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와 삶이 춤추는 시간

2024 종근당 예술지상 역대 선정작가展   2024_0927 ▶ 2024_1006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유창창_전현선_최선_김창영_서민정_서원미 양유연_유현경_이제_김선영_유승호_최수련 이재훈_이해민선_정직성_윤상윤_이우창 이혜인_류노아_심우현_안두진_김효숙_박승예 이만나_안경수_이채영_장재민_김수연 박광수_위영일_박시월_오세경_최수정 국동완_박미라_한지형_박노완_박웅규_장파

주최 / (재)세종문화회관_(사)한국메세나협회 주관 / 아트스페이스 휴 후원 / 종근당

관람시간 / 11:00am~07:00pm 9월 27일_01:00pm~07:00pm / 입장마감_06:30pm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SEJONG CENTER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175 (세종로 81-3번지) 전관 Tel. +82.(0)2.399.1000 www.sejongpac.or.kr @sejongmuseum

회화는 자유로운 세계를 향한다. 자유롭게 선택하고 창조한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치열하게 각고의 노력과 열정을 동반하는 이 운동을 멀리서 보면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시공을 넘나들고 이미지들이 넘나드는 춤이다. 회화는 신이 추는 춤을 모방한다. 우주의 춤은 세계의 섭리를 따르는데 그것은 곧 생사를 초월한 자유와 더불어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들어가며 ● 미지의 영역에 대한 체험과 미묘한 또는 미스테리한 사건을 둘러싼 경이로운 경험을 통해 그리고 그 과정에 형성되고 사라지는 환상들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려간다. 디지털 이미지와 AI 시대에 전통적인 그리고 전형적인 회화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 한국 현대미술에서 회화는 변화와 확장을 지속해왔다. 2012년 출범한 종근당예술지상은 한국의 회화작가들을 지원하고 응원해왔다. 작가들은 다양한 방향으로 현대 회화의 개념과 형식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며 그 의미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종근당예술지상 역대선정작가전에 초대된 15인의 작가들의 회화작품을 통해 우리는 확장된 의미에서 회화에 대한 관점이 변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들의 회화 속에서 드로잉과 오브제와 콜라주와 아상블라주가 결합한다. 동시에 신체 행위를 통해 응축되고 확산하는 복잡하며 섬세한 형식과 표현이 회화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며 변화되어 왔는지 보여준다. 회화에 깊이 다가가는 것은 그 만큼 일상의 평범으로부터 더 멀어지고 사람들이 동의하는 보편적 가치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다. 내면에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만큼 평범한 생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생활 세계와 사회 현실로부터 잠시 거리를 두게 된다. 회화를 통로로 삼아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기존의 관습과 선입견으로부터 일탈하는 것이다. ● 김광규 시인은 그의 시론에서 '언어는 불충분한 소리의 옷'이라고 했다. 그런데 회화, 회화이미지가 그 불충분한 언어가 지닌 결핍을 채워준다는 뜻은 아니다.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운다는 차원을 벗어난 미답의 영역으로 우리의 눈길을 돌리도록 하는 계기를 준다는 의미이다. 내 뜻대로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무언가에 홀려버리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옷을 입는다. ● 회화에 대해 우리가 인정하는 미적 보편성이란, 의미의 보편성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의 보편성을 뜻한다. 여기서 존재의 차원이란 언어와 개념의 논리의 차원을 벗어나 있으며 이는 작가와 작품의 일생(역사)을 통해서 필연과 우연의 관계 속에 드러나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이는 세계관이나 인생관 또는 광의의 예술관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므로 작가들마다 그리고 관객들마다 회화를 둘러싸고 미술사적 또는 미학적 결론이나 주제, 의미로 수렴하여 상호 동의를 끌어내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번 전시에 초대된 작가들의 작품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회화에서 우리가 모색하는 회화의 미적 차원에 대한 시각과 태도는 작가 자신이 설정한 목표나 의미 그리고 행위를 벗어나 또다른 영역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다. 작가가 캔버스 앞에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만큼 또는 그 이상의 자유의 영역을 관객들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자코메티가 중력의 끝단까지 하강하거나 브랑쿠시가 천공의 꼭지까지 상승하는 경험처럼. ● 어슴푸레한 석양의 빛이 내려앉는 시간, 어둠이 사로잡는 베를린의 골목길을 걷는 어린 시절의 발터 벤야민의 체험을 통해. 그와 비슷한 체험을 통해 우리는 비밀스럽고 신비한 환영과 환상을 경험해 왔다. 세대마다 경험하는 구체적인 조건은 다르더라도 인간이 자신의 의식, 의미의 세계를 구성하고 확장하는 힘을 어디에서 얻는 것일까?

유창창_왜! Wh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 애니메이션 페인트, 과슈, 페인트 마커, 패브릭 잉크, 네일 폴리쉬, 색연필_145.5×89.4cm_2023

유창창 작가의 이미지는 일상과 현실의 경험이 초현실의 세계와 연결되는 사건으로 표현되고 있다. 엷게 채색된 색면과 색면의 분할, 낙서화같은 등장인물과 불분명하지만 개인에게는 큰 사건이나 경험을 기록하고 있다. 홀로 등장하는 인물은 쓸쓸하고 고독하다. 칼라는 밀도가 낮고 산뜻하고 경쾌한 분위기이지만 마음이 평화로운 상황은 아니다. 공감각적 인상이 멀미를 일으킬 정도로 이상하다. 기이한 풍경과 고독한 존재가 툭툭 동떨어져 있다. 작품은 모두 개별적이며 독자적인 사건과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다. 작품들 간의 구체적이며 표면적인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다. 작가가 일관되게 제시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 또는 세상살이란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너무도 부조리하여 하나의 가치나 논리로 엮을 수 없다. ● 그림이 애초에 상상의 표현이자 그 결과물이라면, 상상의 주체인 사람에게는 무한한 주제와 소재와 형식을 유희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그것이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림을 매개하고 감상하고 이해하고자 공감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열려있는 것이다. 상상은 꿈과 광기의 다른 말이다. 그 실체는 같다. 중심과 방향과 질서가 없다. 중심과 방향과 질서가 생기는 순간 상상은 멈춰버린다. 상상이 멈추면 우리는 언어의 질서 속으로 들어선 것이다. 언어화하는 의미와 논리가 작동하는 세계다. 그러므로 작가의 이미지는 그 과정을 거꾸로 진행한다. 비언어화와 비문법화를 통해 과거 교육받은 상식적인 문법과 논리를 해체한다. ● 작가가 회화작가로 주목받기 전에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명랑만화의 대표 작가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그의 회화가 보여주는 세계는 명랑만화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명랑만화의 세계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우연과 우연의 연속, 황당한 사건과 이야기전개를 반복한다. 이 세계의 주민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과거, 현재, 미래가 아무 연관관계가 없다. 이 세계의 주민은 순간을 살아간다. 실수와 오류가 넘쳐나고 어떠한 골칫거리도 아무리 복잡하고 거대하더라도 갑자기 해결된다. 또는 해결되었다고 스스로를 기만한다. 그리고 마치 아무 문제도 없었다는 듯 오늘이 시작된다. 명랑한 세계는 역설적으로 전혀 명랑하지 않은 인간의 본질, 사회의 본질을 노출한다. 과거의 서사가 사라진, 서사가 전승되지 않는 회의적이며 냉소적인, 결코 명랑할 수 없는 비극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전현선_기억을 되살리는 거울 Mirrors that Bring Back Memories_캔버스에 수채_162.2×130.3cm_2022

