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SEMBLY

이동우展 / LEEDONGWOO / 李東雨 / painting   2024_1120 ▶ 2024_1202

이동우_Assembly 2024-7_혼합재료_130×162cm_2024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충청북도_충북문화재단 기획 / 이동우

관람시간 / 10:00am~07:00pm

충북갤러리 CHUNGBUK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41-1 인사아트센터 2층 Tel. 070.4224.6240 www.cbartgallery.com @cbfccbfc

작가는 이렇게 버려지고 유폐된 것들에 따뜻한 시선을 고정한다. 여기에 '한지(韓紙)'는 이동우 그림의 혼합재료에서 불가피하게 노출되는 다듬어지지 않은 각진 야성과 생경함을 지그시 눌러줌으로써 고요한 평화를 만들어 낸다. 한지 특유의 따뜻하고 온유한 수용성으로 버려진 것들을 감싸며 품는 '이불' 역할을 한다. 한지에는 상처와 아픔을 위무하는 놀라운 치유의 힘이 있고 그 힘의 출처가 작가의 예술적 태도라는데 신뢰가 있다. 한지의 '이데아(Idea)'가 '엄마'의 '얼굴' 더 나가 '신'의 '손길'일 수 있는 까닭이다. 미당(未堂)은 시 「내리는 눈발 속에는」에서 "내리는 눈발 속에는" 소리가 있고 그 소리는 "안기어 오는 소리" 혹은 "안기어 드는 소리"라고 말하며 세상에서 가장 힘센 위로와 그냥 편안한 말 "괜찮다.../괜찮다...를 연발했다. 한지는 바로 작가 현산(玄山)이 세상을 향해 보내는 무언의 안부 '괜찮다'인 것이다. ● 이동우의 작품에서 보다 중요하게 봐야할 메시지가 있다. 세계에 대한 인식인데 이 인식은 작가가 세상을 보는 태도와 관점으로 인생관 혹은 예술관에 스민다. 우리는 보통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인식하며 덩어리의 중심이 세계를 편재하거나 배분하는 메커니즘이라고 여긴다. '권력'은 그렇게 태어나고 전횡한다. 이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종의 자동화다. 자동화 속에 중심과 변두리, 전체와 부분, 흑과 백, 미와 추 등 세상의 온갖 이분법에서 파생하는 갈등과 대립이 첨예하게 충돌한다. ● 그러나 이동우의 종이딱지로 상징되는 혼합재료들은 이러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기존의 대중의 인식을 난타하며 경종을 울린다. 작품 속에 중심이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분 스스로가 전체를 이루는 중심의 연속으로 이어져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중심이 없으므로 중심이 있는 것이다. 중심이 존재한다면 중심의 전능함으로 인해 새로운 전체를 이룰 수 없다. 이동우 그림의 전체가 부분과 조각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종이딱지류로 윤곽을 만들어 가는 '모자이크 기법'인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림도 삶도 유기체로 분점(分點)된 '민주성'을 띠고 있다. 그림의 모자이크 기법이 곧 삶의 '퍼즐'이라는 것이다. '횡재'와 '요행'이 아닌 조각 조각의 충일(充溢)한 삶이 이동우의 예술 세계를 빛나게 하는 배경이 된다. 김훈은 소설 『칼의 노래』에서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고 했다. 작가 이동우야말로 버려진 '섬(종이딱지류)'에서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일(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그 꽃이 가을의 끝자락에 사람 동네로 온다. ■ 강찬모

