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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4_1002_수요일_05:00pm
주최,주관 / 안민욱 후원 / 평택시_평택시문화재단 협찬 / 교차공간818_BS컨텐츠_BT그룹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교차공간818 Space Gyocha 818 경기도 평택시 평택로57번길 12 2,3층 @gyocha_818
공간삼리 Space 3RE 경기도 평택시 통복로32번길 77 1층
이름-없음 □ 존재-있음 ● 안민욱은 이번 전시를 소개한다. "존재하지만 부정(不定)하다는 믿음에서 존재를 부정(否定) 당하는 장소와 사람들이 그러한 익명성에 기대어 유지되는 모순적 상황"에 대한 지역 연구 작업이라고. 이는 그의 관심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평택은 '한 다리만 건너면 누구든 다 알 수 있다'는 말을 흔하게 하는 지역이다. 그러한 평택에도 익명의 공간이 있었으니, 바로 쌈리다. 주변에 만날 수 있는 여느 평택 사람들은 이곳에 누가 있는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들 말한다. 안민욱은 이름이 없는 이곳에서 알 수 없지만 실존하는 존재를 확신하고 그것에 다가가려 한다. 이번 전시에서 그가 존재를 입증하는 방식은 몇 가지 구조와 작용을 통해서인데, 거울과 반영구조, 드로잉과 회전운동, 도미노와 연쇄작용 등의 구조적 장치와 그 작용들이다. 이는 작가가 쌈리를 접하고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가장자리에서부터 작업을 진행하면서, 접할 수 있는 이곳의 공간적 구조와 건축적 조건, 즉 겉을 감싸고 있는 물리적 표피를 작업에 끌어들여 잠재된 모순과 모호한 감정의 진폭을 구조화한 결과물이다.
영적 드로잉∥잉로드 적영 ● 「영적(暎赤) 드로잉」(2023)은 쌈리라는 장소와 특이한 공간을 처음 접했을 당시 작가가 느낀 낯설고 불편한 감정을 드로잉의 수행과정으로 구조화한 작업이다. 이 작업은 붉은 빛이 비치는 한지 드로잉 판 위에 관객들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남기는 관객 참여 작품으로, 관객들은 한지가 찢어질까 아슬아슬해 하며 흔적을 남기는 과정을 수행해야 했다. 신작 「잉로드 적영」(2024)은 이렇게 작업한 「영적 드로잉」이 거울에 비쳐 반영된 구조로 의도하여 제작한 것이다. 거울에 반사된 형태로 제목을 짓고 다시 관객이 드로잉에 참여하도록 요청한다. 「영적 드로잉」을 설치했던 벽에 거울이 있고 작품 사진을 찍을 때마다 유리창을 통해 반대편이 비치곤 했다. 이렇게 집결지 거리를 비추는 반사된 이미지는 순간순간 시야에 들어왔다. 안민욱은 작업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확인되는 거울과 유리가 많은 이곳의 인/아웃테리어의 재질과 물질적 특성을 새로운 창작의 제1의 참조물로 삼았다.
회전 드로잉 ⊗ 수평 도미노 ● 「영적 드로잉」은 신작 「회전드로잉」시리즈(2024)로도 이어진다. 영적드로잉에서 추출한 도형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배열하여 화면을 구성하였고, 이렇게 구성된 드로잉 캔버스는 회전 가능한 상태의 평면작업이 된다. 안민욱에게 회전운동은 대상의 위/아래를 뒤집고 기존의 고정된 이미지를 흩뜨리고 흔드는 움직임이다. 흔들어버리는 회전 운동은 예술가의 무대이자 놀이터인 전시장에서 그가 보다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그리고 조형적으로 이곳의 구조에 개입해 볼 수 있는 방법이다. 또 다른 설치작업 수평 도미노는 이곳의 구조가 일으킬 수 있는 연쇄 작용의 가능성을 함의한다. 도미노는 연이어 세워진 토막들 중 하나가 쓰러지면서 다음을 건드려 순차적으로 무너지는 연쇄작용을 한다. 집창촌의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있는 구조로 인해 화재에 취약하다. 안민욱은 쌈리의 한 지점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여기 불이 나면 삽시간에 번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연쇄작용을 일으키는 도미노 현상을 떠올렸다고 한다. 표면에서 목격되는 구조와 형상이 회전 드로잉 시리즈와 수평 도미노 작업에서 새로운 연결과 구성을 이루면서 메아리처럼 진동한다.