전현선 작가의 이미지는 세상이 디지털 이미지로 뒤덮힌 세계의 감각과 경험을 떠올린다. 세계를 채워온 사물은 단순해지고 평평해졌으며 부분과 부분은 날카롭게 분리된다. 점차 인공의 빛에 의해 교묘하게 조절된 플랫한 색면, 색띠가 화면을 채운다. 높은 차원의 거주자가 낮은 차원 또는 다른 차원으로 전이되었을 때 경험하게 되는 기이한 촉각과 후각을 표현하고 있다. 필연성보다는 우연성, 하나의 세계를 유기적으로 연결해온 모든 것들이 일시에 해체되어버린 세계, 작가들이 사로잡혀버리는 뭔지 모를 모호한 분위기. 작가의 이미지는 명료한 칼라와 화면 분할과 구성을 특징으로 한다. 풍경과 정물이 뒤얽혀 있는 이미지로, 마치 공연이 끝난 뒤 해체되고 쓰레기장으로 옮겨질 무대의 장식들처럼 곧 무너져버릴 세계의 일부분을 보여준다. ● 회화는 더이상 지식과 정보, 미와 추를 담아내지 못한다. 해체와 몰락을 경험한 세대에게 현대미술이란 현실의 재구성이 아니라 단지 비장한 고백일 뿐이다. 색과 면의 복잡성을 담은 그림 속 이미지들에 대해 작가는 요컨대 그림은 메모이며 사고와 의미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작업은 일상의 풍경을 닮고 있지만 실상은 작가의 의식상에 연상되는 상징의 행렬이 만들어내는 풍경이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나무, 산, 절벽, 들판, 테이블은 조형적으로 원, 삼각형, 원뿔, 삼각뿔, 육각형의 형태와 오버랩된다. 마치 신의 은총 또는 이성의 빛처럼 몰락하기 이전의 세계를 지탱해준 가치와 신념을 회고한다. 기하학적 도형과 또 그러한 시각으로 모든 것을 알았고 이해했다고 믿었던 세계가 이제 지난 시대의 유물처럼 남겨진 풍경이다. ● 어떤 이미지이든 의미심장한 상징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정교하게 그려져 있으나 아무 의미없는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세계는 알 수 없는 모호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알 수 없는 뿔이 등장하고 그 정체와 의미를 알 수 없으므로 원뿔은 본래 신비한데 자신의 그림에 우연히 등장하기 때문에 더욱 신비하다고 말한다. 또 이름 없는 산은 애초부터 이름이 없었는지 아니면 너무 다양하게 많은 이름으로 불려서 이름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다. 작가는 그 산의 이름을 찾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지와 힘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타자와 단절된 철저하게 고립된 개인의 비극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호와 상징의 세계를 구축하는 기이한 역설이다. 작가는 마치 생명이 고갈된 오래된 회화의 형식과 전통을 그대로 사용해서 새로운 회화의 길을 모색하는 것처럼 보인다.

최선_표백회화 Bleaching Painting_ 면에 표백_90.9×72.7cm_2024

최선 작가에게 회화는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려지는 또는 기록되는 것이다. 마치 리트머스용지처럼. 작가는 미술이 할 수 있는 일, 미술의 사회적 의미와 기능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고 미술을 매개로 개인이 사회와 상호수렴하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작품이 제작된 시기의 현실이 반영되고 그것이 표현형식의 실험과 가능한한 섬세하게 직결되도록 해왔다. 작가는 2011년 구제역이 발생했을 때 정부가 구제역청정지역 유지를 위해 330만 마리의 돼지를 살처분하자 돼지 기름으로 화이트페인팅을 그렸다. 관객이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면 돼지기름이 녹아내린다. 구미시 화학공장이 폭발했을 때에는 공중에 다량의 불산이 퍼지자 거기에 흰 천을 설치해둠으로써 무색무취무형의 질료(불산기체)를 재료로 한 페인팅을 제작했다. 이 '화이트페인팅'은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그림이었다. 2014년부터는 남북, 좌우 등 현대 한국인이 평균적으로 경험하는 갈등과 긴장, 공포를 극복하고자 사람들이 입으로 숨을 불어서 그리는 나비 페인팅을 제작하였다. ● 작가는 회화의 형식적 관습을 따르면서도 현실의 사회적 또는 정치적 이슈를 다룬다. 미술을 통한 사회비평과 저널리즘의 지평을 만드는 것으로, 예술가가 곧 사회적 존재, 공공적 존재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여러차례 고전적인 엄격한 자기 성찰적 인간으로서의 예술가 인식을 보여주었다. 전형적인 조형실험에 치중하는 모더니즘 예술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다. 예술가와 작품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작품에 보다 분명하고 엄격한 개념화를 통해 작업에 반영한다. 그의 회화는 애매모호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관주의 미학과 거리를 두고 이미지의 환영을 비판적으로 거부하고 이미지의 정치경제학적 또는 사회적 맥락을 정교하게 제시하려고 한다. 작가는 산업 폐유나 오물, 오염된 공기를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며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견지한다. ● 근래 작가의 작업은 과거보다는 보다 서정적이며 개인적 향유의 이슈를 다루려는 것으로 보인다. 외부로 향하던 시선이 자기 성찰의 문제와 융합하는 모습이다. 그가 지향해온 예술의 주제와 형식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중견작가로서 다양한 경험과 창작을 통해 보다 성찰적 개념화의 단계를 보여준다. 예술이 도덕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도덕을 경유하며 예술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작가는 독특한 사회적 실천인 예술활동으로 제시한다. 작가는 개인의 가장 내밀하며 사적인 세계에 집중하는 예술과 사회 현실에 참여하는 능동적 주체로서 인간 활동이라는 문제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고 있다.