이동우_Assembly 2024-8_혼합재료_240×122cm_2024

배제된 시선, 사라진 주체를 소환하는 방식 - 이동우 그림의 재생과 탈중심적 서사 따라가기 ● 1. 작가의 '힘'은 창작의 욕망이며 곧 만나게 될 관람자의 영혼에 파문을 일으키는 강력한 잠재적 에너지다. 그 힘은 작가가 구체적인 대상에 천착하는 형태로 드러나는데 이러한 태도와 지향성을 미국의 신비평가(New Criticism) 랜섬(Ransom)은 '사랑'이라고 했다. 몰입을 통해 주체와 객체가 무화된 '주객일체'의 순간이다. 위대한 작품들은 이처럼 발현된 사랑이 관람자에게 보편적으로 승화되어 소통된 인식의 결과다. 때론 그 사랑이 치열할수록 광기와 우울은 시대의 금제(禁制)를 넘나들고 관습의 경계를 허물며 후대의 회자되는 여운이 되었다. 이 가늠할 수 없는 에너지 속에 비등하는 '감동'이 자란다. ● 예술 작품을 통해 받는 감동은 작가의 작품이 관람자에게로 전이 되는 힘의 '운동성'에 기인한다. 운동성은 관람자 개인의 기존 인식을 난타하는 '충격'이 본질적이다. 그러니까 감동의 내적 성분은 낯섦 때문에 엄습한 외부 충격이 정서화되는 과정에서 걸러진 차원 높은 균질한 고양성을 자양분으로 한다. 감동 없는 작품이 예술로서 이름을 얻지 못한 한낱 무명의 피사체에 불과한 이유다. 예술이 하나의 작품과 행위로 '영원'을 획득한 것도 마르지 않는 감동의 화수분과 쉽게 해독을 허락하지 않는 신비한 천의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힘은 배수의 진을 치고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하려는 작가의 처절한 내적 고투의 산물에서 나온다. ● 이런 면에서 작가에게 '겸직(兼職)'은 양수겸장이 아니라 감동의 약화를 초래하는 힘의 분산이다. 작가 이동우의 이번 전시회는 불가피하게 힘이 양분될 수밖에 없는 존엄한 '육성(育成)'의 현장을 떠나 전업 작가로서 본격적인 홀로서기를 하는 시기에 개최된다는 점에서 큰 위의(威儀)를 지닌다. '마당'을 나온 짧은 야생의 시간을 통해 축적한 원초적 힘과 황홀한 실존을 만나게 되는 것은 분명 설레는 일이다. ● 지난 6월 증평에서 개최된 전시회가 본격 도약을 위한 '출정식'이었다면 이번 전시회는 향리(鄕里)를 떠나 세상 밖으로 첫발을 내딛는 거대한 일보(一步)다. 대회전을 위해 장도(長途)에 올랐던 고전 영웅의 이동우식 출사표(出師表)며 '京(서울)'은 곧 그 일합(一合)이 시연되는 '아트(Art) 아고라(agora)'인 셈이다.

이동우_Assembly 2024-9_혼합재료_240×122cm_2024

2 이동우의 작품 세계는 색감의 조화를 바탕으로 대상의 윤곽과 접점이 되는 일반적인 회화의 페인팅 기법과는 차이가 있다. 채색을 통해 물성을 드러내는 전통적 작업이 아니라 '혼합재료'를 이용해 면과 면이 중첩되고 어긋난 후 다시 이어진 지점에서 비로소 하나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내며 준비된 메시지를 발신하는 방식이다. 미적 엄숙성보다는 '지각의 엄숙성' 즉 '숨은그림찾기'를 통해 감춰진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활성화되는 인지 기능을 배경으로 하는 그림이다. 가까이 봐야 아름답다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고 봐야 이동우 그림은 더 아름답고 숨은 그림의 실체와 만나게 될 확률이 높다. ● 그동안 전시회의 스토리를 편의상 1기 '옛이야기', 2기 '상실', 3기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4기 'TREK', 5기 '상황', 6기 '점을 넘어서'라는 제목으로 세분해 볼 수 있는데 최근에 선보인 작품 7기 'assembly(어셈블리)'에서도 이 같은 작업 태도는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동우 그림의 시그니처가 된 여러 개의 소재와 부속품을 결합해 하나의 구조를 만들어 가는 assembly는 이동우 예술 세계의 '빙산(氷山)'으로 그림의 변천 과정 4기에 해당하는 'TREK'에서 이미 골판지에 '면봉'을 사용해 대상의 윤곽에 촘촘히 육박해 들어가는 방식으로 그 '일각(一角)'을 드러낸다. ● '종이딱지'로 대표되는 수많은 조각들이 연결된 '면'과 '선'은 결국 면봉의 '점'의 변주며 이는 다시 공간의 확장과 대상의 본질로 이어지기 때문에 기본에 충실한 그러므로 오래 튼튼한 대단히 '칸딘스키(Kandinsky)'적이다. 소위 '혼합재료'로 통칭하는 전자기기의 '기판'과 '캔( 뚜껑)' '코르크 마개' 등도 종이딱지의 역할과 다르지 않다. 이렇듯 7기에 이르러 그의 그림은 긴 잠행 끝에 서서히 층위를 드러내는 고래의 웅장한 대관식 같은 모습으로 세상과 마주한다. ● '종이딱지'는 유년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데 일회성이며 서민적인 '잡지' 등을 접어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행복했던 유년 시절의 추억과 연동된다. 누구나 한 번쯤 호주머니가 딱지로 가득했던 호기로운 시절이 있었을 테니까. 딱지의 개수가 또래 집단의 권력의 서열이던 때가 있었다. 종이딱지는 일상에서 흔하게 보고 주목도가 없는 '잡지'로 접는다는 부분에서 생명력을 얻는다. 잡지의 표지는 통속적이지만 그 속에는 당대 서민의 삶의 애환이 핍진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동우_Assembly 2024-10_혼합재료_130×162cm_2024

