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낙원

나누리展 / NANURI / painting   2024_1108 ▶ 2024_1208 / 월요일 휴관

나누리_투명한 낙원展_고양아람누리 고양시립 아람미술관_2024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24 고양우수작가 공모전 청년작가전6 고양 아티스트 365

주최 / 고양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00pm / 월요일 휴관

고양아람누리 고양시립 아람미술관 Goyang Aramnuri, Aram art Museum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앙로 1286 (마두동 816번지) 상설전시장 2 Tel. +82.(0)31.960.0180 / 1577.7766 www.artgy.or.kr

살아 숨 쉬는 세계 ● 단번에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고 느낄 수 있는 그림들의 특징은 종교인이 아니어도 알 수 있는 서사가 눈에 띈다는 점이다. 이때,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성서의 유명한 이야기 혹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풍광이다. 물이 흐르고, 버드나무가 흩날리고, 몽환적인 색채의 하늘과 땅이 돋보이는 나누리의 그림은 종교화일까? 투명한 낙원이라는 작품명이 이러한 색채를 더욱 강화하는데도 불구하고, 보통의 낙원이 아닌 사적인 낙원으로 읽히는 것은 흐르는 하늘 덕에 덩달아 녹아내리는 나무 때문일까? ● 하늘뿐 아니라 버드나무도 아래로 흐른다. 흐르는 물감이 표현법의 하나일 수 있겠으나, 작업 전반에서 찾을 수 있는 흐르며 하강하는 이미지는 그림 속 공간이 상승하며 높게 위치한 어떠한 장소가 아닌 바로 우리 눈앞에 바짝 다가와 있는 바로 당신의 영역일 가능성을 높인다. 뜬구름이 아닌, 눈높이의 안개와 같다. 가까이 다가가자, 순서가 뒤바뀐다. 하늘이 나무 위를 덮어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나무가 하늘 위로 솟아나고 있었다. 하강인 줄 알았으나 상승이었다. 하늘이 그림의 마지막이 아닌, 그림의 시작이었다. 그러고 보니, 가로로 흐르는 물 곁에 수직으로 강하게 뻗은 나무가 단단해 보인다. 이 단단함이 전체 화면을 지지하고, 상승의 느낌을 더하고 있다.

나누리_투명한 낙원展_고양아람누리 고양시립 아람미술관_2024

나누리는 곳곳의 나무들에 때로는 섬세하게 때로는 강렬하게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흔들리는 버드나무는 잔잔하지만, 꺾이지 않는 유연함으로 무장했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생명의 물은 그 색채가 진하고 선명하다. 이런 살아 있는 움직임은 나름 온전해 보이는데, 그것들이 서 있는 땅과 하늘은 불완전해 보인다. 사라질 듯 경계가 흐릿하다. 생명력으로 가득 찬 버드나무와 꽃이 그 불완전함을 유연함으로 바꾸기도 하며, 이 불완전함이 도리어 전체 공간에 숨을 불어 넣는다. 창세기 넷째 날의 세상은 완전하지 않았다. 완전한 낙원은 아니지만, 어떠한 형태를 갖춰가는 과정에 있는 중간 지점에 놓인 낙원의 모습은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이미 존재하는 것들로도 충분히 살아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 흐르며 살아나고 덮으며 죽어가는 순환의 세상과 그 세상 속의 유한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그림 속 소재들은 나누리의 삶과 직접적으로 닿아 있다. 신장 이식이라는, 다른 이의 죽음이 자신에게는 새로운 시작으로 작용했던 경험은 작가로 하여금 '사라짐'이 '태어남'으로 이어지는 순환과 세상의 이치에 대해 성찰하게 하였다. 작가의 그림은 분명 이상향의 낙원이며 성서의 내용이 반영된 에덴동산이기도 하지만, 그만의 커다란 사적인 낙원에 더 가까워 보인다. 작가의 종교적 기반은 가톨릭이다. 작업에 종교적인 내용 또한 반영되었다고 인정하는 작가는 영원성과 완전함을 상징하는 신과 달리 인간은 왜 불안하고 불완전할까 알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신의 창조를 모방하며 그 영원성에 닿아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처럼 완벽할 수 없었고, 불완전하며 생성과 소멸이 순환하며 스스로 살아 숨 쉬는 중간 지점의 낙원을, 자신만의 낙원을 창조하였다.

나누리는 이러한 불완전성을 드러내기 위해 캔버스에 영역의 바탕이 되는 흰 젯소 칠을 하지 않고, 투명 젯소를 칠해 바탕이 투명하여 모든 작업 과정이 드러나 보이기를 의도하였다. 작가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자연스레 쌓이는 물감 층이 하나의 생명이며, 작업 행위 자체가 생명을 쌓아가는 과정으로써 불완전한 동시에 강한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행위라 말한다. 완성된 결과물보다 행위와 행위의 과정에서 더욱 강한 생명력을 느낀 작가는 그러한 불완전함을 그림 속에 담고자 한다. 관념 속 풍경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손에 만져지는 자신만의 낙원을 만들어낸 나누리는 이러한 연유로 자신의 작품에 투명한 낙원이라 이름 붙였다. ● 나누리의 작업에서 투명함은 불명확함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신의 낙원이고, 영원하지 않은 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이상향의 낙원은 온전하기에 사라지지 않아야 하는데, 나누리의 낙원은 사라지기도 하고 흘러내리기도 하며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순환의 과정은 온전함으로 가는 불완전함이기에 이러한 순간들이 고스란히 비추어지는 그녀의 낙원은 투명한 것이다. ● 이러한 그녀의 낙원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동물은 나비이다. 가장 작은 희망은 작아서 소중하다. 작아서 눈에 띄지 않으니 찾아보게 되고, 작아서 사라질까 눈길을 뗄 수 없다. 식물의 울창함과 손에 잡히지 않을 듯 작아 바스러지는 나비의 움직임은 생명의 고귀함을 다시금 내세운다. 흔들리며 쓰러지지 않는 버드나무의 줄기에서 초연함을, 물가에 자리 잡은 생명력에서 강인함을 찾아 그리는 나누리의 시선이 작은 희망인 나비와 함께 흩날린다. 투명한 낙원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영원한 것을 바라는 우리는 불완전하기에 과정 중에 있는 우리의 모습에서 순간에 깃든 온전함을 뒤쫓는다. ■ 정희라

Vol.20241108i | 나누리展 / NANURI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