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24_1116_토요일_02:00pm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_예술경영지원센터
관람시간 / 12:00pm~06:00pm
APO 프로젝트 APO project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71길 25 www.apoproject.com
사라지는 것, 사라지지 않는 것 ● 이 전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매체로서 전시를 사고한다면, 끊임없이 만들고 보여주는 일종의 생산 기계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새로움을 열망하며 신작을 제작하고, 전시/작품은 제한된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한다. 그리고 곧 사라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생산 기계로서의 전시는 사라짐을 본령으로 또 다른 생산을 작동시킨다. ● 전시의 생산은 자칫 소비적이고 또 허무하기 마련이다. 찰나의 순간을 위해 질주하는 제작과 보여주기는 그래서 더 강렬하고, 때론 대책 없이 공허하다. 오랫동안 미술은 무너짐의 극복을, 영원불변의 가치와 기록을 탐구해왔다. 어느 전시장 벽에 걸린 한 점의 회화 혹은 우뚝 선 조각은 제한된 시간, 인간의 경험과 역사,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나 불변의 가치를 확인하는 대상/물질이 되곤 했다. 하지만 그 시도가 속도에 잠식될 때 분명한 한계가 드러났다. 빠르게 변화하고 모든 것이 재-생산되는 상황에서 미술의 생산과 소비는 '기록과 보존'에서 '실시간 소통과 반응'으로 전환되었다. 이제 미술은 더 많은 관객에게 공유되고, 여러 사회적 이슈와 연결되지만, 그만큼 더 빠르게 스크롤되며 즉흥적, 일회적 강렬함(만)으로 소진되곤 한다. 속도 중심의 소비는 그렇게 미술을 깊이 있는 경험과 사고의 대상으로 보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이주영의 작업은 무조건적인 생산과 소비에의 가담이 아닌 그것의 재고로 읽어볼 수 있다. 작업을 관통하는 반복과 순환, 유대와 교차는 단순한 결과물이나 목표를 향하기보다 존재와 지속에 관여하는 근본적인 탐구로 다가온다. 몇몇 작업을 살펴보면, 아이와의 블록놀이에서 출발한 「시아노타입 손수건」(2024)은 자신의 삶과 작업을 분리하지 않은 채 또 다른 생산성을, 그 의미를 사고하는 듯하다. 작가는 나무 블록을 쌓고 무너뜨리길 반복하는 놀이의 과정을 가제 손수건 위에 무너진 블록들의 사진으로 이미지화하는 제작 방식을 택한다. 여기서 사용된 시아노타입(Cyanotype)은 철염 기반의 사진 인화 기법으로, 푸른 색조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초기 사진술 중 하나이다. 주로 감광액을 종이나 천 같은 재료에 고루 바르고 원하는 물체나 필름 네거티브를 재료 위에 올려 자외선(UV) 빛에 노출시킨 후 어두운 곳에서 코팅된 재료를 건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노출이 끝나면 물로 헹구어 미반응 화학물질을 제거하는데, 이 과정에서 푸른 색상이 더 뚜렷해진다. 바다가 인접한 작은 마을에서 아이와 함께 생활하며 작업하는 작가는 위 설명한 생산/복제 방식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는 듯하다. 매일 사용하는, 육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제 손수건은 이미지의 바탕이 되고, 낮에 아이와 함께한 놀이와 밤에 진행한 작업이 한데 어우러져 파란 자국을 남긴다. ● 작가는 이 파란 자국을 자신이 터전으로 삶는 바다와 하늘에 포개 놓기도, 나아가 자신의 꿈으로 상징화하기도 한다. 「멀리 더 멀리」(2024)에서 작가는 앞서 언급한 손수건을 엮어 연을 만들어 날린다. 해변 위 하늘에 떠 있는, 푸른 손수건으로 엮인 연은 살아있는 듯 움직이며 자연과 포개진다. 여기서 포개짐은 단순히 물리적 시각적 겹침을 넘어 아이와 함께한 날들을, 또 본인은 또렷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을 둘러싼 여러 관계의 시간을 상상한다. 염색한 손수건을 날리는 행위는 작가의 말처럼 "손수건의 시절"을 지나는 순간이기도 또 그 시절을 순환시키는 시도이기도 하다. 손수건을 푸르게 물들이며 바다를 집으로 들여왔다고 생각한 작가는 다시 그 물건을 바다에 날리며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방식과 그 방식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제목 그대로 멀리 더 멀리 순환하고 퍼뜨린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작가의 또 다른 작업 「바다블록」(2024)과 「번갈아 그리는 그림」(2024)에서도 고스란히 발견된다.