그런데 모든 잡지가 종이딱지의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주로 『행복이 가득한 집』과 『백과사전』이 종이딱지의 도구가 된다는 면에서 이동우 그림의 독자성이 있다. 잡지의 내용과 특징 그리고 인쇄된 색이 이동우의 전체 그림의 메시지를 결정하는 복선이 된다. 『행복이 가득한 집』으로 접은 종이딱지가 쓰인 그림에서는 보통 사람의 삶의 보금자리인 집의 이미지가 다양한 색으로 조화를 이루게 되는데 딱지 표면에 불규칙하게 노출된 색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 『백과사전』으로 접은 종이딱지 또한 지식의 총체로서 인간학이 집대성된 '문화'를 상징하는 복선을 깔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이동우 그림의 배경은 그 자체가 시공을 초월한 인간 삶의 복합성과 종합성을 의미한다. 두 잡지는 종이딱지의 도구가 되어 배제된 시선이 재생된 주체로 당당하게 소환되는 매개가 되는데 이는 현대미술을 상징하거나 규정하는 '오브제(objet)'의 '개념적 시선'보다 한 발 더 앞서 있다. ● 전자기기의 '기판'은 또 어떤가. 종이딱지가 재래적인 추억을 소환한다면 기판은 첨단을 상징하는 일명 현대 문명판 종이딱지다. 속도와 정보 자본을 충동하고 문명의 흐름을 선도한 기판도 이젠 반도체가 중심이 된 AI시대의 종언을 고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지난 시대의 추억으로 윤색되었다. 주류인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배제된 역할을 다한 현대성인 셈이다. 기판 속에는 트랜지스터로 상징되는 압축적 근대를 숨 막히게 달려온 우리의 모습이 전자 회로의 미로처럼 수고롭게 엉켜있다. 그러나 고래 그림엔 특이한 지점이 있다. 고래의 몸통을 기판으로 연결시켜 고래 그림을 완성하고 있는데 이때 기판이 중의적 의미로 읽힌다는 점이다. 버려진 것들이 서로 위로하며 생존하는 또 다른 방식을 표현하는 메시지와 버려졌지만 문명의 잉여로서 아직도 희미한 작동이 가능한 메시지다. ● 문제는 후자로 인식할 경우 기판의 역할은 위험한 배타성을 띤다. 버려진 것들이 함께 어떤 것을 위해 연대하거나 협력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그것을 방해하는 권위적인 위계로 읽히기 때문이다. 주목해 볼 부분은 두 메시지 모두 '고래의 꿈'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연대해 꾸는 꿈이든 홀로 꾸는 꿈이 제약을 받든 변하지 않는 진실은 꿈은 누군가의 도움과 또 열악한 환경을 극복한 후 받을 수 있는 '선물(전리품)'이라는 것이다.

