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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퍼포먼스 / 2024_1005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토요일_12:00p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와이아트 갤러리 YART GALLERY 서울 중구 퇴계로27길 28 한영빌딩 B1 3호 Tel. +82.(0)2.579.6881 www.yartgallery.kr blog.naver.com/gu5658 @yart_gallery
삼매三昧의 언저리 ● 작가는 사바아사나를 이렇게 말한다. '죽음과도 같은 깊은 휴식을 취하는 자세이자 요가수련 8단계 삼매와 가장 가까운 자세' ● 요가에서는 8단계의 사마디 samadhi를 삼매三昧라 하며 해탈, 깨달음의 경지, 만족의 상태로 완전한 자유이며 인간의 의지가 아닌 저절로 얻어지는 경지이다. 무의식 상태가 아니라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이 하나로 묶여있는 합일 상태가 '삼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삼매'는 절대적으로 정신으로부터 몸으로 이어지는 지각知覺의 총체를 말하는 것이며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몸의 지각과 지시를 받아들이는 몸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새삼 메를로 퐁티를 소환하지 않아도 내 살(chair)을 꼬집는 내 살(chair)의 지각이라는 것은 관성慣性이 되고 또 이 관성을 제어하려는 정신이 개입되니 내 몸 안에서 벌어지는 이 각축이라는 것이 결국 작가의 드로잉drawing으로 나타난다.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이 징후적이며 수행적인, 지시적이며 부조리한, 불확정적이며 우연을 인정하는 나타남의 그림을 구태여 그림이라 말하는 것이 불경하지는 않을까? 고민했지만 무엇이면 어떠하리. 결국 작가는 삼매三昧의 언저리에서 서성이는 한 수련자이며 작가일 뿐, 작가는 왜 이렇게 어려운 지점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것일까?
비장미悲壯美 ● 아마 작가에게 요가수련이 없었다면 작가가 다시 작업의 세계로 컴백하기가 어려웠을 수도 있다. 수련이라는 수행적 명상이 축적된 '쉼'의 에너지를 만든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그럴 수 있다고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작가는 육아와 돌봄이라는 삶과 현실적 세계에 머물다가 작업에 대한 '잠시 멈춤' 에서 '다시 시작'의 스위치를 켰다. 동시대성이라는 것은 폭풍처럼 불어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다변의 장소(성)이다. 작가는 '잠시 멈춤'의 시공간에서도 늘 요가 수련만은 놓지 않고 수련과 명상, 사유와 성찰의 레이어를 쌓았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작업에 대한 사고의 수없는 변곡점을 만든 듯하다. 열망과 좌절사이의 오기와 끈기, 그리고 어쩌면 작업은 무엇이고 예술은 무엇이고 또 삶은 무엇인가? 와 같은 풀리지 않는 문제와 풀지 않은 숙제를 떠안고 매일을 살아냈다. '살아냄'의 성찰이라는 것은 '살아감', '삶'의 결과 값 같은 것이다. 오롯이 자신의 육체를 구기거나 펴내고 몸의 균형을 잡아가면서 떨리는 살(chair)의 경험으로 작업의 테제(These)를 전환한다. 컨템포러리와 비장미悲壯美는 어딘지 언밸런스하다. 돌아온 탕아蕩兒처럼 환대와 격려가 필요하지만 동시대의 예술씬은 냉정하기만 하다.
수상한 아이러니 ● 작가는 이미 작정을 한 모양이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하다. 요가수련이라는 것이 예술의 정진과 다르지 않음을, 그로 인하여 태도를 구축하기 위한 수행이라는 것이 결국은 오랜 퍼포먼스가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결국 다시 삶을 향하고 있다는 것 까지도 어느 사이 알게 된 듯하다. 그리하여 그리는 것이 그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일련의 퍼포머티비티(performativity)가 된다는 사실을. 그래서 흐트러진 원과 정돈된 원, 모여진 원들의 층위가 쌓여 어느 사이 블랙홀처럼 알 수 없는 미지의 이미지가 된다 한들 그것은 한 점의 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까지. 구태여 양손과 양발을 사용하는 행위는 잘 그리는 것을 포기한 대신에 얻은 잘 사는 법에 대한 질서의 구축이다.
