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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김동현_김치형_김현우_배경욱 신동빈_정종필_정진호_최유리_한영현
주최,주관 / 밝은방 후원 /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협력 / 탈영역우정국 지원 / 신세계디에프
관람시간 / 01:00pm~07:00pm
탈영역우정국 POST TERRITORY UJEONGGUK 서울 마포구 독막로20길 42 (구 창전동 우체국) Tel. +82.(0)2.336.8553 www.ujeongguk.com www.facebook.com/ujeongguk @ujeongguk
암호를 선물하는 열쇠 ● "성공의 열쇠" "해결의 열쇠" 등 열쇠가 들어가는 일상적 표현을 곱씹는다. 열쇠의 속뜻은 곤란한 상황을 타개할 한 방으로 대부분 풀이된다. 반면 암호는 그 자체론 결정적 해결책이 아니다. 암호가 제대로 들어맞는가를 두고 해독 단계가 요구된다. 미술을 열쇠와 암호에 빗대어 논해보면 어떨까. 미술이 인생과 행복의 문제를 간단히 풀 열쇠라고 확언하는 메시지나 메신저는 왠지 미심쩍다. 이 사회가 남발하는 행복의 표준적인 상像과 약속이 든 금고를 여는 전개완 동떨어지지만, 삶과 미술을 대하는 태도를 암호를 푸는 복잡다단한 과정으로 여기곤, 그 과정에서 비롯된 예상 밖 지점을 금고라 인식하는 사람에겐 신뢰가 쌓인다. 내겐 이 전시에 함께한 장애인 예술 작업자1), 이들의 삶과 작업에 동행 중인 부모, 작업 지원과 전시 기획을 맡아온 '밝은방' 팀이 그러하다. 전시를 위해 협력한 세 주체는 전시 제목을 빌려 말하는 듯하다. 미술을 만나면서, 당면한 삶 속 문제를 바로 해결할 열쇠를 얻은 양 굴지 않는다고. 눈앞에 보이는 열쇠를 주웠을 뿐이라고. 주운 열쇠가 무엇을 위한 장치인지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고. 앞으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나,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비관도 낙관도 섣불리 점치지 않는다고. 주운 열쇠를 가끔 쳐다보고선 작업에 몰입할 뿐이라고. 그러한 지경에 놓이다 보면 희망의 실체를 찾았다는 확신에 머물지 않게 된다고. 때론 그 상태가 희망이 아닐까 조심스레 속삭이게 된다고. ● 덕분에 나는 끄적인다. 미술이란, 암호가 동반된 열쇠다. 풀어야 할 암호까지 들어 있는 열쇠라. 평소 같았으면 난해한 상황을 정리하는 열쇠를 바로 주지 하고 투덜대며, 성가신 부산물로 여길지도. 한데 암호가 동반된 열쇠 같은 미술이 선물로 인식될 때가 있다. 해당 전시를 생각해본다. 창작하는 이의 입장에서 암호가 동반된 열쇠 같은 미술은 어떨까. 창작자와 그의 가족에게 '미술을 하는 장애인적인' 또는 '발달장애 예술가다운'이란 상을 쉬이 덧입히고, 고된 삶을 극복하는 영웅적인 서사를 덧댄 키워드를 제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마냥 휩쓸리지 않을 환경이 조성된다. 그리하여 전시를 수놓은 9인의 창작 활동은, '장애를 지닌 예술가다움' 여부를 측정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패스워드'다. 보는 이의 입장에서 암호가 동반된 열쇠 같은 미술은 어떨까. 감상자인 본인의 눈과 마음에 저장되어 있던 '장애인 작가다운 솜씨다'라는 시선에서 동떨어져,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바를 성찰하는 값진 수고와 보람을 만나는 장이 열린다. ● 『열쇠를 주웠다, 먼 희망을 얻었다』는 두 입장이 교류하는 전시다. 당신이 발 디딘 전시장은 성숙한 작업의 발견이라는 관점 아래, 장애인 예술 작업자의 작업물에 시혜를 내리듯이 소비하는 시선을 경계하는 곳이다. 