시아노타입 손수건에서 볼 수 있는 연약한 기록성은 영원성과 가변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작가는 무언가를 만든다는 행위를 생활과 밀접한 작은 이야기에 엮고, 그것을 가변적인 재료로 실천한다. 누군가에는 다소 모순적이라 할, 이 '작고 연약한 생산'은 아이가 세상에 온 이후의 날짜를 헤아려 손수건에 기록하는 일처럼 사소하고 친밀한 과정들의 가치를 드러낸다. 같은 맥락에서 육아의 경험은 작업 전반을 가로지르는 방법들의 관계 안에서 설명 가능하다. 일례로, 이주영의 작업이 전제하는 일종의 무너짐과 그것의 반복은 얼핏 파괴와 소멸을 연상시키지만, 동시에 시작과 지속을, 심지어는 재생과 성장을 말한다. 수없이 젖병을 소독하고, 잠을 재우고, 밤새 울음을 달래는 과정은 효율을 중시하는 생산의 논리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반복 속에서 삶은 유지되고, 작은 순간들이 의미를 쌓아간다. 여기서 반복은 단순히 동일한 행동의 복제가 아니라, 미묘한 변화와 차이를 포함하는 것이다. 무너짐 역시 소멸이 아닌 다음 단계로의 이행으로, 곧 새로운 리듬과 일상을 찾아가는 동력으로 제시된다. 그의 작업에서 볼 수 있는 무너짐은 당연한 결과이며, 혼자 겪는 고통이 아닌 함께 즐기는 놀이가 된다. 여기서 미술/작품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조율되는 유동적 리듬으로,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연처럼(「멀리 더 멀리」), 지웠다 그리기를 반복하는(「번갈아 그리는 그림」(2024)) 놀이처럼 제시되는 것이다. 이주영의 작업은 일종의 공동 창작 과정과도 같다. 하나의 작품은 완성될 때까지 수없이 수정되고 무너지는 경험을 거치며, 이를 마주한 이들과의 관계 속에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무한 생산과 소비, 가속화된 속도에 동조하지 않는 이주영의 작업은 분명 오늘 미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비판을 위해 노력하는, 혹은 그것에 매진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작업은 오히려 특정 방향으로 사고를 집중하는 것을 경계하고, 무언가에 반대하고 대립하는 태도의 한계를 인지하는 모습이다. 형식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유연함을 놓치지 않는 상태로, 무턱대고 대안을 말하는 삶의 방식에도 건설적 비전에도 매몰되지 않은 채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지속하는 태도를 강조한다. 그렇게 작업에서 단순한 수동성이나 무관심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의미를 발견하는 수용과 창조, 실천을 통해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태도를 목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소정, 염경환의 작업은 전시를 망각이 아닌 기억에 연루시킨다. 전시를 통해 이들이 드러내는 '기억'은 어쩌면 거대한 '역사'의 파도 안에서 온전히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던 사건, 대상, 인물들일지도 모른다. ● 북위 38도 어로한계선 근방에서 일어난 '동해안 납북어부' 사건은 이번 전시에서 봉합되지 않은, 아니 결코 봉합될 수 없는 기억으로 호명된다. "동해 납북어부"는 195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 사이에 동해에서 납북된 한국 어부들을 지칭한다. 한국 전쟁 이후, 남북 간의 긴장 관계가 지속되면서 바다에서의 군사적 대치가 심화되었고, 어부들이 주로 조업 중에 북한 해역에 들어가거나 북한 해상 경계선에 근접했다는 이유로 납치되었다. 납북된 어부들은 종종 북한의 수산업 등에 강제 동원되었고, 심한 신체적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어렵게 귀환한 어부들은 그들의 고향에서 이념과 체제의 또 다른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 북한 체제 교육을 받은 간첩으로 의심받기 일쑤였고, 평생 주변의 감시를 받다가 고국에서 심한 고문을 받는 경우도 허다했다. 아직 생사를 알 수 없는 귀환하지 못한 어부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김소정, 염경환의 작업은 경직된 이념과 체제, 역사의 상흔을 매만지는 듯하다. 미귀환 납북어부 수를 제목으로 지은 「433」(2024)은, 동해안의 가장 북쪽 어장인 '초도'와 '대진' 사이에서 일종의 파편들을 수집하면서 시작된다. 작가는 마치 미귀환 납북어부를 기리는 의식을 행하듯, 파도에 떠내려온 목선의 파편이나 그물, 부표 등의 물건들을 수집하고, 이를 탁본으로 기록한다. 