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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관 / 성남시_성남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5:00pm
태평동 빈집 경기도 성남시 태평동 2110번지 (수정구 남문로 143번길 3)
이돈순 작가, 리플레이스 : 생성하는 사물들 - 빈 집, 거주하는 사물들 ● 이번 전시는 여느 전시공간이 아닌 성남의 원도심, 태평동의 한 빈집에서 펼쳐진다. 누군가 한동안 살았었으나 지금은 방치되어 비어 있는 주택 공간을 활용한 전시라 곳곳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문화적 재생공간의 전시처럼 다가오기도 하고 실제로도 몇 번의 전시, 프로젝트로 사용된 공간이지만 시 소유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쓰임이 결정되지 못한 곳이며 이른바 말도 많고 탈도 많다는 도심 재개발의 숱한 논의들이 여전히 진행 중인 공간이라 차분하고 조용한 모습이었음에도 왠지 날 것 같은, 우리 이웃들의 소란스럽고 웅성거리는 목소리들, 그 익숙한 체취들로 살아있는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간의 숱한 삶의 사연들과 세월의 흔적들을 묵묵히 담고 있으면서도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모르는 가변적인 곳이며 그래서 정중동의 묘한 기분마저 들었던 것 같다. 물론 여기에는 바로 이러한 성남 구도심의 살아있는 모습들로부터 비롯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특하지만 지역성, 장소성의 켜와 겹들을 고스란히 살리고 있고 그 숱한 빛깔들을 응축시킨 작가 작업의 묵직한 수다스러움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렇게 전시공간과 작품들이 태생이 같고 서로를 닮아 있어 마치 한 몸처럼 공명하는 어떤 울림들을 엮어내고 있는 것처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이번 전시공간은 그저 작품을 위한 무대, 혹은 배경처럼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들과 끊임없이 관계하면서 스스로 의미를 발산하면서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들이 살아가는, 그래서 말 그대로 '거주'하는 집처럼 다가온다. 작가가 이번 전시의 주요 작업을 '거주하는 사물들'이라 이름 붙인 것도 단순히 우연만은 아닌 듯싶은 것이다. 하지만 전시 속 작품들, 그러니까 작가가 말하는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물들은 비단 집일 수도 있는 전시공간에만 거주하고 있는 것만은 아닐 터, 어쩌면 이들 사물이 태어나 살고 죽어가며 다시 그 모습들을 달리하며 순환, 생성을 거듭하는, 우리의 더 큰 삶의 공간들, 장소로도 확장되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짓으로 엮어낸 곳, 것들의 풍경, 모습들 ● 작가가 주목하는 그 공간, 장소가 바로 성남 원도심, 특유의 변화무쌍한, 혹은 생기 가득한 모습들, 풍경이다. 사실, 이러한 재개발과 관련 있는 구도심, 지역의 공간, 장소성과 연관된 것들은 그동안 많은 작가에 의해 다뤄져 왔고, 또한 이미 많은 쟁점과 논의들이 있었기 때문에 설령 그 바람직한 대안들을 현실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그렇게 특별한 관심이나 접근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시선을 던지면서 붙잡고 있는 성남 원도심의 모습들은 새삼 남다른 의미들과 깊이들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공간성에 진득한 삶의 기억, 의미들을 더하는 장소성 개념으로 접근하여 장소성이 갖는 존재론적인 가치 부여의 측면만이 아니라 혹은 기형적이고 모순적인 재개발과 관련된 정치적이고 제도, 행정적인 면모들에 대한 어떤 비판적인 시선의 차원만이 아니라 이 모두를 포함하여, 사물, 공간, 장소성이 묘하게 얽혀있는 지역에 대한 작가의 치밀하고 섬세한 시선, 깊이 있는 성찰의 사유를 작업들로 풀어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감각적 사유가 향하고 있는 성남 원도심의 모습들, 풍경은 단지 많은 이들의 삶이 자리하는 평면적인 공간, 장소만이 아니라 삶의 온갖 양상들, 시기와 질투와 갈등의 공간이면서도 동시에 협력과 조화, 상생이 이루어지는 역설적이면서도 입체적인 장소이며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며 숱한 어려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생활의 장인 동시에 힘겨운 부침을 반복하는 우리네 이웃들의 고난스럽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엮어온 삶의 생생한 현장에 다름 아니다. 