돔 → 성( )스러운 ● 회전 드로잉과 수평 도미노를 거쳐 익명의 공간에 잠재된 모순과 모호한 사유의 구조적 장치들을 지나, 이번 전시에서 종국에 다다르게 되는 곳은 돔 형태의 파빌리온이다. 돔이라는 건축 양식은 전시 제목에서 '이름 없는'이 가리키는 것이 '성saint'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작가는 성이 어느 하나를 의도했다기 보다는 여러 의미(城 castle, 姓 sex, 聖 saint)로 읽힐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같은 음을 가진 어휘들의 느슨한 연결성과 관계없는 것들의 우연한 만남을 드러내며 관객들의 직관적 선택을 제안하는 듯 하다. 동음이의어에 의한 개연성 없는 우연은 어쩌면 생각지 못하게 그럴 듯한 개연성과 가공의 연합을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돔이라는 성스러운(?) 공간을 마주한 누군가는 각자의 의미 회로를 돌려야 할 것 같다. 내가 그 회로를 돌린다면, 돔이라는 공간은 성이 가진 여러 의미를 떠올리면서 그 어휘들을 회전시켜 그 의미를 뒤섞거나 도미노처럼 연쇄 작용을 일으키는 곳일 수 있겠다. 작가는 돔이라는 형태는 신이라는 존재가 실제로 있을 것만 같은 공간적 경험을 주는 곳이라 말한 바 있다. 즉, 그것은 신성함이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눈앞에 보이는 공간 구조를 통해 실체화되어 경험되고 감각된다는 것이다. 이번 작업은 보이지 않고 이름 없는 익명의 곳에서 공간의 물적 표피를 쫓아가며 실체와 존재에 다가가는 안민욱의 분투로 보인다. 보이지 않는 것과 존재하는 것 사이에서 그러한 분투는 난해한 일이다. ■ 이정은
당신의 잊혀질 자유와 비뚤어지게 추는 춤 ● 기억의 권리 같은 것이 있다면 망각의 권리 또한 존재해야 마땅하다. 움켜잡고 다시 불러 세우면서 놓지 않으려는 몸짓이 필요한 것처럼 풀어주고 밀어내고 작별을 고하는 몸짓, 네가 누구였는지 다시는 떠올릴 일이 없다는 듯 잊어주는 몸짓 역시 필요하다. 기억하는 것과 망각하는 것을 의지의 추 위에 올려 달아본다면, 비참하게도 기억의 압도적인 승리다. 기억은 돋우 세울 수 있고 되새김질 할 수 있지만 망각은 꾹꾹 눌러 싸매고 깊이 파묻어 놓아도 불현듯 튀어나와 기억에 들러붙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기억이 결연한 의지의 일이라면 망각은 의지가 무산되는 절망의 일이다. 더욱이 그것이 여성과 벌거벗음에 관련된 일이라면. ● 안민욱 작가의 개인전 「이름 없는 성 An Anonymous Saint』은 '쌈리'라는 장소에 새겨진 이름들을 '지우기'와 '놓아주기'에 관한 전시다. 안민욱 작가는 은밀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나 장소적 특성들에 개입해 기존의 관성이나 관행, 기능, 작용 등의 틈새를 벌리고 비틀어 내는 작업을 해왔다. 혁명이나 전복보다는 위트와 아이러니가 그의 주된 작업 코드였으며, 정치가나 철학자의 두뇌가 아닌 희극배우나 마술사의 지략이 그의 방법론이었다. 그런 그에게 평택 지역의 흑역사를 상징하는 쌈리의 전시 공간들은 그 폐허성의 화려함과 세속적인 무게감으로 인해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위와 깃털을 동등한 무게로 셈할 수 있는 그의 능란한 기술은 자신의 특기인 경쾌한 유머를 끝까지 밀어붙임으로써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감각을 보여주었다. ● 쌈리는 평택역 오른편의 기찻길 담벼락을 끼고 있는 동네인 삼리를 비하적으로 칭하는 멸칭이다. 일사늑약이 체결되던 해인 1905년에 보통역(현재의 평택역)이 들어서면서 평택이라는 도시가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쌈리의 본격적인 역사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시작된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평택 지역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미군기지인 캠프 험프리스(Camp Humphreys)와 오산 공군기지인 K-55가 위치해 있다. 전쟁이 남긴 폐허에서 미군기지는 그 지역 경제를 미군들에게 의존하게 만들었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집창촌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게 되었다.