미술계에서 인정받을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응원의 외양을 띤 채, 장애인 예술 작업자의 창작물을 귀여운 습작으로 치부하는 시도와 거리를 두는 곳이다. 전시가 열리는 탈영역 우정국은 9인의 작업이 이뤄지는 밝은방 스튜디오의 성격과 혼재된다. 전시장도 스튜디오도 아닌 규정 불가능성의 지대가 탄생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미술을 둘러싸고 완성과 미완성, 성숙과 미숙이라는 판정 구간을 오가며 누적된 불안을 돌아보게 될지도. 미술에 관한 사고 및 실천을 두고 타인과 주고받은 언어나 정서를 상처로 기억한 채, 거기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신을 마주하게 될지도. 그리하여 좀 다른 지점을 향해 타인과 대화하고픈 갈망을 품을지도. 그런 끝에 전시를 수놓은 작업자들의 흔적에 빨려 들어가며, 헛된 공상이자 망상으로 치부한 '나'의 상상의 조각들을 존중하는 계기를 맞을지도. 이쯤 하여 내 상태를 고백해야겠다. 암호가 동반된 열쇠가 놓인 작업으로 인해, 9인의 작업자에게 요술램프를 문지르는 행위처럼 패스워드의 일종인 패스 액션pass action의 몸짓이 있다면 무얼까 상상했더랬다. 관객과 교감하고자 작업물에 "열려라 참깨!" 같은 암어暗語를 심진 않았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됐다.2) 이 글은 그 과정에서 느낀 기대치 않은 감응을 기록한 노트다.
전시작으로 들어가본다. 한영현의 편지에서 일상을 맛보는 기쁨, 타인을 향한 사랑과 감사가 담긴 문장을 재차 읽었다. 글을 읽을수록 종이의 질감을 통해 도드라진 글씨의 떨림이 보였다. 특히 오돌토돌한 편지지에, 펜에서 나오는 검정 잉크가 묻어나는 순간 형성되었을 글씨의 미세한 떨림이, 눈과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감정을 표현하는 작업자의 몸짓과 마음씨에 관한 상상이 발동되더라. 인간의 손바닥에서 새끼손가락 쪽과 연결된 통통한 부분을 소지구小指球 혹은 '새끼 두덩'이라 부른다. 가리킬 지指에 아름다운 옥 구球를 쓴다. 관련지어 그의 작업을 들여다보면서, 감정 표현에 묻어나는 떨림과 그 진심은 마음을 먹는다는 측면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편지지라는 사물의 질감, 펜을 쥔 손가락의 소지구가 종이에 닿을 때 생기는 감촉, 종이 재질과 글씨를 써내려갈 때 발생하는 호흡에서 영향을 받아 나타나는 곡선의 글자 선까지, 세 요소가 빚어낸 미적인 산물로 다가왔다.
한영현의 작업에선 편지지의 재질, 손짓의 조합으로 이뤄진 고운 마음씨와 감정 표현에 묻어난 진동이, 감정을 확연히 드러내는 기호에 수줍게 숨어 있었다면, 신동빈은 아파트에 관한 기호를 분명히 파악할 수 없게 숨기려 드는 그림을 통해, 아파트에서 산다는 것의 정서를 적극적으로 생각도록 해 흥미로웠다. 그는 아파트 호수를 연필로 겹쳐 그리길 반복하거나, 오일 바나 오일 크레용으로 아파트 단지를 유추케 하는 네모를 겹쳐 그려왔다. 그러한 동작을 통해 아파트 하면 떠오르는 숫자와 도형을 일그러뜨린다. 숫자와 도형의 형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선들이 겹치고, 요동치는 선들이 강조되는 회화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생각의 층위가 쌓였다. 요약한즉슨 요동치는 곡선들이 아파트란 커뮤니티에서 연일 빗발치는 주민끼리의 예민한 충돌이나 긴장감으로 다가왔다. 갈등이 심화할수록 염원하게 되는 평화로움을 불러올 회오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울러 강렬한 곡선들의 겹침은, 아파트 안에서 경제적·문화적으로 상이한 계층의 공존을 목표 삼았으나, 오히려 계층 간 장벽을 쌓고 있는 '소셜 믹스'라는 정책이 맞닥뜨린 현실을 돌아보게끔 했다. 이와 맞물려 각기 다른 존재의 혼융을 꿈꾸는 대안적 공간을 제시하는 듯했다.
