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셔 Polisher

함성주展 / HAMSUNGJU / 咸成周 / painting   2025_0213 ▶ 2025_0405 / 일,월요일 휴관

함성주_GIANNI VERSACE FALLL 03_캔버스에 유채_145×112cm_2025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함성주 인스타그램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25_0213_목요일_05:00pm

주최 / 라흰갤러리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라흰갤러리 LAHEEN GALLERY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50길 38-7 Tel. +82.(0)2.534.2033 laheengallery.com @laheen_gallery

# 이미지 저편의 추동 ● 작가 함성주는 그 자신을 일컬어 '이미지를 보는 필터'라 칭한다. 그의 말마따나 화가의 눈은 대상의 이미지를 발생시키고, 필터와 같은 화가의 '보는 작용'을 통해야만 비로소 이미지는 출발하고 발화된다. 함성주의 망막을 거쳐 그와 동등하게 마주서는 이미지들은 특별히 시집의 텍스트와 영상, 그가 개인적으로 모아두었던 사진들로, 이는 그의 그림에서 조형 언어의 기점을 형성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함성주에게 회화란 취향의 극에 자리한 조형 언어를 신체를 매개로 드러낼 수 있는 매체인 셈이다. 그러나 현실과 이야기가, 삶의 의미들이 스케치되는 이미지를 얻기 위한 고투는 지난하다. 화가는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피부로 감각하면서, 마치 이미지에 함락되듯이 그것에 섞여 들어가고 다가가야 하는 까닭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이미지를 어떻게 고를 것인가'의 문제는 함성주의 여섯 번째 개인전인 『Polisher』에서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키워드로 (새삼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함성주_Lizzie_캔버스에 유채_145×112cm_2025

함성주는 이와 같은 문제에 보다 구체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동시에 그의 그림의 정처가 될 이미지에 닿기 위해 '추동'을 관조한다. 이를테면 작가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사진 앨범을 보면서 그려야 할 대상들을 정리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 그는 '그리고자 하는 추동'의 자장 위로 형성되는 이미지들을 선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선택된 이미지들을 캔버스에 옮기기를 거듭하다 보면,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가 한자리에 모인 그림들로부터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번 전시에서 함성주는 기억과 시간, 깊이와 거리, 빛과 색 그리고 그림과 나 사이의 경계 등 다양한 이야기를 시도하지만,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의 부분에 밑줄을 그을 필요가 있겠다. "사랑해서 까맣게 탄 마음." 작가에 의하면 『Polisher』는 (박연준 시인의 구절에서 찾을 수 있는) 이 문장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는데, 그러한 근거는 심신을 불살라 (그림을) 사랑한 긴 시간과 사랑으로 몰두한 나머지 타버린 마음, 연소된 마음처럼 검게 그을린 그림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함성주_Moving_캔버스에 유채_26×18cm_2024
함성주_Moving_캔버스에 유채_46×38cm_2024-2025

# 사랑해서 까맣게 탄 마음 ● 함성주는 2022년을 기점으로 붓질을 그림의 전면에 드러내면서 내러티브를 차츰 덜어냈으며, 이러한 형식적인 실험은 (의미를 수반하는) 색을 제거함으로써 모노톤의 검은 화면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구사한 것은 푸른색과 갈색을 조색한 어두운 톤을 화폭에 거듭 바르고 문지르는 '마찰 (polishing)'의 방법론이었다. 그는 그림을 닦는 방식으로 작업하는데, 검정색을 그대로 사용하면 닦임 색이 갈색조가 되어 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는 한 번에 물감을 서너 통 채울 만큼 조색의 단계를 여러 번 거친 다음, 그렇게 완성된 색으로 캔버스를 염색하듯 바르고 닦아내기를 되풀이한다. 그리고 초벌을 그리기에 적합한 표면이 마련되면 작가는 붓질의 길이 잘 나타나지 않는 선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경과 끝에 그의 붓들은 밀리고 쓸리는 수차례의 마찰 끝에 가운데만 뾰족하게 남은 모습으로 모가 낡고 닳아버린다. 또한 캔버스를 여일하게 닦아내다 보면 분광 (分光)의 효과가 경계면에 나타나는데, 작가는 이처럼 물감의 깊이를 부여하고 빛을 찾는 마찰을 통해 그림을 발굴하는 듯한, 조각적인 그리기 방식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스스로를 연마하여 화면에 장막 같은 먹빛을 드리우면서도 간헐적인 빛을 파헤치는, 마찰의 움직임을 내내 견인하는 '주체로서의 Polisher'이다. 닦고 문지르며 닳아 종내 타버리고 마는 이 'Polisher'는 마찰로 인해 타면서 깎이는 붓과 그림을 은유하지만, 이는 동시에 함성주의 팔과 어깨와 그 자신에 대한 메타포로도 볼 수 있다.