김창영_Wishful but I am not there 03_ 캔버스에 유채_97×162.2cm_2024

김창영 작가의 작업은 수십번 중첩하여 부드럽게 채색한 모노크롬 연작이다. 모노크롬의 미학은 색면 추상과 연결된다. 또한 서구미술과 동양의 정신이 융합하는 과정에 탄생한 매우 정신주의적이며 상징적인 화풍이다. 단순하며 명징한 최초의 이미지를 반복되는 붓질을 통해 모호하지만 거대한 색면으로 표현한다. 인류사를 통해 색은 이상적인 또는 정신적 세계를 표현해왔다. 동북아지역에서는 오방색으로 세계와 우주 원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해왔다. 기독교와 불교, 힌두교 등 모든 종교는 그들만의 상징적 색체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색은 단순히 물질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이 중간 매개없이 직접적으로 표출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작가의 모노크롬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칼라는 이러한 전통적인 인식과 연결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매우 안정적이며 평화로운 색면과 이를 만들고 향유하는 사람의 마음은 동일하지 않다. 보이지 않는 긴장과 불편함이 공존한다. ● 구체적인 일상의 현실과 사건, 분명한 주제 모두를 색채의 안개 속에 용해시키는 모노크롬을 통해 작가는 역설적으로 현실과 만난다. 작업은 현실과 예술의 관계를 모노크롬의 채색으로 은유하면서 평화와 전쟁, 갈등과 화해, 폭력과 대화가 혼재하는 세계와 일상을 견디는 과정이다. 작가의 명료하고 평평한 칼라는 수많은 실재의 역사와 현실과 상상과 관념이 혼융된 독특한 균형의 순간을 은유한다. 모순과 갈등을 평생 상상만 해온 사람과 실제로 그 한가운데에서 온 몸으로 경험한 사람은 서로간의 건널 수 없는 이해의 간극을 느낀다. ● 오랫동안 뉴욕에서 활동하다 이제는 경기도 파주에 뿌리를 내린 작가는 한국의 분단 현실을 체감한다. 작가는 모노크롬 속에서 남북분단의 현실을 사유한다고 말한다. 긴장과 갈등, 잠재된 폭력과 살인의 기억들이 일상의 평화와 평온을 떠받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공생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폭력과 갈등이 거대하고 첨예할수록 평화와 평온, 대화와 포용이 더 절실해진다. 김창영의 그림이 주는 메세지는 이런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토록 정갈하고 매끄럽고 잔잔한 모노크롬 색상 사이로 얼핏 보이는 세계의 진짜 얼굴이다.

서민정_세 사람_장지에 주묵, 분채, 콘테, 은박_160×160cm_2023

서민정 작가의 화면은 붉은 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붉은 색채가 넘쳐흐른다. 꽃이 불타기도 하고 이를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불이 일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계는 에너지로 가득차고 서로 상극하는 기운이 충돌하고 융합하면서 다양성과 복잡성을 형성해낸다. 세상은 그렇게 붉게 운동하고 충돌하고 화해한다. 나 또는 너의 얼굴이 그 붉은 기운 속에 살짝 드러난다. 세상이 에테르로 가득찼다고 믿었던 시대의 인간은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했다. 세계는 변화하지 않는다는 굳은 신념이 진공과 무(無)의 등장으로 약화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암흑물질이니 힉스입자니 또는 칼 융의 '동시성(同時性)'이니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이니 하며 다시금 이 세상이 치밀하고 정교한 설계로 매우 안정적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작가의 회화는 이러한 세계와 변화의 문제를 미술이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 그리고 보다 관념적이며 형이상학적 성찰이 다시금 현대 회화로 깊이 진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색과 형태에 집착하는 것처럼 복잡하게 재현된 풀과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듯 분명한 모습을 감추듯 화면 전체가 율동한다. 다른 존재가 있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는 듯하다.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작가의 태도와 운동에 대해 반응 또는 조응하는 운동의 이미지이다. 작가에게 회화란 화가의 몸의 움직임과 호흡의 기록이다. 화가도 살아가는 존재이니 숨을 쉰다. 그가 흡입하고 내뱉는 호흡의 운동은 실존의 가장 간명한 증거이다. 정적인 존재와 살아 숨 쉬며 떨림 또는 진동을 만드는 존재. 생과 사의 사이에서 관찰되고 기록되는 것들이 회화가 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그림도 없다. 적막한 어둠뿐이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사후의 문제는 상상의 영역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상상이 현재의 삶을 더욱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도록 만든다. ● 우리는 붉은 꿈을 꾼다. 사후세계를 의사체험하듯 꿈을 꾼다. 현실도 꿈의 일부이며 꿈도 현실의 일부이다. 모든 상상이 현실이 되고 모든 현실이 상상이 된다. 실상과 허상은 그렇게 위치를 바꾸며 우리를 구성한다. 존재를 향해 다가갈수록 비존재가 다가온다. 마찬가지로 비존재를 회피하지 않고 마주할수록 존재가 솟아오른다. 교묘한 이미지의 마술이 이러한 통찰을 감각하게 한다.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마주하고 반걸음만 그 밖으로 나가도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관찰만 해서는 안 된다. 작가는 문명의 한가운데에서 야생의 밀림처럼 빽빽하게 앞을 가로막는 현실의 복잡한 관계와 사건들 사이로 몸을 움직여 나아간다. 양가적이며 나아가 보다 더 복잡하게 충돌하는 가치와 시각이 예술의 영역에 들어와 중요한 이슈로 다뤄지고 있다.