삶의 터전을 성실하게 닦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재개발의 예측 불가능한 기대감과 불안함이 교차하기도 하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위태위태한 조짐도 서려 있는,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며 잠재적인 변화로 가득한 역동적인 공간이자 그렇게 특유의 지역적인 장소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작가는 바로 이곳에 오랜 세월 살아가며, 아니 함께 겪어오면서 이렇게 온갖 삶의 켜와 층들이 복잡하게 서로 얽혀있는 이 지역의 독특하고 모순적인 양상들을 구체적이고 치열하게 관찰하고 감각, 사유하며 그 예술적 변화 가능성을 주목하여 '곳의 풍경'이자 '것들의 모습'이라 할 만한 지역의 이미지, 양태, 물성, 질감들을 꾸준히 기억하고 수집해 왔다. 그리고 이를 작가적인 '짓의 행위들'로 엮어내어 작업으로 구현해 왔고 때로는 이러한 지역의 현안들에 미술적 실천으로 직접 접근하고 개입하는 작업들,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했다. 눈길을 끄는 점은 이러한 성남 원도심이 가지고 있는 지역의 장소성을 함께 형성하는 것들, 곧 저마다의 각기 다른 운명들로 살며 죽어가며, 다시 순환, 생성하는 사물들의 존재, 모습들을 주목하고 이를 작업으로 (재)배치하여 구현해 왔다는 점이다. 지역의 장소에 대한 기억, 이미지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함께 공존하며 독특한 장소성을 만들어 가고 있어 마치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은 이들 사물이 갖고 있는 오롯한 생명력을 각별하게 주목하고 배려해 온 것이다. 작가가 사물성이라 말한 것들일 것이다.
이를 이번 전시에서 '거주하는 사물들'이라 명명한 작업 속에서 우선적으로 접하고 확인할 수 있다. 성남 구도심, 일상의 풍경, 모습들을 엮어내고 있는 각종 생활 사물, 이동수단들, 잡동사니 같은 시설과 장치들, 각종 문구, 꽃과 동식물들, 쓰레기들, 재개발의 현장들, 그리고 그 사이, 틈새의 시간의 흔적을 담고 있는 갖가지 것들을 316개의 이미지로 정리하고 이를 다시 탄천 등에서 버려진 폐목들을 주워 힘들게 가공, 그 단면에 인화하여 설치한 작업이 그것들이다. 작가가 오랜 시간 주목하고 관찰하며 각별한 애정을 갖고 수집하여 재구성한 지역의 살아있는 사물들, 모습들인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이미지만, 혹은 재활용시킨 물성으로만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과의 대화, 생활 소음들을 담은 사운드, 그리고 이 과정에 작가의 삶, 세상에 대한 단상, 사유들이 일기처럼 담겨 있는 텍스트로도 펼쳐낸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생활과 분리되지 않은 삶이자 작업 그 자체이기도 하고 지역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장소성을 향한 작가의 치열하고 세밀한 사유, 감각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여기에 힘겨운 작가적 노동이 더해진, '것'이자 '곳'이며 예술적 실천에 다름 아닐 작가 고유의 '짓'이 결합된 것이 아닐까 싶다. 서로서로가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작가에게 있어 '것들', 사물성은 단순히 세상 속에 널브러져 자리하는 대상, 한갓된 사물들로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우여곡절 많은 생활과 부단히 영향관계를 주고받으며 공존하며 함께 삶의 장소성을 만들어가는 생기 있는 사물들이라는 면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에 남다른 시선들로 이들 사물이 우리의 생활에 부여하는 활력들, 삶의 터전인 특유의 장소성을 만들어 가는 측면들을 관찰하고 이를 정성껏 기억, 수집하고 재배치하려 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자칫 소외되어 그저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과 존중이 있다. 이러한 각별한 관심과 태도가 이들을 우리와 함께 살아가며 생기와 활력을 더하는 생성하는 사물들로 거듭날 수 있게 하지 않았나 싶다.