신동빈이 외관적으로 위태로워 보이는 아파트를 그려내며, 건물을 둘러싼 안전 불감증에 아랑곳하지 않는 상상력의 도약을 이끈다면, 김현우의 목탄 회화는 드로잉에 관한 존 버거의 사유를 연상케 했다. 존 버거는 말한다. 드로잉은 상상력의 작동을 거쳐 이륙해야 하고, 상상력의 힘으로 하늘에 떠 있을 수 있다고.3) 김현우의 작업물을 보고 있으니 드로잉은 땅과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현상을 여실히 모사하는 실천이 아님을 곱씹게 됐다. 일례로 나는 「비오는 날에」가 신기하게 다가왔다. 감상할수록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줄기가 창문에 흘러내리는 순간을 담은 것일까, 아스팔트 땅에 생긴 기름 무지개를 흑백 톤으로 표현한 것일까, 아님 두 광경이 동시에 나타난 것일까 호기심이 일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광경이 나란히 연상되도록 도모하는 김현우의 상상력 넘치는 작업을 통해, 아무리 일상적이고 평범한 광경이라 할지라도 거기서 피어오르는 기이함과 수수께끼에 대해 끊임없이 궁금해함이 드로잉에 깃든 예술가의 응시라는, 존 버거의 소신을 되새길 수 있었다.4)
전시명의 출처가 된 그림을 발표한 배경욱의 작업을 본다. 그의 그림은 미술은 기억을 어떻게 나타내는가에 대한 사색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지난 기억이 수집된 그림엔 인물과 물건, 식물과 물건, 건물과 건물, 건물과 물건, 자연과 인공물이 응집된 형태가 두드러졌다. 좀 더 자세히 들어가면, 종이의 한정된 사이즈에 영향을 받아 구현되는 기억 속에 존재하는 사물 간의 거리감이나 사물의 크기는, 뭔가 사실적이면서도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실물 크기를 영어로 life-size라 부름에 착안한다면, 배경욱은 일상에서 존재하는 것들의 크기와 거리를 교란하는 회화를 선보였다. 이로써 인간의 기억에 내재된 주관적인 속성을 독특하게 시각화해온 미술만의 실천을 증명하는 듯했다.