김희식에 따르면 쌈리는 신장리나 안정리의 기치촌과 달리 내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집창촌이었다.1) 이는 평택의 지리적 위치가 산업화의 붐을 타고 각 지역의 대규모 공사현장으로 이동하는 철새 노동자들의 중간 거점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쌈리는 내국인을 상대로 하는 사창가 상당수가 1970년대 폐쇄되었을 때도 건재했고, 요식업과 접객업, 즉 술집과 카바레와 여관이 마구잡이로 생겨났던 88올림픽 특수를 기점으로 90년대 말까지 폭풍 성장을 했다. 업소 전면을 통유리로 열어내고 붉은색 조명과 등받이가 없는 높은 좌석의 바(Bar) 의자가 있는, 오늘날 집창촌의 상징이 된 '유리방'이 이곳 쌈리에서 유행한 것이 서울 지역과 거의 동시적이라는 점도 이곳이 경기 남부 최대의 성매매 집결지였음을 반증한다. ● 하지만 모든 몰락하는 것들의 운명이 그렇듯 쌈리 또한 2000년대 초반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핵심 계기는 2004년 성매매방지특별법이다. 이 법의 시행 이후 정부와 지자체, 지역주민들은 집창촌을 불법과 인권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폐쇄와 철거, 갱생의 공간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집창촌이 불결 혹은 타락이라는 수식어와 맞물려 일종의 게토화된 공간으로 존재한 것은 오래전부터이다. 그럼에도 명백하게 이 공간은 한국이라는 국가가 작동해 온 방식, 즉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와 불도저식 산업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취약한 이들의 생계였고, 그곳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것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효과로 인해 지역사회 안에서 묵인된 채 공존해 왔다. ● 묵인의 시선이 그나마 공존의 감수성을 내포하는 것이라면 불법과 인권의 논리는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특히 인권이라는 고상한 윤리적 감성은 성매매 종사자를 피해자로, 치료가 필요한 대상으로 만듦으로서 이들의 가난과 삶의 분투, 자존감과 희망들을 송두리째 부정한다.2) 인권이 권리 부여가 아닌 박탈이 될 때, 권리 없는 자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은 타인의 자비 뿐이다. 자비는 윤리적 선함이라는 그 매끄러운 표면에도 불구하고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수직적 위계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계급적이다. 동시에 그것은 동등성의 권리를 거부하고 자신의 몫으로 편취한 자가 보다 많은 이익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철학인 신자유주의에 꼭 들어맞는다.3) 2000년 이후 치솟는 집값과 도시 개발 열풍 속에서 집창촌을 대하는 정부와 지자체, 지역민심의 대응이 법과 인권을 빌미로 도시미화와 재개발을 통한 지역 이익의 극대화, 즉 부동산적 관점에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집창촌에서 브랜드 아파트 단지로, 혹은 지역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관광거리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이 과도기적 이행 속에서 예술은 일종의 해독제로 투입되어 왔다. 보존이냐 개발이냐, 자발적인 참여냐 타율적인 강제냐 하는 과제들이 산재해 있지만 중요한 점은 예술이 그 틈새에서 이곳의 몰락을 가시화하고 가속화하는 촉매제로 기능한다는 점이다.4) 쌈리에 새롭게 들어선 예술공간과 그곳에서 펼쳐지는 예술가들의 활동들이 이 지역의 당사자들과 지역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미래를 예고하는지는 그런 점에서 굳이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문제는 오늘날 지역 속으로 들어가 그곳의 장소성과 경험들, 관계들에 개입하는 예술활동이 바로 그 예술을 호출한 기관이나 관계자의 의도-업소들의 조속하고도 완전한 폐쇄-에 포섭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예술가 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외부자로서의 한계뿐만 아니라 그 장소의 정체성을 자신의 것으로 포획하고자 하는 유혹과 싸워야 한다. 서울의 마지막 성매매 집결지라고 알려진 '미아리 텍사스'에서 진행된 「더 텍사스 프로젝트』나 전주 선미촌의 「서노송예술촌 프로젝트』 등 과거 집창촌의 예술활동이 그 지역 종사자들과 갈등을 일으켰던 이유는 예술이 윤리적 올바름이라는 포장지를 감싼 채 관음증적 욕망을 투사하는 경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근대 예술에서 부르주아의 누드화가 벌거벗은 여자의 선정적 몸짓이나 직·간접적인 성적 오브제를 통해 관음증의 시선을 창안했다면, 오늘날 그것은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측은함이나 안타까움, 연민이나 배려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때도 붙여야 하는 시선으로 확장됐다. 빈곤이나 질병, 재난 등을 홍보하며 후원금을 모집하는 구호단체들의 광고에 대해 '포르노'라는 명칭을 붙이는 이유는 그것이 한 인간의 존엄성을 외면한 채 그 이미지만을 소비하려 하기 때문이고 이를 통해 기관의 몸집과 자본을 불리려 하기 때문이다.