대나무 숲 ● 작가의 이번 작업 중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바로 등으로 그린 그림이다. 시각적으로는 눈과 가장 먼 등 뒤를 종이에 접촉하면서 등 구르기를 반복하는 동작에서 나타나는 이 흔적적 그림들은 등뼈의 형태적 지시가 발생하면서 마치 대나무 숲처럼 표현되고 있다.
전우치 ● 한 번 구르면 대나무 한 그루가 그려지고 열 번 구르니 숲이 만들어 진다. 여우의 둔갑술을 닮은 이 드로잉들은 그래서 묘기 묘술 요술적이다. 전우치는 풍경이 그려진 그림에 갇혔다가 그림에서 다시 튀어나온다. 이제 작가는 대나무 숲 정도는 몸을 굴리는 신공으로 그려낼 수 있다. 그리고는 그 대나무 숲 앞에 서서 대나무 숲 안으로 들어가는 신공을 수련할지 모른다. 대나무 숲 안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 안에 삼매三昧가 있든 사바아사나(Sava-Asana)가 있든 제발 무던하길 바랄 뿐이다. (생략) ■ 김월식
미대를 졸업하고 작가를 꿈꾸던 한 여성인 나는 취업, 결혼, 출산, 육아를 겪으면서 경력이 단절되었고 어려서부터 해오던 요가는 생업의 수단으로 또 심신수련의 수단으로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작가활동은 단절되었어도 예술에 대한 사고의 단절은 없었기에 다양한 작업을 혼자서 시도하고 수정하기를 반복하며 주어진 상황과 제한된 시간 안에서 자력으로 실현 가능하고 지속 가능한 작업으로 조금씩 변화되어왔다. ● 오랜 시간 예술에 대해서 고민하고 매일 요가를 수련하면서 '행해지지만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매일 하는 설거지나 청소, 요가수련 등 반복되는 행위, 필요하지만 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운 행위. 존재하지만 사라져버리는 것들. 내 몸의 기록들. 내 사유의 기록들. 미대를 졸업하고 개인전 한 번을 하지 못했지만 항상 머릿속엔 작업에 대한 생각이 멈춰있었던 적이 없었는데 그럼 나는 예술을 하지 않은 것일까? 이것을 어떻게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보여줘야 할까? ● 눈으로 보지 않고 몸으로 그리는 그림이 신체적 제약과 만나면서 형태가 만들어지는 작업을 사유가 빠진 신체의 드로잉이라고 해도 그 안에 작가의 미의식과 형태에 대한 의도가 전혀 들어있지 않을 수 없고, 잘 단련된 신체는 보지 않고 그린다고 하더라도 의도한 생각과 비슷한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체력적 한계로 완벽한 형태나 똑같은 작업이 나올 수 없다. 이는 삼매에 이르기 위해 매일 요가수련을 해도 해탈에 이르지 못하고 인간계 중생에 머물고 있는 내 모습과도 같다.
요가드로잉 작업들은 단순한 몸의 움직임과 재료와 평면이 만난 우연적 결과물이 아닌 작가의 미의식이 오랜 시간 단련된 신체의 움직임과 깊은 사유가 드러나길 바라는 의도된 형태와 몸의 한계로 인해 나타나는 우연적 표현들이 서로 조화를 이룬 결과물이다. 마음과 몸, 이성과 비이성이 만나 끊임없이 섞이고 충돌할 때 그 순간들의 축적이 예술이 아닐까? ● 이번 전시는 오랫동안 예술에 대한 고민과 요가와 미술을 접목시킨 결과물을 작품으로 보여주는 첫 시도가 될 것이다. 또한 '몸의 언어'라는 화두를 던져보고 싶다. (생략) ■ 루시다
□ 전시 프로그램: 루시다 요가 드로잉 미술관에서 요가를! 요가가 미술이 된다고? - 일시: 10.13(일) 오후 2시 ~ 오후 3시 30분 - 장소: 와이아트갤러리
Vol.20241005b | 루시다展 / Lucida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