태풍과 파도, 시간을 견디며 그 형체가 뭉뚝해진 사물들은 어쩌면 '동해안 납북어부'와 아무 관련 없을지 모르지만, 시간과 파고 속 삶의 흔적이자 증표로 여겨진다. 이 사물, 떠내려온 물건들이 미귀환 어부들의 것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아니 애초에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작가는 풍화되어 부서지기 직전인, 작은 모래알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기억하려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의 기록으로 사물의 표면을 매만지고 이를 탁본으로 이미지화하는 것이다. ● 여기서 드러나는 '기억'은 거대 '역사'와 밀접하게 연결되면서도, 때로는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킨다. 같은 시공에서 비롯되더라도 기억은 사적인 반면, 역사는 공적이고 집단적인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작가는 이 기억과 역사의 모호한 경계에서 특정 사건을 내면화해 시각화한다. '동해안 납북어부' 사건의 장소는 작가가 현재를 사는 삶의 터전이자 유년을 보내온 고향으로, 그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동력 삼아 단일한 역사적 서사에 의해 소외되거나 삭제된 대상들에 집중하는 듯하다. 많은 이에게 잊혀 버린 존재를 다시 호명함으로써 동해안 납북어부 사건이 완결된 서사가 아님을, 사라질 수도 왜곡될 수도 없는, 계속 발굴하고 수집하며 복원해야 하는 역사임을 상기시킨다.
기억, 기록과 그것의 재편입 과정은 작가의 작업에서 탁본의 방법론으로 보다 분명하게 파악된다. 물체의 표면을 고스란히 전사하는 탁본은, 단순한 기록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 그것은 특정 대상을, 나아가 지역의 문화와 이야기를 담아내고, 사회적 맥락을 드러내는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다. 「Fishing boat」(2024)는 목선을 손으로 매만지며 또 그것에 의지하며 표면을 기록한다.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 대상을 매만지는 행위라기보다 어부들의 삶을 기억하고, 그들의 경험을 잊지 않기 위한 일종의 사회적 노력으로 봐야 할 것이다. 대상을 통해 관계를 탐구한다는 동양화 탁본의 전통처럼, 작가의 작업은 같은 장소에 놓였으나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았던 인물들을 연결하며 보다 직접적인 관계를 상상케 한다. 또 그것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수단으로 탁본을 활용하고 있다. 즉 탁본의 방식은 대상의 단순한 전사가 아닌 그 너머의 관계망을 드러내는 일종의 매개체로 자리한다. 바다에서 살아가는 작가의 일상이 곧 동해안 납북어부를 포함한 지역적, 사회적, 역사적 사건들, 장면들과 연결되면서, 그 저변에 모종의 공통 관계가 전제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탁본은 소외된 존재를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 됨과 동시에, 기억의 복원과 사회적 인식의 전환을 시도하는 이야기 방법론이다. 그것은 또한 개인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케 하고 나아가 어떤 연대를 꿈꾸게 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소정, 엄경환의 모든 작업은 바다를 배경으로 한다. 작업에서 파도가 치는 바다는 광활한 자연이자 끊임없이 반복되는 역사적 현상의 배경이 된다. 그것은 문화적 공간으로 개념화되기도, 그 밀어내고 멀어지는 특성은 기억과 기록의 메타포를 제공하기도 한다. 바닷가에서 수집한 사물들은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얽히고 반복되는 비선형적 시간성을 인지시키기도, 나아가 기억과 사건을 재소환하며 현재를 교차해내기도 한다. 작가는 밀려 나갔다가도 계속 되돌아오는 파도처럼 기억과 망각의 움직임에 연결된 오늘을 역사의 순환, 기억의 흐름 안에 상징화한다. 바다와 미술은, 파도와 탁본은 서로 너무나도 다른 영역에 위치하지만, 여기 작가의 작업에서는 모두 흔적과 반복, 시간과 기억이라는 공통된 성질로 관계 맺는다. 김소정, 엄경환의 작업이 물체의 표면에 남은 흔적을 통해 무언가를 기억하려 한다면, 바다는 자연과 역사적 사건의 흔적을 끊임없이 생성하고 또 지워 나간다. 그렇게 바다는 시간의 흐름과 변화하는 기억을 어떻게 남기고, 또 어떤 형태로 포착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중요한 은유적 연결점을 제공한다. ■ 권혁규
Vol.20241114a | 우리는 끝없이 흐른다 we flow on and on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