함성주_On night flight_캔버스에 유채_46×38cm_2024

한편 함성주가 마찰의 행위를 항상적으로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상술하였듯 자신을 온전히 내어줄 줄 아는 '사랑'이 그의 작업의 근저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작가의 이번 개인전이 지니는 가치는 사랑을 위한 그의 소질에 좌우된다고 하여도 무리가 아니다. 그리고 함성주는 다름 아닌 마찰과 반복을 매개로 사랑의 승화에 도달하는데, 그러한 점에서 'loving (사랑하다)'과 'rubbing (문지르다)'의 한국어 발음이 같다는 사실은 제법 흥미롭게 다가온다. 더불어 본 전시에서 우리는 마치 상대의 시간 속에 들어가고 싶다는 듯이 하나의 대상을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고, 그것을 수십 번 거듭해서 그리는 창작자의 고된 시간성으로부터 대상을 향한 작가의 원융한 사랑을 가늠해보게 된다. 같은 장면을 여러 번 그려내는 함성주의 이러한 작업 방식은 갖은 미사여구와 동시대적 담론에서 멀어진, 회화 자체를 조감해보려는 시도이다. 작업에 소요되는 물리적인 시간뿐만 아니라,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정돈된 마음'을 유지하려는 고단한 나날의 궤적이 화면에 고스란히 담길 때 회화가 지닌 가치는 가장 빛을 발하는 까닭이다.

함성주_Polisher_캔버스에 유채_73×61cm_2024

전술하였듯 함성주는 마찰과 연마로 구현되는 사랑을 하나의 대상을 여러 번 그려내는 반복과 시간성으로 시각화하는데, 이 단계를 진행하다 보면 대략 서른 번째에 완성된 작업을 기점으로 그림의 상태와 그리기의 태도가 변한다. 예컨대 같은 것을 몇 번이고 그리다 보면 처음의 서른 점까지는 재현에 초점을 두고 이미지를 보다가, 이후로는 붓질이나 대상이 주는 인상을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사랑해서 타버리는 마음'으로 그림을 대할 때에는 마침내 어떤 수맥을 만나듯, 대상의 정수 (essence)와 심연을 부여잡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고착되지 않은, 그림이 자체로서 지닌 본래의 파동을 감지한다. 이렇게 심연 속으로 자맥질하는, '있다'를 통해 배열될 수 없는 회화의 본질은 추상적인 감각으로 기울어진다. 그림을 위해 선택되는 이미지들도 마치 솜처럼 둥글고 형태가 불분명해서 현현하듯 나타나는 것이나, 직접적이기보다는 사유를 둥그스름하게 만드는, 감각의 형태만 은유할 수 있는 것들로 자연스럽게 추려졌음은 물론이다. 함성주는 23년도에 개최했던 개인전 『Rigger』에서 이미 그와 같은 방식으로 전시의 주제를 전달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Polisher』에서 그는 특별히 자신과 연관된 대상들을 성찰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화면 안으로 들여놓음으로써, 이전까지는 그의 작업이 다소 거리를 두었던 서정성과 내부적인 깊이를 모색하고자 한다.

