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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4_0921_토요일_05:00pm
후원 / 서울특별시_서울문화재단 주최,주관 / 아마도예술공간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마도예술공간 AMADO ART SPACE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54길 8 (한남동 683-31번지) Tel. +82.(0)2.790.1178 www.amadoart.org
한우리는 사라져 가는 사물과 그 세계를 탐구한다. 특히 재현과 매개, 기록의 기술이나 그러한 기술을 향한 믿음처럼 우리의 감각과 경험, 기억을 구조화하는 힘을 가진 대상들에 초점을 맞춘다. 다만 이들의 공통점은 인식, 지식과 의식을 사로잡을 수 있는 중력을 가졌으나 그 힘을 서서히 잃어가는, 낡은 질서에 속한다는 데 있다. 동시에 그들이 붙들어 매었던 사물-인간 사이의 장력과 얽힘 역시 서서히 허물어진다. 그러나 한우리의 작업은 금이 간, 소멸해 가는 그물망을 투명한 렌즈로 왜곡 없이 전달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 다만 헝클어진 사물-인간의 별자리 사이를 그 쇠락보다 성긴 알레고리의 서사로 꿰어낼 뿐이다. 잘 알려진 설화나 신화, 가상의 이야기 타래가 제자리를 잃은 작고 구체적인 사물을 바늘로 삼아 대상들 사이의 이격을 나슨히 누빈다. 그들이 언젠가는 굳건히 서로를 필요로 하게 했으며, 또 다른 별자리들의 배경에 섞여 여전히 무언가-누군가를 지지하고 있음을 속삭이면서.
한우리의 네 번째 개인전, 『루프: 개를 흔드는 꼬리』는 필름이란 희미해진 별과 필름-시네마 매체-환경이란 쇠퇴한 성좌를 향해있다. 세상의 빛을 은 입자의 힘으로 얇은 지면에 안착시킨 후, 릴의 자전과 투사의 힘으로 어두운 외계를 향해 은하수처럼 다시 펼쳐 보이던 재현 기술의 별무리. 융성했던 이 성단은 이제 재현-매개의 은하 변방으로 밀려난 것처럼 보인다. 전시는 시간 저편으로 내쫓긴 한 매체의 흐름을 따라, 이제 우주의 중심에 자리 잡은 기술이란 은하계의 유일무이한 회전력을 반추한다. 효율성, 편리성, 즉시성, 비매개성으로 관측되는 우주 중심의 이 무시무시한 힘은 모든 사물과 체계를, 인간과 사회를 블랙홀처럼 끌어당기며 각각의 운동과 질서를 재편하는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전시는 진보를 향한 기술의 직선적 속도에 분명 탑승해 있다 믿었던 사물과 인간들이 기술의 힘에 붙잡혀 일정한 궤적을 맴돌게 되어버린, 동시대의 기묘한 본말전도의 상황을 그려낸다. 동시에 기술의 원심력으로 인해 원래의 연결에서 튕겨 나와버린 사물과 인간을 반복과 회귀, 역전과 도치를 담은 알레고리로 얽어 나간다.
이번 전시에 새로이 선보이는 3점의 신작, 「루프」(2024) 와 「포털」(2024), 「성냥」(2024)은 유명한 신화와 소설의 서사를 변용하지만 동시에 『은입자』(2023)의 서사와 각각 직접적이고도 느슨한 연결을 맺는다. 『은입자』는 '얇은 사물'을 중심으로 한 두 인물의 경험이 시간차를 두고 교차하며 펼쳐지는 SF 소설이다. 주인공 A의 서사는 사회-경제 인프라 등이 한 시스템 아래 통합되어 대부분이 최적화된 생활 환경 내에 머무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대신 인간은 세계를 네트워크 환경 속으로 환원시킨, '세계'라는 장치로 타인과 사회, 세상과 상호작용하며 살아간다. 통제된 환경인 '컴플렉스'를 한 번도 떠나보지 않은 주인공 A는 어느 날 '세계' 시스템의 우연한 오류를 계기로 관리 된 '장소' 바깥으로 향한다. 그리고 A는 이 미지의 공간에서 '세계'에 등재되지 않은 한 신비한 사물과 마주한다. 보다 머지않은 미래인 2033년, B는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얇은 사물'을 구매하게 된다. 얇은 막에 새겨진 타인의 기억을 본 이후, 그는 자신의 시간 역시 기입해보고 싶다는 욕망 아래 얇은 사물을 둘러싼 기기들을 어렵사리 구매하고 사용법을 알아내고자 애쓴다. 이 사물을 그나마 알고 있는 몇 남지 않은 과거 세대에게 조언을 구하고, B와 유사하게 얇은 사물에 기묘한 애착을 가진 웹 속 익명의 인물들에게 도움을 받아 가며 B는 얇은 사물을 중심으로 한 생태계 속으로 점점 깊게 진입한다. 소멸 직전의 사물, 필름을 중심으로 중첩되는 두 인물의 이야기는 시간에 따라 혹은 그것과 관계없이 여전히 잔존하는/생성되고 있는 사물-인간의 공동체를 넌지시 가리킨다.