서원미_말 없는 말 Talk without words_ 리넨에 유채, 오일파스텔_194×194cm_2023

서원미 작가는 문명사와 자연사 사이에서 인간을 이해한다. 유아기의 인간은 연약하지만 동시에 타고난 야생성을 지니고 있다. 강한 생명력으로 생존하려 한다. 작가는 현대 회화의 고전이 된 루시앙 프로이드와 프란시스 베이컨을 오마쥬하듯 인간 내면의 심리를 형상화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물감과 붓질은 단순히 조형적 효과가 아니라 작가의 내면의 감정과 정서의 운동을 표현한다. 물질 그 이상의 의미가 부여된다. 야만성이라 칭할 수 있는 미적 태도와 시각은 타자의 발견과 관련된다. 우리는 현대에 속하지만 동시에 현대로부터 끊임없이 이탈하고 있다. 반현대성은 현대성의 등장과 동시에 등장했다. 인간이라는 관념은 더 이상 오만하게 우리 인류 전체의 존재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매우 협소한 일부분만을 설명할 뿐이다. 우리에게 인간이란 미처 개척하지 못한 미지의 지대이며 여전히 타자로 남아 있다. 현대 회화는 타자들의 발견과 타자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내가 믿어왔던 나란 존재는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나를 파괴하는 자는 밖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무엇이다. 나라는 존재가 바로 타자이기도 한 것이다. ● 회화는 이러한 자기 성찰과 고백을 드러낸다. 몸짓과 언어가 하나였던 초기 인류의 원형성을 배경으로 작가는 실존적 관점과 발생론적 관점에서 인간을 사유한다. 작가는 지난 시기 검은 또는 어두운 역사적 사건과 이미지들을 통해 개인과 사회, 역사의 트라우마를 끄집어내려 했다. 개인이건 사회건, 현재이건 과거건. 모든 인간의 역사는 상처와 치유의 반복이다. 대부분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트라우마로 존속하고 확대 심화된다. 더 아픈 상처가 된다. 작가는 무겁고 깊은 검은 어둠을 통해 눈을 뜨고 현실을 바라보려 했다. 최근 작업은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밝은 칼라와 형상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 내면에 숨겨진 폭력과 상처, 불안과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 ● 회화가 인류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위로하는 예는 많다. 공감과 감동을 통해 여전히 인류의 연대감과 소속감, 상호이해와 존중의 가치를 재현한다. 대상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언어적 서사에서 벗어나 실존적으로 표현되는 것들을 주로 다뤄온 작가는 회화가 지닌 이러한 미적 기능과 가치를 잘 보여준다. 상처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처받은 사람들 간의 상호 이해와 치유가 생성되는 조건이 회화를 통해 서서히 형성될 수 있다. 인류가 공통으로 꾸는 꿈이 회화를 통해 현재로 소환된다.

양유연_틈과 틈새_장지에 아크릴채색_142.4×153.3cm_2023

양유연 작가는 오랫동안 망각하고 무심히 스쳐보낸 것들이 벼락처럼 다가올 때의 순간을 기억한다. 정지된 시간, 뇌리를 파고드는 어떤 예감을 포착하려 한다. 우리가 인지하는 것들은 세계와 현실의 작은 단편들이다. 작가의 이미지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대, 불안이 일상화된 현실의 조각들을 퍼즐 맞추듯 채집하고 회고(回顧)한다. 작가에게 회화는 오랜 시간 세밀하게 표현하는 인물과 손과 사물들의 순간의 기록이다. 회화는 일상과 세속의 욕망이 다루지 않는 세계의 잘 포착되지 않는 부분을 다룬다. ● 창백한 또는 짙은 그늘이 진 인물은 생동감이 사라진 마네킹처럼 느껴진다. 사람을 닮은 인형같은 존재들이다. 인물의 시선은 그려진 대상의 심리 상태를 추측하도록 연출된다. 검은 자위와 흰자위의 비율에 따라서, 눈의 각도와 크기, 방향에 따라서 인물의 심리에 대한 관습적 이해와 동의를 구할 수 있다. 그러나 회화는 그 이상이다. 그 이상의 기묘한 서사를 은유한다. 작가의 이미지는 곧 뭔가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다. 과거의 존재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존재들이 지상을 활보한다. 빛을 가로막은 커튼 사이로 빛과 어둠이 교차하며 인간의 형상을 불안하게 만든다. 인물은 무표정하거나 놀라는 정도의 표정을 보여준다. ● 그림 속 인물은 투명한 빛으로 존재하거나 특정 부위가 삭제된 것처럼 지워져 있다. 그것은 마치 특정 부분만 조명을 강하게 비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화면 중간을 빛이 지나간 또는 만화의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칸 또는 틈, 공간분할처럼 연출한다. '틈'과 '틈새'는 같은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지만 두 단어에서 묘한 차이를 느끼게 된다. 틈새는 틈을 조금 더 비집어 들어가 말하는 것 같다. 하나의 이미지가 불가능한 조형적 틈새를 비집고 우리는 대상들을 상상한다. 형식적으로는 화면을 분할하는 것이었고, 내용적으로는 지속적으로 언급해왔던 익숙한 것에서 느껴지는 낯섦의 표현이다. 작가는 언제나 인물이나 사물의 특정한 부분만 포착한다. 그것은 투명하게 또는 독특한 질감으로 변형되어 드러난다. 이미지는 부분이고 파편이지만 무겁고 깊은 표면을 가지고 있다. 스쳐지나가는 부분들과 표면들이 깊고 무거운 심지어 숭고하기까지한 대상이 된다. 회화는 깊은 차원의 공포와 불안이 잠재되어 있다.