안민욱 작가의 전시를 말하기 위해 너무 긴 우회로를 통과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것은 어쩌면 쌈리라는 장소의 두께와 밀도가 너무 무거워 작가 자신이 고민해야 했던 작업의 고뇌에 비하면 가벼운 것일지도 모른다. 안민욱 작가의 「이름 없는 성』은,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하면, 보려는 시선도 없고 보이는 자 또한 없다. 시각예술이라는 특성상 이미지를 통과해 가지만 그것은 이곳 쌈리의 역사나 현재적 갈등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이고 직접적 현전을 위트 있게 잡아채는 방식에 가깝다. 바위를 깃털로 셈하기. 둘 사이의 평등성을 구축하는 균형점 찾기. 쌈리라는 재료를 다루는 안민욱 작가의 작업 방식을 정의해 본다면 아마도 이런 표현들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그의 유머는 어둠 속에서 유쾌함을 찾아내고, 몰락하는 것들에서 경쾌함을 발굴한다. 성매매 집결지라는 소재적 유혹으로부터 그가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마술사의 경쾌한 트릭과도 같은 이런 그의 천부적인 유머 감각일 것이다. ● 「이름 없는 성』은 총 세 곳의 공간에서 펼쳐진다. 지금은 공가(空家)가 된 '유리방'의 전시 공간인 공간삼리는 쌈리로 들어가는 골목길 초입에서 있어 내부를 환하게 열고 있다. 이 첫 번째 전시장이 발길을 끈다면 맞은편 건물의 2층(교차공간818)으로 올라가게 되고, 조금 더 욕심을 내면 쌈리 일대의 골목길을 조망할 수 있는 3층 옥상에 도착하는 동선이다. 각 공간은 지금 이곳에 있는 '너'의 개입을 요청하는 참여형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고, 한 층씩 높아질 때마다 앞서와는 다른 장면들과 상황들을 마주하게 설계되어 있다. ● 보이는 것이 아니라 '너'의 개입이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다. 가령 1층 유리방에서 당신은 색색의 드로잉 펜을 들어 '자질구레하고 유치한 담화'에 참여해야 하고, 2층에서는 드로잉의 압출된 이미지로 만든 작품들을 마치 룰렛판을 돌리듯이 뱅글뱅글 돌려야 한다. 전시장 벽면을 타고 길게 도열한 액자들을 차례대로 반복해서 한 손으로 힘껏 내리누르다 보면 어느새 당신의 '비뚤어지게 추는 춤'이 완성된다. 마지막으로 피날레에 이르면 고딕양식의 유럽 성당에서나 들릴듯한 홀리(holy)한 사운드와 만나게 되는데, 제대로 들으려면 사각형의 구조물을 통과해 돔 형태의 투명 플라스틱 지붕을 얹은 육각형 구조물로 들어가야 한다. 그곳에 당도하면 당신은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는 유리방에 머물 때 어렴풋이 들렸던 소리의 출처가 여기였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플레이트 리버브로 스피커를 감싸놓아 의도적으로 사운드의 음고나 음색, 울림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당신이 펼친 퍼레이드의 마지막이 '진정으로 엉성한 미사곡'이라니 얼마나 유머러스한가.5)
하나의 장소가 고유하고 영원하게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은 박물관의 이념이다. '불도저 개발'이라 불리는 새마을 운동을 거쳐 아파트 공화국과 신도시 불패론을 찬양하는 대한민국에서 장소에 대한 애착이나 연대감은 부동산 열풍에 밀려 백전백패를 당해왔다. 대부분 구도심에 자리한 성매매 집결지의 몰락과 해체는 이런 점에서 본다면 주거 보장이나 지원 없이 쫓겨나고 있는 취약계층과 동일선상에 있지만, 불법과 인권침해라는 딱지들로 인해서 보다 혹독한 비난의 시선과 압력들에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십여 년 전부터 예술은 그 과도기적 이행을 중재하거나 촉진하는 행위자로 소환받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예술이 이러한 역할에 대해 어떤 평가를 받게 될 것인지를 묻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일 것이다. ● 다만 안민욱 작가의 「이름 없는 성』이 보여준 경쾌함은 자본주의적 욕망에도 성매매 종사자들의 인정투쟁에도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여성과 벌거벗음에 과도하게 몰입했던 과거의 예술적 실천들과 차별화된 지점을 갖는다. 