『은입자』의 먼 전편(前篇, prequel)으로 볼 수 있는 「루프」는, 신을 기만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 시시포스 신화를 배경으로 삼는다. 다만 「루프」는 그 자체로 신화의 전편이기도 한데, 여기에서 시시포스는 무한한 형량의 노동을 시작하기 전,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모종의 탈출책을 제안받는다. 역설적이게도 시시포스는 자신의 반영체를 뒤따라 잡거나 그의 산물이 어딘가 숨긴 선물을 찾아야만 한다. 마침내 그는 숨겨진 보물을 찾지만 모른 척 다시 묻어둔 채, 영원한 노동으로부터의 영원한 탈출을 포기한다. 돌을 굴려 올리지만 않는다면 다시 미끄러져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 텐데도 고난을 택하는 신화 속 시시포스처럼, 「루프」 속 시시포스는 해방 대신 반복을 자처한다. 이는 목적을 이뤘음에도 다른 목표를 쫓으려는 내기이자, 자신의 그림자와 술래를 바꾸어 스스로를 옭아매는 놀이다. 그들의 도치된 추적, 도착적 고행은 출구도 입구도 없는 끝없는 미로 속을 영원히 헤맨다. ● 이 반복의 서사는 「루프」의 일부이자 전체인, 필름의 미로를 품은 커다란 장치에 걸려 되풀이된다. 루프 또는 루퍼(looper)로 통칭되며 필름의 연속 상연을 가능케 했던 이 장치는 최근 영상 재생 인터페이스에서 무한대 기호의 버튼으로 축약된 반복재생(loop) 기능의 전형(典型)이다. 「루프」의 기념비적 장치는 무한한 재생을, 이미지의 영원을, 그 시간을 가능케했던 물질적 부피를 되살린다. 이로써 주체와 반영물, 창조주와 피조물, 인간과 기술이 서로를 몰아가며 쫓고 쫓아온 과정, '발전'의 부조리한 놀이 속에서 압축되었던 시간을 물질적으로 가시화 해낸다. ● 「포털」은 『은입자』의 세계관 안에서, 먼 과거인 「루프」와 미래인 「성냥」의 이야기를 잇는 가교적 작품이다. 모노리스, 문, 혹은 핸드폰을 닮기도 한 이 스크린에는 『은입자』 세계관 속에서 현실이나 가상 어디로나 언제든 연결할 수 있게 해주는 '포털(portal)'의 광고가 흘러나온다. '포털'이란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현실과 현실, 현실과 가상 사이의 간극을 연결해내는 소수의 '마법사'들의 산물이다. 이들 마법의 진가는 현실-가상 사이에 이음매조차 보이지 않는 문을 매끄럽게 뚫어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는 데 있다. 다만 시간도 공간도 뛰어넘어, 사용자가 실로 어디에 있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게 하는 마법적 몰입에는 단 한 가지 제약사항이 있다. 바로 포털의, 문의 존재 자체다. 지금껏 포털의 존재감은 문의 크기와 두께를 조금씩 조정해 감으로써, 즉 몰입의 조건을 확대하는 동시에 압축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조건을 잊게 하는 방식으로 애써 지워져 왔다. 그러나 광고는 이제껏 나왔던 그 어떤 문보다도 최강의 몰입을 선사할 궁극의 문, 완전히 얇고 투명해진 마법이 도래하리라 홍보한다. 심지어 이 포털은 마법사들의 시전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우리 각각의 한 손짓만으로도 세상은 우리 앞에 당도케 할 것이다. 당신의 눈앞에서 있는 세로형 포털은 바로 그 최종 진화형 '마법'의 우리 시대 버전, 즉 과도기 형태다. 이 포털은 도래할 미래의 업적을 미리 과시하기라도 하는 양, 지리멸렬하게 축소/팽창해 온 문의 궤적을 별자리로 각인해 자신의 발 아래 깔아둔다. 그러나 '마법'의 위용은 영상 안에서 광고 사이로 이따금 틈입하는 존재들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빛바랜 인물, 섬세한 노동, 분진과 부산물들은 포털이 투명해져가는 만큼 함께 지워진다. 포털의 유동성, 완전 무결성으로부터 배제/부정되어야 하는 무가치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포털」의 서사는 다분히 이미지 재현 기술 발전과 이미지 지지체의 역사를 염두에 둔다. 요컨대 '마법사'는 영화 초기 특수효과 전문가들의 별칭(1) 이었으며, 오래된 이미지 지지체인 모자이크 타일에 새겨진 문 크기의 역사는 화면 비율의 변화 과정과 일치한다. 