얽힘과 겹침, 혹은 시간성의 숙성, 그 두께들 ● 하지만 작가의 작업들은 단지 이러한 사물들이 공간 속에서 인간들과 관계하면서 장소성을 만들어내는, 얽혀있는 양상, 궤적들로만 자리하지 않는다. 서로서로 부딪치며 복잡하게 연결되고, 뒤섞여 있는 평면적인 얽힘의 아상블라주(assemblage) 차원 못지않게 시간의 흐름을 더하며 중첩되고 겹쳐지면서 또 다른 변화, 생성으로 거듭나는 동적인 시간의 두께마저 더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진득한 존재감을 발산하는 삶이 그러하듯, 이를테면 삭히고 숙성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사물들, 작업들 속엔 시간의 층들마저 켜켜이 자리하여 그 깊은 존재감을 발하고 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작가 역시 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데, "녹슬고 빛바랜 사물의 표면은 그 숙성의 세월만큼이나 치열한 삶의 흔적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때 사물은 감각의 피부와 지각의 통로를 따라 깊숙한 사유의 길을 열어 준다."(230705, '폭발'하는 사물들, 거주하는 사물들, 2024, 텍스트 작업 중에서) 이러한 면모는 곳곳에서 확인된다. 전시 공간 자체도 세월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이전 프로젝트의 남겨진 작업들, 그 시간의 층들을 자연스럽게 놔두고 있고, 작가의 작업들도 오랜 세월, 지역에서의 삶으로부터 숙성되고 발산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번 전시에서 '사물의 시간'이나 '시간의 두께' 같은 작업은 시간성 또한 작가, 작업의 주요한 관심이며 화두임을 분명케 하는 것들이다. '사물의 시간'의 경우 작가의 관심과 접근이 단순히 지역의 사물들을 관찰, 수집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폐기 처분되어 사라졌을 수도 있는 낡은 의자의 오래된 존재감, 사물성을 작가의 주요 작업인 못 작업과 결합해 보여주고 있고, '시간의 두께'도 버려진 맨홀 뚜껑이 갖고 있는, 마치 삭힌 것과도 같은 형태, 물성을 배려한 최소한의 못 작업과 바탕 작업을 더해 고스란히 살려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앞선 작업이 사물이 가진 시간성에 대한 작가적 관심과 존중을 드러내려 한 작업이라면 뒤의 작업은 그러한 시간성이 켜켜이 가지고 있는 두께 자체를 가시화, 형상화한 작업으로도 읽힌다. 그리고 '거주하는 사물들'에서 지역의 이미지들을 담지하고 있는 폐목들도 이미 저마다의 세월의 부침, 풍파 속에서 상처를 머금은 존재들이고 이를 나이테의 형태로 새겨 담고 있는 것들이기에 이러한 느낌으로 다가온 원도심의 모습과 닮아 있기도 하여 작가가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러한 오래된 사물, 혹은 시간성의 켜들이 중첩된 장소성에 대한 것들은 단순히 작가적 선호와 취향만은 아닐 것이다. 공간의 문제를 삶의 시간이 축적되어 변화무쌍한 변화, 생성으로 거듭나는 장소성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고, 그러한 과정, 곧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각각의 사물들이 변태, 변성되는 이미지, 형태, 색감, 질감, 냄새 등의 미세한 감각적인 변화들은 물론 이들 사물이 세상과의 복잡다단한 관계 맺음 속에서 갖게 되는 존재론적인 면모들을 주목하고 성찰하려는 작가에게 있어서 시간의 흐름, 시간성의 차원은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주하고, 생성하는 사물들은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세월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것들이며 설령 부패되어 사라진다 해도 성장하면서 익어가듯 삭혀지는 그런 존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의 이치가 그러하듯 세상, 사물들 또한 그렇게 또 다른 모습들로 길고 긴, 순환을 거듭할 것이다. 그렇기에 전시의 전체 제목인 '리플레이스'도 단순한 자리바꿈, 대체의 차원이 아니라 좀 더 역동적이고 생성적인 의미들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힘겹고 공들인 특유의 작업 과정을 통해 숙성시켜 그 밀도와 강도를 높인, 지극히 미적이고 예술적인 행위들이기 때문이다.