또한 이름을 호명하고 세기고 기억하는 과거의 방식이 아니라 그것을 가리고 지워내는 안민욱 특유의 소박하면서도 자유로운 유머의 기술은 예술이 정치도 아니고 윤리도 아닌 제3의 자유 지대임을 확고히 한다. 자유는 의무와 대립한다는 점에서 예술적이다. 그리고 자유는 부채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기억이 아니라 망각에 가깝다. 예술의 입장에서 본다면 망각은 기억보다 고난도의 기예를 요구한다. 보기의 기술이 아니라 보지 않기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20세기의 위대한 미학자 벤야민을 떠올려보면, 인류학자만이 아니라 예술가들 또한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의 성향을 갖고 있다. 이미지를 만드는 것 자체가 일종의 기억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기억이, 기억에 대한 보존이 그 자체로 타당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군부독재 시절에 만들어진 수많은 애국용사들의 동상을 떠올려 보라. 게다가 오늘날 기억은 사이버 강박이 되어 누구도 통제할 수 없고 삭제할 수 없는 디지털 데이터로 유통되고 있다. 유치한 수다를 떨고, 비뚤어진 춤을 추고, 엉성한 음악을 듣기. 관람객의 참여로 완성되는 이 모든 행위들은 집창촌이라는 장소의 독특성에 기인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쿨하게 망각할 때에만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유희다. 그러니 기억할 권리가 있다면 잊혀질 권리도 있어야 한다. 당신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을 권리, 당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을 권리, 안민욱의 유머들을 즐길 권리, 당신이 여기서 자유로울 권리. ■ 이은정
* 각주 1) 김희식, "평택시 성매매집결지의 역사적 변화와 공간구조에 관한 연구," 『역사와 경계』, 129. pp.439-440. 2) 성매매방지법은 진보적인 행보를 보여왔던 여성단체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았지만 정작 성매매 종사자들로부터는 거센 반발을 받았다. 이 법의 발효에 분노한 천호동 지역의 성매매 종사자들이 집단시위를 벌인 것을 촉매로 전국 단위의 성노동자대회가 열렸으며 성노동자조합이 결성되었다. 쌈리의 종사자들 또한 이 시기에 '민주성노동자연대'를 만들었다. 3) 신자유주의와 결합한 자본주의의 공식은 다음과 같다. "한 달란트를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라. 가진 자는 받아 더 풍족해지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게 되리라."(마태, 25: 28-29) 4) 예를 들어, 전주 지역의 성매매 집결지인 선미촌에서 수행한 문화재생 사업인 서노송예술촌 프로젝트는 이와 관련해서 상당히 성공적인 프로젝트로 평가받고 있는데, 이 예술 프로젝트는 "업소의 완전 폐쇄를 목표" 삼는다고 밝히고 있다.(박연정, "전주 문화적 도시재생 서노송예술촌프로젝트: 성매매 집결지 선미촌의 도시재생," 2020.) 또한 2024년 현재 이곳은 문화재생사업이 대략적으로 완료되어 서노송예술촌으로 불리고 있는데, 전주시가 사업을 중단하겠다고 결정하면서 600세대의 신축 아파트 건립을 추진 중이다. (박은, "흔들리는 서노송예술촌 ①서노송예술촌 왜 흔들리나?," 『전북일보』, 2024.10.22. www.jjan.kr/article/20241022580177) 5) '자질구레하고 유치한 담화,' '비뚤어지게 추는 춤,' '진정으로 엉성한 미사곡' 등의 표현들은 20세기 초반 몽마르트를 중심으로 활동한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의 연주 지시어와 작품 제목들이다.
Vol.20241002k | 안민욱展 / ANMINWOOK / 安民旭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