「포털」 앞에서 우리는 해마다, 심지어 분기마다 새로워졌던/지는 스크린을 떠올리며, 과연 얼마나 많은 '부산물'이 지워지고 숨겨졌는지, 이미지 재현의 '마법'이 우리 손에 쥐어졌는지, 또 다른 '포털'을 찾아 헤매는 영원한 굴레를 벗어나게 될지를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성냥」 역시 『은입자』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액자형 구조의 서사다. 영상의 틀은, '마법사'들이 세상 곳곳에 뚫어둔 '포털'의 이음새나 결함적 포털을 찾아내는 한 '추적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추적자는 '세계' 시스템이 채 포섭하지 못한 세상을 찾아 등록된 '장소'들로부터 벗어나는 탐사에 나선다. 그는 한 공간에서 지속시간도 짧고 오롯이 사용자의 능력이 더해져야만 세상을 펼쳐 보이는 아주 오래된 포털, 성냥과 마주한다. 성냥을 켜 추적자가 들여다본 곳에는, 한 괴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창조주에게 버림받아 분노의 화신이 된 피조물, 그러나 후세엔 그가 그토록 애증했던 창조주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프랑켄슈타인이 그 주인공이다. 다만 여기에서 괴물은 원작과 다르게, 자신이 버림받고 절망과 시기에 빠진 이유를 스스로에게서 찾는다. 화목한 한 가정을 몰래 지켜보며 인간적 가치들을 동경하게 되고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감동했던 만큼, 무언가를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이야말로 좌절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결국 그는 괴로움의 원초적 이유인 제 눈을 불태우기로 결심한다. 태양을 쳐다보았지만 극심한 고통에 눈을 돌려버린 그는, 자신의 눈을 서서히 멀게 할 빛을 찾아 헤맨다. 눈의 반짝임을 탐내어 날아드는 까마귀를 피해 가며, 그는 오래된 도시에서 아주 작고 낡은 '태양'을 발견한다. 수명이 짧은 '태양'을 켤 때마다 그는 조금씩 시력을 잃었고, '태양'의 잔재가 수북해질 때쯤 그는 눈 대신 다른 것을 얻게 된다. 시각에 주의를 빼앗겨 잊고 있었던 저 자신만의 시간을 매만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냥이 다 타 괴물의 모습이 사라질 때쯤, 추적자는 주변을 더듬으며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성냥」은 가시적 이미지 없이도 상상을 매개했던 낡은 광원과 이를 둘러싼 이야기로 시각성에 지배된 당대의 그림자를 비추어볼 수 있게 한다. 보이지 않았거나 보지 않음을 택했기에 시간과 세상을 되찾은 두 인물은 끝없이 반복되며 주의를 갈구하는 이미지들로 인해 다중적 감각을 대부분 멀어버린 지금, 그저 망막적 자극의 연속이 되어버린 시각을 잠시 내려놓는다는 또 다른 가능성을 속삭인다.
오래된 매체를 중심으로 서사들이 미끄러지며 공전하는 『루프: 개를 흔드는 꼬리』는, 구시대적 물건들에 대한 의사 향수(pseudo-nostalgia) 혹은 낯선 친밀함을 자극하는 당대 문화의 한 양태와 접붙으려는 시도는 아니다. 오히려 각각의 작업은 소비욕을 창출하려는 레트로필리아적(retrophilia) 외형들을, 매끄러운 외피로 다시 포장된 구시대성을 풀어헤치고 늘어뜨린다. 성긴 서사들이 해제해 내는 것은 마냥 좋았던 과거가 아닌 크기를 지닌 물질, 어딘가 불편하고 껄끄러운 감각 그리고 이 제한적 매개가 필요로 했던 지루한 과정과 그것을 유지, 보수하는 지난한 노동이다. 이들은 단순히 시대착오적인 잔재들이라기보단 과거를 먹어 치우며 무한히 내달리려는 기술이 그토록 숨기고 싶어했던, 우리 모두에게 놓인 유한한 시간 그 자체다. 전시는 이처럼 건너뛰거나 스크롤 할 수 없는 부피로 가시화된 시간 앞에서 각자에게 놓인 한 줌의 시간들을 마주하고 견뎌보기를 제안한다. ■ 곽노원
(1) 이 별칭은 CGI(Computer Generated Imagery) 발명 이후에도 이어지는데, 예컨대 조지 루카스가 설립한 최초의 CGI 제작 스튜디오/회사의 이름은 '산업적 빛과 마법(Industrial Light & Magic, ILM)이다.
Vol.20240921g | 한우리展 / HANURI / 韓우리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