유현경_집으로 Going Home_캔버스에 유채_132×252cm_2024

유현경 작가의 이미지는 모든 것을 추상으로 환원해버리는 현실, 삶의 무게와 강도를 떠올린다. 결코 중력을 벗어나서는 생존할 수 없는 운명의 삶, 자연과 문명을 떠올리게 한다. 인물과 풍경은 붓질과 채색의 흔적으로 캔버스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비우고 있다. 그리는 것이 아니라 붓을 휘갈기며 후벼 파낸다. 공허하고 헛헛하며 메마른 공기가 흐른다. 분명한 기억이 아닌 거의 망각의 입구에 한 발을 넣고 있는 시간의 이미지이다. 길게 늘어놓은 그림자의 한 귀퉁이, 모두가 떠나고 혼자 남은 순간이다. 회화는 무의식에 층층이 쌓아 놓은 어떤 힘을 느끼게 한다. 감정을 유발하고 흔드는 극적 상황이 느슨한 관계성으로 해체되며, 표현이라기보다 흔적에 가까운 속도감으로 분할되는 인물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이런 방식으로 대상이 오롯이 드러나는 그림으로 나아가는 듯 보인다. ● 작가의 인물화는 찰나적이다. 흐릿하다. 모든 것이 머물지 못하고 스쳐지나간다. 시작도 끝도 없는 그림이다. 이미지는 과정만이 존재한다. 자화상은 분명 자신의 모습일텐데 결코 누구의 얼굴인지 분간할 수 없다. 불분명한 음영의 덩어리로 바라보는 작가 자신의 시선을 드러낼 뿐이다. 구체적인 형태와 형상은 사라지고 작가의 무의미한 손짓과 시선에 아무 이유 없이 걸려든 사물과 시간이다. 작가는 자신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시선을 돌린다. 분명한 사물은 사라지고 흐릿한 인상들 뿐이다. 세계가 그렇게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또는 이미 사라져버린 세계를 기억하려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 상태처럼 보인다. 우리의 감각과 인식력은 노화되고 퇴화되어버린 것 같다. ● 신체적, 의식적으로 타자와의 관계 양상이 바뀜에 따라서 고통의 양상이 바뀐다. 관계와 소통이 나 자신에게 향할때 시야가 바뀌고 새로운 지평이 펼쳐진다. 염려하고 돌보아야 하는 일상에서 관계 없는 삶이란 환상이거나 불가능한 도전이 되곤 한다. 우리는 타인을 항상 염두하며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소수의 작가들은 살아가는 과정에 주어진 관계를 하나하나 버리며 점점 하나의 관계의 극단으로 나아간다. 마침내 관계 중심의 작업에서 관계를 망각하는 '실존'의 시간대로 넘어간다. 아무런 매개 없이 오로지 자기 자신과 직접 마주하는 시간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의 창작은 일상과 보편을 벗어나 특수와 비일상의 순간을 직관하며 독특한 자신만의 무언가를 토해낸다.

이제_당분간 For The Time Being_ 캔버스에 유채_200×150cm_2020

이제 작가에게 회화란 불확실한 세계의 잠재적 서사를 표현하는 것이다. 시대와 일상, 그 사이에서 다양하게 만들어지는 집단과 개인의 서사, 정서, 심리 등을 포착해 회화로 재현한다. 회화는 단순히 재현과 기록의 단계를 지나 보이지 않고 포착하기 어려운 인간 내면의 심리의 변화를 치밀하게 추적한다. 작품들은 특정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에서 마주하는 분위기를 포착한다. 전통적인 회화 형식과 새롭게 자리잡은 회화 설치의 방식이 혼용된다. 무용과 음악이 회화 설치와 결합하는 연출은 회화가 사람들이 망각하고 있거나 간과하고 있는 세계의 기원과 그 복잡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유의 형식이라는 사실을 제시한다. ● 세계는 세계 그 자체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우리의 인식능력이 세계 전체를 인식할 만큼 크지 않기 때문이다. 더 크게 또는 더 작게 인식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크고 작은 인식의 진동에서 세계 본래의 얼굴이 노출된다. 시각이미지의 운동으로 결합된 회화란 인간의 심층의식을 은유한다. 성공적인 은유란 언제나 우리에게 멀리 떨어져 있거나 너무 늦게 온다. 재현과 표현으로서의 미술이 개념과 추상으로서 그리고 이론으로서의 미술로 전개되면서 정작 미술의 존재론적 기초였던 세계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감정과 사유는 망각되어 왔다. 경험된 회화의 감각은 언제나 과거로 밀려난다. 그러나 단순히 지나버린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의 변화를 이끌고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도록 한다. ● 설치된 이미지들 사이로 웅성거리는 밤, 물가에서 그리고 국도에서 작가는 깊은 상념에 빠진다. 사람들, 여인들이 모호하고 추상적인 밤의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제의적 분위기가 짙은 안개처럼 펼쳐진다. 힘과 긴장, 균형의 해체, 쏠림과 치우침이 생성된다. 기억과 망각의 사이에서 반복해서 만나고 어울렸던 사건과 관계들의 어둡고 무거운 회고(回顧) 또는 사유의 그림자들이다. 우리는 타자와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나 자신을 버릴 수도 없다. 작가는 점점 더 영적인 문제로 진입한다. 그 과정에 예민하고 정교하게 나라는 존재의 실체를 향해 나아간다. 낯선 타자와 만난다. 작가에게 회화의 밤은 회화의 낮보다 더 무겁고 더 길다. 영원성에 갇힌 채 되돌아가야 하는 누군가의 초상이다. 회귀와 반복의 운동 속에서 세계의 밤은 존재들로 웅성거린다.

