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생명력

문혜정展 / MOONHYEJUNG / 文惠正 / painting   2024_1024 ▶ 2024_1113 / 일,월요일 휴관

문혜정_대지의 꽃_한지에 먹_230×450cm_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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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4_1024_목요일_04:00pm

아트레온 갤러리 초대 작가展

주최 / 아트레온 아트센터 기획 / 아트레온 갤러리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아트레온 갤러리 Artreon Gallery 서울 서대문구 신촌로 129 (창천동 20-25번지) B1,2층 Tel. +82.(0)2.364.8900 www.artreon.co.kr

문혜정의 회화 - '대지의 생명력, 존재에 생명을 분유하는' ● 뿌리가 하나로 엉켜 유기적인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것 같은. 그 뿌리 사이사이로 새순이 돋는 것도 같은. 하나로 엉킨 뿌리가 에너지원을 실어나르는 호스 같은. 그러므로 존재에 에너지를 분유하는 생명력의 원천 같은. 칠흑 같은 밤에 정처도 없이 부유하는 씨방들 그러므로 생명의 씨앗 같은. 그 자체 어둠을 밝히는 별빛 같은. 허공을 부유하는 식물의 포자 같은. 바람에 흔들리는 민들레의 홀씨 같은. 생육환경이 열악한 갯벌 혹은 사막에 핀 바다식물이나 사막식물 같은. 하나의 단위구조가 겹겹이 포개져 패턴을 이루고 있는 침엽수의 송순(솔순) 같은. 고개 숙인 벼 이삭 같은. 논밭에 흩뿌려진 볍씨 같은. 인삼밭의 차양이 만든 그늘 속 대지를 향해 손발을 뻗치고 있는 인삼 잎과 잔뿌리 같은.

문혜정_태동_한지에 먹_210×280cm_2024
문혜정_싹돋음Ⅰ_한지에 먹과 파스텔_135×195cm_2024
문혜정_싹돋음Ⅱ_한지에 먹과 파스텔_42×84cm_2024
문혜정_꽃이야기_한지에 먹_42×42cm_2024

춤추듯 난무하는 선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식물 같은. 하나로 포개져 서 있는 수목 같은. 자기를 수줍게 혹은 화들짝 열어 보이는 꽃잎 같은. 몸통 밖으로 고개를 내민 식물의 순 같은. 물고 물리는 꽃잎들이 하나로 연결된 자연 그러므로 순환하는 자연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름도 없는 들풀들이 바람에 춤을 추는 것이 대지의 약동하는 생명력을 보는 것도 같은. 추수가 끝난 논밭에 벼를 베고 남은 밑동 같은. 마구 엉킨 선들이 자연의, 자연 존재의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네트워크 그러므로 연결망을 보는 것 같은. 그 자체 존재와 존재를 연결하는 관계와 접속을 보는 것도 같은. 그러므로 생명선을 매개로 하나로 연속된 존재의 망을 보는 것도 같은. 일시에 날아오르는 새 떼 같은. 겹겹이 포개진, 능선이 있는 풍경 같은. ● 극적으로 말해, 모든 일은 인삼밭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문혜정은 독일에 유학하면서 인삼 몇 뿌리를 가지고 갔다. 몸이 안 좋다 싶으면 끓인 인삼 물을 마셨다. 실제로 몸이 좋아져서라기보다는 심리적 안정과 위안이 더 큰 이유였다. 작가에게 인삼은 단순한 약재 이상의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아이콘이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설치작업으로 인삼밭을 재현했다. 필요하다면 국내에서 따로 자재를 공수해가기도 했다. 생활 속 오브제가 기능을 잃으면 미학적 오브제가 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들이 마르셀 뒤샹(그 자신이 어느 정도 초현실주의자이기도 했던)이고 초현실주의자들이었다. 이로써 개념 오브제의 길을 열었고, 예기치 못한 제3의 의미(예컨대 억압된 욕망과 같은)를 가능하게 했다. 구조주의식으로 말하자면, 맥락이 달라지면 의미 또한 달라지는 만큼,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오브제 고유의 성질이라기보다는 맥락에 달려있다. 그렇게 맥락이 달라진, 더욱이 생전 처음 보는 현지인에게 인삼밭은 인삼밭으로서보다는 그 자체 고유한 설치작업으로 보였고 오브제로 보였다. 최근에 회자 되는 것이지만, 환경과 생태 담론을 선취하는 부분도 있다.

문혜정_드러냄 Ⅰ_사진에 드로잉_34×59cm_2024
문혜정_드러냄 Ⅱ_사진_65×115cm_2024
문혜정_드러냄 Ⅲ_사진_65×115cm_2024
문혜정_드러냄 Ⅳ_사진_65×115cm_2024