함성주_The Memories Between 01_캔버스에 유채_73×61cm_2024
함성주_The Memories Between 21_캔버스에 유채_73×61cm_2024

# 서정의 거처 ●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근래에 들어 함성주는 창작 활동이 스스로와 긴밀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씩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그는 중간 중간 그림과 의도적으로 멀어지는 순간을 만들고 그림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조절하고자 노력하지만, 이상과 같은 작가의 고백이 웅변하듯, 본 전시에는 작가와 밀접한 개인적인 이미지들이 작업을 비집고 들어서며 그의 존재감을 환기하고 있다. 또한 작가는 자신의 내면에서 번들거리는 파편들이 이미지 안에 처소를 마련하여 그와의 연결성을 많이 품을수록, 풍부한 서정성이 그만큼 그림에 실존하게 되는 현상을 인식했다.

함성주_The Memories Between 26_캔버스에 유채_73×61cm_2024
함성주_The Memories Between 32_캔버스에 유채_34×24cm_2024

본 전시를 위해 함성주가 연거푸 그려낸 '블라우스'는 대표적인 예이다. 가령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해보려는 마음으로 선택한 이 이미지를 다루면서, 작가는 지상의 모든 '있다'를 본다는 것과 내면의 발견이라는 문제를 자문하기 시작했다. 작가의 눈이 대상과의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기를 시도했음에도 그것을 더 이상 객관화하거나 이상화하기 어려운 지점에 이르게 되면, 그때부터 그의 시선은 이미지를 따라가기보다는 그림 자체에 집중함으로써 공기 중에 부유하는 이미지의 '인상'에 열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상을 반복해서 그리는 작업 절차에 따라, 작가의 관점도 무수한 곡면이 숨 쉬고 있는 내면으로 점차 향했던 것이다. 내면은 감정이 실존할 수 있는 조건이자 서정의 거처로, 외부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은 기실 내면의 발견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함성주는 이와 같은 내면에 의한 이미지의 성립을 통해 그림이, 그림에 그려진 대상이 이를테면 검은 불과 같은 이미지, 느슨하거나 단단한 이미지 또는 어떤 추억의 형태가 그려진 인상이 되어 다시금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함성주_The ways of hearing_캔버스에 유채_46×34cm_2025
함성주_The ways of seeing_캔버스에 유채_46×34cm_2025

말하자면 함성주는 게임과 스크린, 그림의 장면성, 그림과 그것의 뼈대 등을 탐구했던 이전의 전시들을 계기로 이미지를 보는 시야를 차차 확장하다가, 이번 개인전을 통해 서정성과 (그림 및 자신의) 내부적인 깊이로 돌아와 그림 자체를 탐색한다고 하겠다. 그의 근작을 접한 관객들이 (이러한 작가의 태도에 조응하듯) 그림으로부터 창작자의 내밀한 생각을 읽어내기 시작했다는 함성주의 언급은 과연 수긍이 가는 부분인 한편, 내면과 그림의 깊이, 그리고 서정성이 회화의 긴요한 이유가 된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표출한다. 또한 그는 이전보다 오일의 양을 줄임으로써 끈적이는 물감을 조각적으로 운용하는데, 물감이 튀어나온 어두운 부분과 물감을 적게 바른 밝은 부분이 조우하면서 전반적으로 오목한 표면을 이루는 효과도 이상과 같은 심적이고 서정적인 깊이감을 압축해서 전달하는 요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깊이감이 그림을 통하여 보는 이의 세계까지 편입되는 데에는 상기의 내용에서 지속적으로 역설했던, 시간과 함께 누적된 사랑 그리고 사랑을 시공 속에 물질화하는 반복과 마찰의 형식이 다른 무엇보다도 작업에 크게 기여한다고 하겠다. 강조했다시피 함성주가 작업으로 전하고자 하는 사랑은 반복과 마찰을 동반하고, 그의 그림은 바로 그러한 반복과 마찰의 형식으로 완성되므로, 작가의 작업에서는 내용과 형식이 씨실과 날실처럼 동행하고 연대하는 셈이다. 추동과 이미지적 취향, 조형 언어와 자체로서의 그림, 내면과 서정이 여러 방향에서 촘촘히 읽히는 함성주의 그림은 이처럼 사랑해서 타버린 마음에서 비롯하여 돌고 돌아 다시 그곳에 도달하면서, 그림이 지닐 수 있는 넓이와 깊이를 체감케 하고 있다. ■ 조은영

Vol.20250213c | 함성주展 / HAMSUNGJU / 咸成周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