김선영_사이사이에 하나하나_장지에 아크릴채색, 과슈, 분채_163×390cm_2024

김선영 작가는 신체, 몸을 중요한 화두로 삼아 회화 작업을 한다. 외계 대상이 아니라 내 안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상은 부차적인 것이다. 나의 신체성을 드러내는 장치나 도구가 되는 것이다. 회화 그 자체가 아니라, 회화 너머로 넘어가려고 한다. 메타 회화라고 부를 수 있는 시도이다. 작가의 이미지는 몇 개의 흐릿한 이미지와 방향 없는 붓질과 몇 개의 분할된 화면으로 구성된다. 작가의 이미지는 불분명한 대상과 형태가 상승하는 힘과 하강하는 힘, 세계를 감싸는 액체와 기체, 공기와 물의 현상으로 채워진다. 작가는 몰입과정을 통해 자연과 신체가 병치되거나 융합하는 운동을 경험한다. 이미지는 이러한 운동의 흔적들로 채워진다. ● 작가의 이미지는 분명한 형태와 경계를 찾기 어렵다. 풍경 이미지는 사실은 미술사적 의미의 풍경이 아닌 작가의 내면에서 제기되는 마음의 풍경이다. 신체성으로 해석된 이미지이다. 조형적 사유의 대상이 풍경이 아닌 자기반성과 성찰로서의 풍경이다. 무의미해 보이고 사소해 보이는 풍경은 관리되거나 관찰되지 않는다. 본래 있던 자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결코 사회화되지 않는 것들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담고 있으며 그것을 노출할 수 있다. 작가는 불분명한 나와 사회의 경계선을 사유한다. 가장 몽롱한 이미지가 일상의 경제적·사회적인 관계 속에 역동하는 작가의 현실을 예민하게 담고 있다. 관리되고 있는 현실의 반대편에 비친 이상적 분위기를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 회화에서 형태는 작가의 내면과 작가를 둘러싼 세계가 만나는 경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흔적이기도 하다. 캔버스 표면에 출몰하는 다양한 음영과 형태, 색을 통해 작가는 세계에 던져진 자신의 정체성은 홀연히 사라지고 어떤 비현실적 풍경속에 들어가 있다. 자기 자신에게도 근본적인 질문과 일시적인 판단과 임시방편의 답변이 순환한다. 이를 통해 작가의 안과 밖의 관계 또는 정황이 점차 분명해진다. 작품의 겉모습을 결정하는 중심적인 형태들, 이미지들은 작가의 의도를 담기도 하지만 작가의 의도와는 하등 상관없이 창작 과정에 개입하는 다양한 힘들의 작용을 반영하고 있다. 회화는 마치 자연과 합일하는 과정에 체화되었을 작가의 감각의 변화와 그 궤적을 촘촘하게 기록하고 있다.

유승호_한 푼 줍쇼~ A gold spoon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5.5×112.1cm_2018

유승호 작가의 세계에서는 말의 유희, 단어와 문장이 춤을 춘다.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고 떨어지고 솟는 꽃잎이나 나뭇잎처럼 문자와 이미지가 날아다닌다. 작가는 가장 쉽고도 동시에 난해한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해 나간다. 그의 이미지들은 넋두리와 흥얼거림과 중언부언하는 기묘한 텍스트가 화면 가득 채워지며 마치 바벨탑이 무너진 직후 주위를 떠돌며 대화할 수 없는 무수한 언어들의 분열을 은유하는 풍경이다. 문을 닫아야하는 주점에 버티며 기어이 소리를 지르는 아우성처럼 보인다. 내면의 울림이든 아니든 작가의 이미지는 얇거나 두껍게 그리고 나른하거나 또는 격렬하게 소리치는 이미지들을 제시한다. 작가는 이리저리 끼적이며 흘러내리는 어떤 설움 같은 감정을 사생한다. ● 외계인의 시각에서 보면 지상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사고들, 인간의 행위들은 모두 이해 불가능한 점과 선과 면과 이미지들의 운동과 변화로 이해될 것이다. 아니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언어가 생성된 사회와 시대로부터 이탈해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언어로서의 일반적 기능을 상실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언어의 형태를 띤 이미지 또는 얼룩으로 다뤄질 뿐이다. 유승호 작가는 오랫동안 문자를 탈맥락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문자는 일반적인 언어가 아니라 시각 이미지를 구성하는 조형 요소로 인지된다. 우리는 그의 작업에서 사용된 언어들, 문자들, 단어들을 보며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환원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곧 실패하고 다만 작가가 지속적으로 화면에 채우고 비우고 구성해 나간 분위기, 모호한 이미지를 발견하게 된다. ● 작가는 화가이지만 동시에 시인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에게 회화는 그림과 시가 만나는 교차로다. 회화는 의미가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뒤엉킨 공간이다. 전형적인 회화 이미지와 언어 실험을 통해 사유의 실험을 동시에 보여준다. 시적 정신이 있다면 유승호 작가에게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작가가 집요하게 몰입하는 수작업으로 채워진 화면 위의 단어들은 의미와 무의미, 의미의 질서와 혼돈이라는 의식의 운동을 거울처럼 반영한다. 작가에게 느껴지는 광기는 어쩌면 자신의 언어, 자신의 이미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표현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광기는 사랑의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현재 자신이 거주하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는 눈,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몰입하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상식의 눈과 정신과 언어를 벗어나야 비로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세계를 지향한다. 작가가 내뱉는 말들, 언어들은 우발적이며 어떤 논리의 붕괴를 연상시키며, 지난 시기 단기간에 세련되고 우아하게 구축된 우리 미술에 대한 불편한 뒤척임이다. 칼처럼 작동하는 말은 피를 두 방울 떨어뜨리고는 소유가 아니라 소통을 주문(呪文)한다.

최수련_선녀_리넨, 황마에 유채_194×130cm_2019

최수련 작가의 작업은 민간 신앙과 설화를 현대 회화로 초대한다. 회고적 형식과 소재가 어떻게 새로운 컨텍스트 위에서 생동감을 획득하는지 보여준다. 관습적으로 이해해온 회화를 전통적인 해석의 밖에 위치시킴으로서 새로운 맥락을 만들고 있다. 회화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결코 회화 그자체로 환원하지 않는, 정체불명의 새로운 주술 행위로 보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진정한 실재(reality)를 마주하더라도 결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 번도 실재를 경험하지도 또 경험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만나야하는지 우리는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도 회화의 본질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것이 현대미술가들의 공통된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모두는 현재와 미래를 알고 나아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확신할 수 없지만 과감하게 전진하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동아시아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형성되어온 여성성의 기원에 대한 흥미로운 문화사를 상기시킨다. 이를 위해 현재와 과거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한자문화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 「선녀 仙女」, 「태평녀泰平女」, 「한글 세대를 위한 필사」 등은 작가의 주제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 그림 안에 '그림의 세계', '초현실적 세계', '부조리하며 비극적인 (설화/현실) 세계'가 다양한 방식으로 겹치고 변주한다. 작가는 이러한 세 가지 세계가 화론, 파자술, 점괘, 예언, 주역 도해, 귀신 이야기 등을 통해 뒤섞여있다고 말한다. 작가의 이러한 가설은 동북아 지역의 신화와 전설 그리고 다양한 괴담과 민담을 모티브로 우리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정체성과 전통의 문제를 제기하며 매우 개성적인 미적 표현과 형식을 획득한다. 한자문화권과 현대의 한글문화가 그리 멀지 않으며 내재적으로 깊은 연결고리가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전통은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품고 있다. ● 작가에게 전통의 문제는 관습과 함께 다뤄지며 무엇보다 샤머니즘, 무속과 제의가 우리의 대중문화와 일상 속에서 여전히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미학적 정치성이기보다는 보다 유연하고 완만하게 변형된 형태 속에 전승된 서사성에 기대고 있다. 마치 상형문자처럼 의미의 상징체계가 얼마나 우리의 내면, 무의식에 자리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한글 세대를 위한 필사'시리즈는 흥미롭다. 필사와 습자의 전통을 회화의 소재로 삼아 문자 이미지가 어떻게 우리의 도덕적 정치적 미적 가치를 구조화하는지 드러낸다. 또한 구술문화와 문자문화가 한자와 한글의 병치와 혼용 속에 독특한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일상과 현실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들의 기원을 추적하며 노출시킨다. 작가의 작업은 사멸한 것처럼 보이는 과거의 언어와 이미지를 통해 새롭게 변화하는 현대 회화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시각과 지평을 모색하고 있다.