그렇게 생태 문제가 작가의 작업을 파고들었다. 의식적으로 파고들었다기보다는 반무의식적으로, 그러므로 생리적으로 작가에게 스며들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그리고 이후 생태 문제를 화두로 이런저런 작업을 해왔지만, 그 작업 중 이번 전시에서는 그동안 짬짬이 해왔던 드로잉을 한 자리에 모았다. 그리고 여기에 사진 작업과 최근에 새로 제작한 먹 작업(상대적으로 섬세한 디테일의 먹 작업 역시 크게 보면 드로잉의 한 범주로 봐도 좋을 것)을 보탰다. 드로잉 중에는 이미 회화작업으로 옮아간 경우도 있겠고, 더러 부분 이미지가 회화를 위해 소용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 드로잉은 회화의 격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만큼 즉각적인 표현, 즉흥적인 표현이 주는 날것 그대로의 이미지가 미덕이다. 이성이 매개되기도 전에 감성 본래의, 처음 발상 그대로의 직접적인 표출이 주는 생생한 이미지가 미덕이다. 작가의 작업이 유래한 원형적 이미지, 작가의 회화가 잠재하고 있는 이미지들의 이미지, 그러므로 이미지들의 보고라고 해도 좋다. 연필이든 먹이든 주로 분방한 그리고 감각적인 선으로 형태를 표현하는데, 사물 대상을 특정해 그 닮은꼴을 묘사하기보다는(그러므로 재현하기보다는) 암시적이다. 몸적이다. 생리적이다. 음악적이다(작가의 그림에는 리듬이 있고 호흡이 있다). ● 의식보다는 무의식, 정신보다는 몸에서 발현된 열린 선들이 이런저런 형태를 암시하는데, 꽃과 식물의 포자, 들풀과 뿌리와 같은 자연 소재를 암시하지만, 열린 선으로 그린 반추상적인 형태인 만큼 다른 무엇으로 보아도 무방한 그림이다. 그렇게 열린 선으로 그린 암시적인 형태가 항상적으로 이행하는, 운동하는, 변화무상한 자연의 생리에도 부합하는 부분이 있다. ● 자연은 움직인다. 비록 인간의 관념이 자연의 고정된 실체를 붙잡으려 해도, 그리고 실제로도 그림과 사진이 고정된 순간의 포착을 보여줄 때조차 사실 자연은 다만 한순간도 정지해 본 적이 없었다. 움직이는 자연? 그게 뭔가. 자연이 품고 있는 생명이고, 바이털리즘이고, 생태다. 그러므로 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꽃을 빌려 생명을 그리고 생태를 그리는 것이다. 꽃이 아닌, 생명을, 생태를 어떻게 그릴 수 있는가. 암시다. 예술은 암시의 기술이다.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것이며, 그려진 것을 빌려 미처 그려지지 않은 것, 때로 그릴 수도 없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관념적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암시하는 것이다. ● 그렇게 작가는 춤추는 선들을 빌려 춤추는 자연(성)을 그리고, 자연과 자연, 존재와 존재가 저마다 저만의 방식으로 접속하고 관계 맺는, 그렇게 하나이면서 유기적인 전체를 일구는 네트워크 그러므로 자연의 망(그 자체 존재의 망이기도 한)을 그리고, 뿌리가 뿌리에게, 존재가 존재에게 서로 분유하는, 그러므로 생명을 나누어주는, 아마도 그 자체 생명의 모태라고 해도 좋을 대지의 품을 그려놓고 있었다.

문혜정_자연Ⅰ_종이에 연필_110×229cm_1996
문혜정_자연Ⅱ_종이에 연필_110×210cm_1996
문혜정_움직임Ⅰ_종이에 연필_59×81cm_1989
문혜정_움직임Ⅱ_종이에 연필_59×81cm_1989

이런 드로잉과 함께, 작가의 작업에서 특이한 것이 일련의 사진 작업이다. 전체적으로 회색 기미의 흐릿한, 애매한, 암시적인 분위기가 강한 흑백사진이다. 마치 네거티브 혹은 엑스레이 필름을 연상시키는, 식물과 존재의 보이지도 않는 속을 투과해 보여주는 것도 같은 사진들이다. 사실은 작가가 만든 조형물과 설치작업을 사진으로 기록한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그러므로 기록적인 의미가 강한 사진이지만, 여기에 작가만의 감성을 더해 그 자체 독자적인 사진으로서의 장르적 특수성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실제로도 일전에 그 독자성과 완성도를 인정받아 사진 작업으로 수상하기도 했다. ● 그리고 여기에 또 다른 버전의 작업으로 사진 위에 반투명의 트레팔지를 덮어 중첩 시킨 후, 그 위에 부분적인 선으로 드로잉을 더했다. 아마도 자연의 색감과 질감의 분위기 그러므로 어쩌면 자연의 성정을 또 다른 형식으로 표현해본 것일 터이다. 발터 벤야민은 실제로는 먼 것인데, 마치 바로 곁에 있는 것 같은 감성적 경험을 아우라 곧 분위기라고 했다. 분위기는 말하자면 비현실적인 것, 초현실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것, 관념적인 것을 현재 위로 소환하는 감성적 질감이다. 벤야민은 원래 종교적 이콘(화)을 두고 한 말이지만, 이후 조형과 예술의 미학적 의미를 획득한 말이기도 하다. ● 이처럼 작가는 흐릿한, 애매한, 암시적인 분위기가 강한 사진 작업을 통해, 그리고 어느 정도 드로잉과 회화 그리고 설치를 아우르는 자신의 다른 작업을 통해서도 그 자체 정해진 형태도 없고 색깔도 없는 자연성을, 자연의 생명력을, 항상적으로 이행하는 자연의 운동성을, 존재에 생명을 분유하는 대지의 품성(존재를, 타자를 품어 들이는 성정)을, 생태를, 생명 자체를 표현하고 있었다. ■ 고충환

Vol.20241024d | 문혜정展 / MOONHYEJUNG / 文惠正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