이동우_Assembly 2024-11_혼합재료_162×650cm_2024

'숟가락'이 전면에 배치된 그림은 삶의 전일성과 직접 관련을 갖는다. 인간은 먹는 일로 시종(始終)한다. 먹어야 삶을 영위하며 제반 활동이 비로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숟가락을 보면 밥을 떠올리며 먹는 것에 대한 비루함을 삶 속에서 삭히고 푸념하며 위안으로 삼는다. 이동우 그림에서 숟가락은 생존을 위해 인간 삶이 숙명적으로 짊어져야 할 자화상이다. 작가는 "숟가락을 평면으로만 표현하지 않고 실제 밥상과 숟가락을 배치해 평면과 입체,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허물고 싶었다"고 말한다. 작가의 이 말 속에는 인간 삶이 응축되어 있다. 인간은 먹는 행위에 이르러 빈부귀천(貧富貴賤) 왕후장상(王侯將相)이란 사회적 서열을 허물고 '삼시세끼'라는 말로 '평등'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밥상과 숟가락이 세상의 축소판이기를 꿈꾸는 환유(換喩)적 소망은 요원하지만 그래서 포기할 수 없는 인류의 꿈인 동시에 이동우의 꿈인 것이다. ●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산 그림의 '곡선'도 인상적이다. 곡선 속에는 작가의 평면 '얼굴'이 선으로 이어져 있다. 인간을 '소우주'라고 할 때 그 우주는 자연과 동일한 산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어 궁극적으로 유구한 인간의 역사가 된다. 인간의 몸이 자연의 무늬며 자연의 무늬가 인간의 몸임을 작가의 몸과 하나가 된 거대한 산하의 곡선은 묵상(默想)한다. 작가의 호가 '현산(玄山)'인 것도 산 그림을 일별(一瞥)하지 못하게 한다. 사람들은 대개 높은 산을 말하고 '검은 산'은 말하지 않는다. 옛사람들은 하늘을 검다고 생각해 하늘 천(川)을 검을 현(玄)이라고 했다. 너무 높고 아득해 측량할 수 없어 검다고 한 것이다. 작가에게 산은 이처럼 자신의 호가 그러하듯 하늘과 같이 깊고 아득한 어떤 것이다. ● 작가는 이렇게 버려지고 유폐된 것들에 따뜻한 시선을 고정한다. 여기에 '한지(韓紙)'는 이동우 그림의 혼합재료에서 불가피하게 노출되는 다듬어지지 않은 각진 야성과 생경함을 지그시 눌러줌으로써 고요한 평화를 만들어 낸다. 한지 특유의 따뜻하고 온유한 수용성으로 버려진 것들을 감싸며 품는 '이불' 역할을 한다. 한지에는 상처와 아픔을 위무하는 놀라운 치유의 힘이 있고 그 힘의 출처가 작가의 예술적 태도라는데 신뢰가 있다. 한지의 '이데아(Idea)'가 '엄마'의 '얼굴' 더 나가 '신'의 '손길'일 수 있는 까닭이다. 미당(未堂)은 시 「내리는 눈발 속에는」에서 "내리는 눈발 속에는" 소리가 있고 그 소리는 "안기어 오는 소리" 혹은 "안기어 드는 소리"라고 말하며 세상에서 가장 힘센 위로와 그냥 편안한 말 "괜찮다.../괜찮다...를 연발했다. 한지는 바로 작가 현산(玄山)이 세상을 향해 보내는 무언의 안부 '괜찮다'인 것이다.

3 이동우의 작품에서 보다 중요하게 봐야할 메시지가 있다. 세계에 대한 인식인데 이 인식은 작가가 세상을 보는 태도와 관점으로 인생관 혹은 예술관에 스민다. 우리는 보통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인식하며 덩어리의 중심이 세계를 편재하거나 배분하는 메커니즘이라고 여긴다. '권력'은 그렇게 태어나고 전횡한다. 이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종의 자동화다. 자동화 속에 중심과 변두리, 전체와 부분, 흑과 백, 미와 추 등 세상의 온갖 이분법에서 파생하는 갈등과 대립이 첨예하게 충돌한다. ● 그러나 이동우의 종이딱지로 상징되는 혼합재료들은 이러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기존의 대중의 인식을 난타하며 경종을 울린다. 작품 속에 중심이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분 스스로가 전체를 이루는 중심의 연속으로 이어져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중심이 없으므로 중심이 있는 것이다. 중심이 존재한다면 중심의 전능함으로 인해 새로운 전체를 이룰 수 없다. 이동우 그림의 전체가 부분과 조각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종이딱지류로 윤곽을 만들어 가는 '모자이크 기법'인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림도 삶도 유기체로 분점(分點)된 '민주성'을 띠고 있다. 그림의 모자이크 기법이 곧 삶의 '퍼즐'이라는 것이다. '횡재'와 '요행'이 아닌 조각 조각의 충일(充溢)한 삶이 이동우의 예술 세계를 빛나게 하는 배경이 된다. 김훈은 소설 『칼의 노래』에서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고 했다. 작가 이동우야말로 버려진 '섬(종이딱지류)'에서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일(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그 꽃이 가을의 끝자락에 사람 동네로 온다. ■ 강찬모

Vol.20241120d | 이동우展 / LEEDONGWOO / 李東雨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