이재훈_활활활 Ablaze_벽화기법(장지에 석회, 먹, 목탄, 목탄가루, 아교, 채색)_190×80cm_2024

이재훈 작가의 작업은 기억과 경험의 시각적 자료들이 뒤엉키고 거대한 카오스적 형상을 만들어낸다. 어딘지 알 수 없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단단하게 자리잡고 풍화되어가던 기념물들의 세계가 해체되고 새로운 역동적 힘들의 집합체가 나타난다. 구체적이었던 상징과 도상들은 모두 사라지고 짙은 음영과 채색과 붓질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사물과 에너지가 서로 감응하고 포용한다. 조형력을 통해 작가는 사물과 생명에너지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세계의 어둠과 불안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 필력과 화면 구성은 역동적이며 활력이 넘친다. 조형적으로 대상은 생동하는 원형적 에너지의 현상으로 수렴한다. 작가는 그것을 바라보고 그려나간다. 장지에 먹과 목탄과 목탄가루와 아교와 채색이 하나의 형상을 향해 나아간다. 이미지는 몸과 마음, 의식과 대상, 운동과 변화가 모두 뒤섞인 카오스적 형상으로 뭉뚱그러진다. 모든 것이 하나의 전체가 되는 유기체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물질과 정신이 유기적으로 공존한다. 작가의 작업은 이러한 작가의 세계관이 바탕이 된 현상의 표현이다. 불일치의 세계에서 일치의 세계로 나아간다. ● 작가는 질문한다. 정지된 형태로부터 활성화되는 이 생동감, 생생함은 무엇인가? 시대를 초월해 '기(氣)'와 '기운생동氣運生動'의 세계 인식을 바탕으로 회화 이미지는 시간성과 연결되고, 형상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으로 고정된 실체가 없는 변화하는 현상으로 이해되어왔다. 마치 기(氣)처럼 회화 이미지는 흩어지고 모이고 형태를 이루었다가도 안개처럼 사라져버린다. 시간 속에서 모든 사물은 변화하며 생성소멸한다. 우리의 감각과 감정과 의식과 꿈, 정념과 이념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운동하며 생성소멸한다. 회화 이미지는 운동을 반복하며 자유로운 조형 세계를 지향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일상을 벗어나기도 하고 세속과 사물에 깊이 관여하기도 하는 마음의 경계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살고 죽는 것, 생사유무를 왕복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어느 것에도 집착하거나 중독되지 않는다. 자유롭다는 것은 마음이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자유롭게 왕래하는 것이다. ● 의식에는 기억의 연쇄가 일어난다. 시간성 위에 펼쳐지는 기억과 재현의 무한한 반복과 연쇄. 복수의 차원의 현상들이 중첩되고 상호 삼투하고 충돌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한다. 근래 확산되는 멀티버스라는 관념은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복수의 세계가 있다는 것으로 이는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과 복수성을 의미한다. 변화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변화란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하나의 현상에서 다른 현상으로 이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의 생로병사는 변화가 아니라 성장과 소멸이다. 변화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 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작가는 오랫동안 사회가 개인에게 강제하며 훈육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표현해왔다. 근래에는 동양 회화의 방법론을 적용한 회화 연작을 통해 동양화의 세계관과 조형원리를 현재화하고 작가 개인의 조형언어로 번안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해민선_무른땅에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1×227cm_2017

이해민선 작가는 '취약한 개인의 저항'이라는 말로 자신의 작업을 설명한다. 죽은 나무가 각목이 되어 살아있는 나무를 지탱해주는 '지주목', 서로를 묶어주는 '끈'. 강한 바람을 버티기 위해 구멍을 뚫은채 버티는 '현수막', 다친 몸을 감싸고 보호해주는 '깁스', 온갖 먼지와 새똥과 죽은 벌레로 표면이 만들어진 '천막천', 얼다녹다를 반복하면서 소멸에 저항하는 "잔설"들. 현실적이며 사회적인 성공과는 하등 상관없는 존재한다 그 자체로 존엄한 존재성을 제시한다. 한편 작가는 인화용지에 이미지를 새긴다. 매끄러운 사진 인화용지의 표면과 얼어붙은 강의 표면이 교차한다. 사물의 속성이 표면 이미지의 유사성에 녹아들어간다. 인화용지에 이미지를 새기고 녹이는 화학적 과정은 언 강이 녹는 과정으로 치환된다. 작가는 인화지 표면의 0에 수렴하는 마찰계수의 마법적 기능과 표면질감, 그 감각이 너무도 유혹적이라고 생각한다. 언 강의 표면과 그 밑에 흐르는 강의 관계처럼. 존재의 표면을 흐르는 얼어버린 사물의 쓰임과 그 생명력처럼 말이다. ● 사물들은 저마다 질긴 사연이 많을 것 같다. 할 말이 많은 사물들이다. 수집 후 작업을 하고 전시를 하는 과정에 작가는 자신이 수집한 사물과 사물의 이미지를 응시하고 사유하는 과정에 그것들이 주변화된 것들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다.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는 것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며 새로운 의미를 생각하는 모습을 반복한다. 불과 얼마전까지도 북미대륙에서 오리 사냥에 쓰였던 오리 형태의 미끼인 디코이, 쓸모 없는 목재, 폐기된 공사장 천과 스티로폼 등 생활과 기능, 죽음과 생명의 경계에 있는 것들이 회화 이미지가 된다. 작가는 경계들 사이에서 사람도 아니고 사물이 아닌, 유기물과 무기물 사이, 애매한 경계에 있는 풍경들, 주변화된 사물들을 수집하고 물질성과 비물질성의 관계들을 사유한다. 작가는 회화에 표현과 재현의 도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다. ● 작가 특유의 예민하면서도 무료한 이미지들, 깊이 침잠하는 감정과 정서가 느껴지는 새, 거울, 언 강물의 이미지들로 채워졌다. 얼굴 없는 새 그림은 상징적이다. 새는 마치 신의 대리자 또는 신 그 자신처럼 우리에게 얼굴을 감춘다. 신과 세계와 새는 상호 은유적이다. 얼굴이 없거나 눈동자가 없어서 도저히 표정을 알 수 없는 모호한 인상의 얼굴처럼, 그렇게 변형되고 탈각되고 사라지는 것들이 세계의 망각된 얼굴이다. 회화가 존재의 가장 낮은 단계까지 하강하고 다시 가장 높은 차원까지 상승하는 이중의 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정직성_202236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62×130.3cm_2022