사유의 감각들, 혹은 감각된 사유들 ● 그 때문이었을까,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작업들은 성남의 원도심에서의 작가의 오랜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작가의 이전 주요 작업들과도 궤를 같이하고 있는데 마치 자라나고 있는 것만 같기도 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작가가 기획하고 참여했던 지역을 기반으로 한 이전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들과도 연장선상에 있는 것도 같다. 그렇게 작가적 삶에 많은 것들이 집적되어 있고 작가의 세상에 대한 간단치 않은 사유와 담론들이 드리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구체적인 감각들로 응축되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서로를 관계하면서 영향을 주고받기에 얼기설기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와 지역, 장소성이 갖고 있는 복잡하고 유동적인 속사정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정돈되고 차분한 느낌의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수다스러운 웅성거림으로 가득 찬 전시 같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전시 자체가 지역의 장소성이라는 갖가지 맥락의 켜들 속에서 작동하는, 다기한 사물성이 부딪치고 충돌하면서 해체되고 생성하는 격동적인 장처럼 다가온 것이다. ● 어쩌면 이러한 느낌들은 전시의 전체적인 맥락이나 의미들 이상으로 개별 작품들이 갖고 있는 구체적인 면모들로 인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거주하는 사물들'의 경우 지역의 복잡한 장소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 못지않게 각각의 이미지들, 그 흔적들이 담고 있는 평범하지만 낯설고 기이한 모습들, 그리고 이들 이미지가 이질적으로 공존하면서 (불)협화음을 발산하는 데에서 전체적으로 전해지는 묘한 감각들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각각의 이미지와 모습들, 존재들이 서로를 촉발하면서 엮어내는 익숙하지만 기묘한 느낌들 자체, 그리고 폐목으로 현상, 설치된 이들 사물이 지역의 장소성과 다시금 묘하게 서로를 닮을 수도 있다는 생각 속에서 발현되는 어떤 사변적인 쾌감들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느낌들은 앞서 말한 시간의 흐름을 가시화시킨 '사물의 시간'이나 '시간의 두께'에서도 다시금 변주되며 작가의 이전 주요 작업이라 할 수 있는 못 작업을 발전시킨 '플라스틱 도시'와도 비슷하지만 또 다른 느낌으로 연동된다. 곳곳에서 모아낸 플라스틱을 못으로 정성껏 변형시켜 이를 지역의 풍경으로 형상화시키고 여기에 지역의 버려진 산물이자 모순적인 시선과 의미를 담고 있는 방범창을 덧댄 이 작품 역시 지역 특유의 복잡한 장소성에 대한 작가의 오랜 고민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폐기되고 버려진 각각의 플라스틱을 못으로 재생, 재활시켜 반짝이는 물성으로 군집을 이루는 이들 형태는 우리네 삶이 그런 것처럼 미약하지만 또 다른 존재감으로 거듭나는 존재들이며, 혹은 픽셀들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어떤 구상적인 형태들을 갖고 있지만 마치 추상의 그것처럼 응축되어 모호하게 보이기도 하는데 이렇듯 가시적이거나 비가시적인 것들을 다시, 내 외부를 가르고 구분하여 막고 있지만 투명한 방범창을 통해 보이게 함으로써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시선의 차원들을 복합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그토록 많고 깊은 성찰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결국 작업으로도 그 모든 것들을 구현하는 존재임을 다시금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대목들이다. 물론 그 역(逆)이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작가적 존재야말로 세상의 것, 곳들에 대해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섬세하고 내밀하게 사유하는 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전시 공간 곳곳에서 결국은 구체적인 작업의 감각적인 작동들로 작가가 그동안 살며 관찰하며 모으고 재배치, 구성하여 형상화시킨 지역성, 장소성, 사물성이 다양하게 변주되면서 순환되고 있다. 정돈되거나 흐트러진 모습으로, 혹은 우연하고 낯선 만남으로 이 사물들, 작품들의 수다스러운 의미와 목소리들이 (불)협화음처럼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빈 집이었기에 그 울림이 더욱 선명하게 가시화되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 무언가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 또 다른 순환으로 거듭날 수 있는 생기 있는 존재감으로 다가오는 것만 같다.