배경욱이 종이의 제약에 기댄 채 기억의 조각들을 한데 그러모으고선 응축된 기억을 농밀한 톤에 담아 표현했다면, 김동현의 작업은 종이의 제약에서 비롯된 작업자의 재치가 작업자 본인의 기억과 연관된 '시적인 지도'의 생산으로 이어졌다. 참고로 그는 2021년에 열린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란 전시 제목을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당시 나는 "굽이의 안무"란 조어를 통해 노선도의 움직임 자체에 몰두한 그의 그림엔, 인간의 이동성에 복속되지 않는 노선도의 율동성이 부각된다고 논한 바 있다.5) 이번엔 「내부순환로와 청계천」 등 도로가 그려진 대목에서 발견되는 곡선의 매력에 좀 더 주목해보았다. 특히 김동현은 앞서 언급한 작업물에서, 청계천에 흐르는 물결선에서 느껴지는 리듬을 천 위에 깔린 도로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제공했다. 도로엔 물결이 일듯이 일렁임이 느껴진다. 도로와 천 사이에 존재하는 벽은 일렁이는 물결, 물결에 비친 빛이 영사되는 스크린처럼 보인다. 그의 그림마다 일관되게 나타나는 곡선의 리듬은 '지도의 시학'을 펼치고자 했던 데니스 우드의 생각과 맞닿는다. 우드는 인간의 기억 및 체험이 서린 리듬을 시의 흔적에 비유했다. 그 흔적이 지도에 나타나길 바랐다.6) 우드는 가로등을 나타내는 지도를 예로 들어 말했다. 기존의 지도는 가로등 전주의 위치를 표시한다면, 자신이 추구하는 시적인 지도는 가로등이 비추는 불빛의 위치를 표시하려 한다고. 이처럼 우드는 특정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기억을 시각화할 흔적이, 지도에 기록되길 바랐다.6) 김동현의 회화로 돌아온다. 그가 표현한 곡선에선 어떤 운율이 느껴진다. 운율이 가미된 그림 속 표현들은, 작업자와 당신 그리고 내가 거닐었던 곳에 대한 주관적인 회상을 격려한다. 무엇보다 종이의 제약과 만나는 그림 속 운율은, 인간의 행보로 거닐 수 없는 공간과 장소에 대한 상상을 자극한다. 이를 통해 객관성을 담보해야 한다고 으레 인식되어온 지도는 누구나의 주관이 리드미컬하게 투영된 시적인 지도로 탈바꿈한다.
종이와 그리기의 맥락으로 전시작을 계속 파고들자면, 최유리의 「나는 00」 연작에서 찢긴 스케치북은, 너저분하기보단 깊은 인상을 자아내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그는 몇 번의 큰 수술로 섬세한 손동작이 어려우며, 작업 중 의지와 다르게 손이 뻗어나가기도 한단다.7) 어쩌면 물감 자국이 묻어있는 찢긴 스케치북 끝자락은, 그가 사진으로 간접 경험하거나 몸소 체험한 광활한 자연의 흐름에 최유리 자신을 오롯이 내맡김으로써, 작업자와 관객의 시야가 닿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함께 그려볼 흔적으로 자리하는지도. 그러므로 현실에서 찢긴 흔적이란 이어지는 흐름을 단위로 잘라내는 절취선을 의미하나, 최유리의 몇몇 회화 속 찢긴 종이 흔적과 물감 자국은 감상하는 내 마음속에서 끊임없는 상상의 터가 확장되도록 고무시켰다.
한편 정종필의 그림에선, 우리가 평소 대상을 접할 때 매개가 되는 미디어 화면의 특성에 대한 고찰이 깃들어 있다. 그의 작업은 뉴스를 시청하며 일일이 스크린샷을 남긴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림 속 화면을 이루는 테두리가 곧지 않고 미세한 굴곡으로 처리된 부분을 통해선, 암실 내 세척 줄에 걸린 사진을 보는 기분도 들었다. 온라인·모바일·디지털 세상을 관찰하는 동안 캡처 기능을 통해 나타난 스크린샷과 화면, 카메라와 암실의 아날로그적 감각을 연상케 하는 사진과 화면, TV와 화면의 감각을 공생시키는 정종필의 그림은, 우리의 눈엔 일상생활에서 접해온 미디어의 속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김치형과 정진호의 작업을 통해선 '반려伴侶의 감각'을 곱씹었다. 익히 알다시피 종種이란 개념을 오용함으로써 다른 생명체를 향해 (겉으론 선량함을 띤) 차별과 멸시를 행해온 인간이란 존재는, 사방에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크리처물이라는 영화 장르에 심취해온 김치형, 게임 속 가상의 신화적 캐릭터에 천착해온 정진호의 작업물을 쓱 훑으면, 그림을 통해 인간을 향한 경고를 날리는 것인가에 치우칠지도. 