정직성 작가는 오랫동안 이데올로기와 세속적 욕망이 충돌하고 뒤섞이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작업의 주제로 다루어 왔다. 평균적인 주거 현실과 노동의 현실을 기하학적 추상과 융합한 회화가 작가의 시그니처였다. 동시에 여성 작가로서의 자신의 삶과 정체성에 대해 깊이 사유하며 우리 사회의 현실을 부대끼며 여성으로서 독립적으로 살아내는 태도를 견지해 왔다. 미술사적으로 사회현실로부터 벗어나 미술 본래의 본질 또는 조형원리로 환원하는 기하학적 추상의 형식과 작가 개인과 사회의 여성성의 문제를 융합시키는 시도는 역설적이다. 이러한 이질적인 맥락들이 교차하면서 새로운 혼종의 형태와 낯선 감각을 제시하는 방식이 작가의 회화에 개성을 부여하고 있다. 작가는 그 소재와 형식에 있어서 현대 회화의 개별적 역동성과 전통적 도상의 집단적 상징성을 충돌시키며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 작가는 전통 회화와 공예에서 다뤄져왔던 소재와 도상을 가져와 개인의 삶과 현실을 연결하는 한편, 서구의 미적 전통과 동아시아의 전통을 정물(Still Life)의 재해석을 통해 결합하고 있다. 동양 전통의 다양한 화론을 살펴보고 그 사유 방식을 회화에 적용하면서 서구 미술사의 기하추상적 미술의 정신적 맥락에서 이탈한다. 작가는 14년 이상 전통 옻칠과 자개장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보편적인 한국 전통 문화의 정서와 상징을 다양하게 작품에 도입해왔다. 사군자에서 가져온 대나무 이미지, 활짝 핀 목련, 매화를 장소특정적 상황에서 집중할 때의 달라지는 필법과 이미지, 동양의 신령스런 존재인 용의 이미지를 가져왔다. 과거 현재 미래를 가로지르는 개인사를 회고하고 미술사적 맥락을 교차시키고 그 과정에 작가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회화를 모색한다. ● 삶이 고통이라면, 회화는 그것을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회화 이미지는 작가와 관객의 상호관계 속에서 대화를 한다. 대화와 공감, 소통의 장으로서 새로운 회화의 의미가 생성한다. 의미 있는 형식으로서 회화가 공감을 받고 평가받는 것은 창작자의 시각과 표현 방식의 다양성과 자유를 회화라는 장르가 제공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오랫동안 자신의 일상 현실에 철저하게 밀착해 사유하고 표현하는 과정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관점과 창작 태도는 자연생태의 문제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 생활을 꾸려가고 생명을 키우는 일들의 유의미한 균형을 회화 속에 용해시킨다. 그렇게 화면의 다양한 도상들이 어느 순간 하나의 회화 이미지로 직관적으로 종합된다. 작가는 회화를 통해 공감을 욕망한다.

나오며 ● 복수의 세계의 그물망을 타고 의미가 흘러간다. 종근당예술지상 역대선정작가전을 두 번째 준비하면서 15명의 작가들의 회화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매번 우리는 청년 시기를 지나 성장하는 작가들의 회화 세계가 우리에게 어떤 영감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지, 그리고 높은 정신성을 성취했는지 기대하게 된다. 회화의 형식과 내용은 시대와 지역마다 바뀌어왔다. 화가 개인에 따라서도 다양한 표현이 등장했다. 15명의 작가들의 회화 세계는 저마다의 주제의식과 표현형식으로 감상하고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작가들마다의 자기 고유의 독자적인 형식과 표현을 획득했느냐에 따라서 향후 그들의 진로와 성취를 가늠해볼 수 있다. ● 현대 회화는 과거와 달리 매우 다종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다루고 독특한 스타일과 재료와 표현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확장된 의미의 회화이다. 회화는 더 이상 미술의 한 장르나 형식이 아니라, 미술 그 자체이기도 하며, 회화를 통한 철학이며 시이며 세계관이다. 영적 고양과 감각적 공감을 모두 아우른다. 이렇게 비교할 수없이 확장된 회화의 경계는 작가들의 예술적 노력과 성취에 따른 것이다. 개념과 이론을 넘어서 개개인의 내밀한 감각과 감성이 층층히 쌓여 성취한 경지이다. ● 회화의 역사는 여전히 새롭게 쓰여지고 있다.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여 인간의 상상력과 이미지를 대체할지라도 회화에 대한 우리의 욕망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이야 말로 가장 미스테리하며 거대한 신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기술과 과학, 지식과 정보가 인간의 감정,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다. 오래된 미디어로서 회화가 여전히 미술의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다. 이번 종근당예술지상 역대선정작가전에 초대된 15인의 작가들에게서 회화가 우리에게 주는 것들을 생각해본다. ■ 김노암

Vol.20240927b | 회화와 삶이 춤추는 시간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