전시 중 폭우가 쏟아져 빈집 옥상에서 고인 물이 2층으로 새어들어 영상과 겹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작가는 이러한 변칙적 사태조차 빈집 안팎에서 동시에 울리는 비행기 소리나 이웃집 그라인더 소리처럼 전시와 비전시 공간을 구분할 수 없는 일상의 공감각적 체험 속에 융합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생태/환경, 모두를 위한 공공미술 ● 이러한 작가의 접근, 태도들 속에는 비단 개인적인 의미로 국한되지 않은 오늘을 살고 있는 작가적 존재론, 혹은 미술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 또한 찾아볼 수 있지 않나 싶다. 스스로의 작가적 삶과 무관하지 않은 지역의 장소적인 의미를 성찰하고 그 속에서 우리와 부단한 관계성으로 자리하는 사물들을 한갓 대상, 사물로 전락시키지 않고 인간과 동등하게 공존, 상생하는 사물성의 가치로 존중하여 이를 미술로 구현하고자 함은, 다시 말해 인간과 사물, 비인간, 자연이 공존하는 세상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비단 그 비대칭적 관계들로 발생하는 기후 위기, 환경 재앙에 대한 반대급부와도 같은 지금 시대의 숱한 담론, 사상들의 유행과도 같은 흐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미술 스스로 그러한 우리 삶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한복판 위에 존재해야 하고 그로 인해 힘겹고 미약할 수도 있겠지만 단단함으로 거듭날 수 있는 일정한 역할들을 수행함으로써 미술의 위기, 혹은 무용론조차 거론되고 있는 이 시대에 그 존재론적인 당위성을 증거해야 하는 것은 미술의 오래된, 하지만 여전히 담아내야 할 가치이자 지향이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의 작업이 이렇듯 거창한 무엇들을 막연하게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스스로의 삶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 할 수 있는 생활공간, 삶의 장소와 작업을 결합하고 삶과 세상에 대한 치열한 성찰 못지않게 그 구체적이고 내밀한 감각들로 작동하는 개인 작업으로 자리하면서도 사회적이고 공공적인 역할 또한 수행해 온 미술이기 때문일 것이다. ● 결국, 작가가 그려내는 사물의 세계는 인간과 비인간, 사물들이 서로 뒤얽히며 부단히 사건과 효과가 현실화하는 장소성을 발휘하는 것, 곳이고 인간과 비인간의 위계가 깨진 장이라는 면에서 그 상생, 공존을 추구하며 함께 생기를 만들어가고 느끼는 세상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우리를 둘러싼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음을 가시화시키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제인 베넷이나 티머시 모턴이 말한 것처럼 이렇게 서로 다른, 이질적인 사물, 요소들이 상호 연결되고 약동하는 것으로 보는 것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환경을 향한 것이며, 생태학적 사유이며 감각이기도 할 것이다. 혹은 또 다른 의미에서 공공미술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작가에 의해 발견, 수집, 재배치, 형상화시킨 사물들이 빈 집에 거주하여 우리에게 생생한 사건으로 조우케 하고 의미를 생성하듯 이러한 노력은 결국 지역의 공간성, 삶의 장소성을 살리려는 미술, 공공미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사적인/공공적인 미술의 제도적인 구분조차도 별반 의미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작가가 스스로의 작업, 행위들로 지역에 어떤 생기, 활력을 더하려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 이번 전시의 1층과 2층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맨드라미 배'는 작가가 이전 공공미술 프로젝트인 '천의 마을-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수행한 '맨드라미 길-맨드라미 배'의 모습을 재차 확인케 하는 작업이다. 골목길 콘크리트 틈새와 주택 옥상에 맨드라미 씨앗을 뿌리고 그 성장의 모습들을 지역민들과 함께하려 한 이전 프로젝트는 그 자체로 지역의 생태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화단 조성이나 조경 작업은 아니어도 지역에 살아있는 생기를 더하려 한 작가적 고민과 태도를 엿보게 한다. 척박한 도시 환경에 무작위로 뿌려졌기에 강한 생존력을 지닌 맨드라미조차도 모두 잘 자라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일엽편주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지역민들처럼, 혹은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 해를 넘겨 살아남은 맨드라미들에 더해 새로 이식된 백일홍들과 작은 새싹들이 오밀조밀 상생, 공존하는 모습들을 소박하지만 의미심장하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삶이기도 할 모습들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지역의 풍광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닐지라도, 그리고 지역의 많은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작고 미약할 수도 있겠지만 생기와 온기를 담은 모습들로 우리의 단조로운 일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잠재적인 가능성으로 자리하는 그간의 작가, 작업들과 궤를 같이함은 물론, 앞으로 자리할 이후의 작가, 작업의 의미들마저 상상케 하였기에 은근히 눈길을 끌었고 의미심장하게 와닿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앞으로도 더욱더 자라나고 무르익어 우리의 삶에 생기와 활력을 더하는 작가, 작업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응원해 본다. ■ 민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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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41011k | 이돈순展 / LEEDONSOON / 李敦淳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