가치들을 화면 이곳저곳에 퍼뜨려놓고 있는 것이다. ● 땅에 묻혔던 개가 인간으로 환생할 가능성을, 우리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누군가 이를 믿는다면 그는 무모하거나 유연하지 못한 사람 정도로 취급되곤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시차를 지금 여기의 속도와 문법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물어볼 필요 없이 명확하므로, 『개 꼬리 무덤』의 작가들은 비약이라는 오해를 무릅쓰고 이러한 차이를 끌어안는다. 여러 좌표를 겹쳐 지도를 우회하고, 시간의 파고를 따라 유동하거나 그마저도 저버린다. 이는 분리를 길들이지 않고 늘 시대착오, 파열, 불가능성의 모습으로, 또는 이들을 수반하며 행해져 온 미술의 궤적과 일치한다. ● 그러나 낙차가 순환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면, 그래서 동시에 마주할 수는 없어도 그 그림자를 따라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적어도 만남에 완전히 실패하고 있지만은 않은 것이다. ● 그리고 이 어긋남을 명령삼아 작동하는 불가능한 세계가 있다. 그러므로 가능해지는. ■ 임현영
Vol.20250307c | 개 꼬리 무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