허나 나는 두 작업자가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활동과 이야기에 꾸준히 주목함으로써,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서 공고화된 수직적 위계를 반려返戾하고, 비인간적 존재의 삶에 응답하는 능력이 촉진될 활로를 모색한단 생각이 더 들었다. 그런고로 나는, 기괴하고 괴멸적인 광경을 출현시킨 인간이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단 메시지로 두 작업의 생명력을 한정하고 싶지 않았다. 일찍이 서로 다른 생명체 사이에 반려의 감각이 필요함을 역설한 도나 헤러웨이의 견해를 원용하자면, 두 창작자의 작업을 통해 나는 반려伴侶의 감각을 다지고자 무엇을 챙겨야 하는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인간 중심의 이야기와 서사가 놓쳐버린 이야기와 서사를 공유하고자, 어떤 이야기 및 서사를 토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작업에 임해야 하는가. 우리가 인간 중심의 사유에서 간과한 사유를 조명하길 원한다면, 어떠한 사유를 재료 삼아 다시 사유해야 하는가. 우리가 인간 중심의 관계성에 국한된 연결의 태도를 반성하고, 다종다양한 생명체와의 전례 없던 연결을 실현하기 위해선, 어떠한 연결성을 화두 삼아 새로운 연결로 나아갈 수 있을까.8) 미술은 인간이 자신과 다른 생명체를 존중하고, 생명체들의 고유한 삶과 서사에 응답할 능력을 키워가는 터가 될 수 있을까.
노트에 적은 마지막 내용까지 공개하는 동안, 나는 전시장을 걷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동안 걷기에 대한 갖가지 통찰이 나왔지만, 걷기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위치를 드러냄과 동시에, 자신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위안을 얻곤 했다. 전시작을 감상하며 전시장을 이동하는 당신의 발걸음이, 장애인 예술가답다는 위치를 고정하려 드는 사회적 흐름으로부터 탈피할 행보가 되길 바란다. 당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당신에게 내려진, 교묘하되 폭압적인 판단과 규정의 언어에서 벗어나, 당신이 소망해온 삶의 장면을 만나길 기도한다. 물론 미술은 그러한 장면을 바로 제공할 열쇠를 선사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미술에 대한 애정을 놓지 못한다. 미술을 통해 삶의 신비에 가닿을 암호를 푸는 반복된 과정에 매료된 자기 자신과 타인을, 이전보다 아껴주리라 다짐한다. ■ 김신식
* 각주 1) 이번 전시엔 발달장애, 정신장애, 지체장애 등을 겪는 이가 전시작을 출품했다. 이 글에선 전시에 참가한 개개인이 겪는 장애의 유형과 그 특성에 방점을 찍은 다음, 각자가 추구하는 예술 활동의 특색을 읽지 않으려는 취지에서, '장애인 예술 작업자'로 총칭했음을 밝힌다. 이러한 맥락 아래 9인의 작업자가 행해온 작업 설명 시, 해당 작업자가 겪는 장애가 무엇인지 표기하지 않고 작업자의 이름만 적었다. 2) 패스워드를 패스 액션 등의 측면으로 세밀하게 검토하는 실천은 마틴 폴 이브, 『패스워드』, 최원희 옮김, 플레이타임, 2017 참고. 3) 존 버거, 『벤투의 스케치북』, 진태원 옮김, 열화당, 2012, 157쪽 참고. 4) 존 버거, 『랑데부』, 이은경·임옥희 옮김, 동문선, 2002, 206쪽 참고. 5) 김신식,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 서울시립미술관 , 2021, 47쪽 참고. 6) 데니스 우드, 『모든 것은 노래한다』, 정은주 옮김, 프로파간다, 2015, 20쪽 참고. 7) 김인경·김효나 외, 『돋보기 그늘의 여인: 최유리 편』, 밝은방, 2022, 154쪽 참고. 8)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최유미 옮김, 마농지, 2021 참고.
Vol.20241127b | 열쇠를 주웠다 먼 희망을 얻었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