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평생 사랑을 그리다

현백 현광국展 / HYONKANGKOOK / 玄白 玄光國 / painting   2024_0905 ▶ 2024_0915 / 월요일, 9월 12일 휴관

현광국_사과 #1_캔버스에 유채_31.8×40.9cm_1940

초대일시 / 2024_0905_목요일_04:00pm

2024 공주 이 시대의 작가展

주최,주관 / 공주문화관광재단 후원 / 공주시_공주시의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9월 12일,16~18일 휴관 9월 12일 임시휴관으로 인하여 9월 19일 정상개관

아트센터 고마 ARTCENTER GOMA 충남 공주시 고마나루길 90 2층 Tel. +82.(0)41.852.9806 www.gongjucf.or.kr www.facebook.com/gjcf2020 @gjcf_2020 www.youtube.com

공주를 사랑한 진정한 공주인, 공주의 작가1. 2023년 공주문화원에서 발간한『 공주의 인물 9, 공주의 미술인편』에서 처음으로 미술인 현광국(玄光國, 1923~2007)에 대한 인물사가 발표되었다.「 향토미술의 선구자, 현백 현광국 교육자 화백」 (장길수. 앞의 책 p215~235. 2023)에서 현백 선생의 가계와 생애가 서술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선생의 부친 현언동(1894~1938) 장로와 어머니 한을라(1899~1990) 권사의 3남 중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부친이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 중 3.1 만세운동 주도자로 옥고를 치루고 해직되어 서울의 배재학당으로 옮겨 1년간 근무하다 여기서도 일제의 압박이 심하여 평안북도 영변으로 이주하여 숭덕학교 교사로 근무하였기에 그곳에서 태어나 13살까지 살았다고 한다. ● 선생이 14살이 되던 1936년 가족은 고향인 공주로 돌아왔으나 부친은 병환으로 2년 만에 작고하였다. 부친은 영명학교에 다니던 중 윌리암(한국명 우리암) 선교사의 눈에 띄어 장학금으로 서울농림학교(서울농대 전신)로 진학하여 당시 식민지 조선의 주력산업인 농업 분야의 전문적 선진학문을 배웠다. 졸업 후 여러 학교에서 농업 과목을 가르쳤으며 따라서 이런 부친의 영향으로 어머니도 잠업보급지도자로 활동하게 되었고 덕분에 혼자 힘으로 남은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홀로 된 모친은 강건한 생활력으로 세 아들을 키웠으며 아울러 신실한 신앙심으로 지금의 중앙감리교회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한 평신도 지도자였다고 한다.

현광국_옛 영명학교_패널에 유채_37.9×45.5cm_1960년대

선생의 생애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신앙'과' 영명학교' 그리고' 지역사회에 대한 헌신'이다. 이러한 삶의 가치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이라 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 초기의 신도들은 종교를 떠나서도 새로운 문물을 먼저 받아들인 시대의 선각자들이었다. 따라서 지역사회에 봉사를 하거나 발전적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생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심과 지역사회에 대한 애착으로 교회와 학교 그리고 지역사회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 현백 현광국 선생의 영명학교와의 인연은 부친의 영향과 가계의 감리교회와의 관계로부터 이어온 것으로 뿌리 깊은 인연이라 할 수 있다. 일제의 신민화 정책에 의한 탄압으로 1941년 폐교되었던 학교를 해방 후 되살리기 위해 1949년에 영명학교 복교 추진위원회가 구성될 때 서기를 맡아 실무를 처리했으며 복교됨과 동시에 교사로 재직하며 영명학교와 대를 이어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평생을 학교 발전에 헌신하였으며 특히 미술에 소질 있는 제자들을 적극적으로 지도하여 길을 열어주었다. 영명학교 미술부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자랑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 한편으로는 교회와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로 신앙을 통한 사랑을 실천하였다. 공주중앙감리교회 터를 봉헌했으며 건축과 운영에 이르기까지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아울러 공주중앙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이사장을 맡아 운영하면서 교회와 지역사회를 위한 다양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식민지 시절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을 통하여 발전된 문물을 접한 지식인으로서 교육과 봉사를 통하여 사랑을 실천하고자 한 흔적들이 많다.

현광국_동네 풍경_패널에 유채_37.9×45.5cm_1968

2. 현백(玄白) 현광국(玄光國) 선생은 일평생 공주에 살면서 공주를 그린 공주의 화가다. 진정한 공주의 작가라 할 수 있다. 근현대기의 작가로서 공주 출신의 미술가들이 많지만 공주에서 살면서 활동한 작가는 거의 없다.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學校) 선배이기도 하고 공주고보 10년 선배인 월당 구종서(具宗書. 1912~1988) 선생이 북중학교교장으로 봉직하면서 공주에서 살았지만 미술 활동보다는 학교 행정에 치중하였기에 남겨진 작품이 거의 없는데 비하여 선생은 꾸준한 창작활동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현광국_정물_캔버스에 유채_40.9×31.8cm_1977

충남문화재단에서 발행한『충남미술연구총서3-충남미술문화사』 (2023)에 의하면 10년 정도 바로 윗세대인 공주의 구종서나 예산의 김두환이 가와바타화학교를 거쳐 동경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당시 유일한 작가 등용문이었던 『선전』을 통해 작품활동하여 국내에서의 입지를 다진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현백 선생은 가와바타화학교 3학년 재학 중 징용을 피해 만주로 피신했었고 이어서 해방을 맞이하여 귀국하였기에 초기에 작가로서의 활동 무대가 제한적이었다. ● 필자는 앞의 책에 「미술의도시 공주, 공주의 미술가들」이라는 소고를 실었다. 마침 충남문화재단에서 발간된 『충남미술가』 인명록과 공주문화재단의 「공주의 인물 9, 미술인편」의 내용을 비교했는데 현광국의 이름이 충남미술가인명록에는 누락되어 있는 것에 대해 언급하였다. 미술사 연구에서 기록에 의존하다 보니 중앙언론에서 다루지 않은 지방의 작가 활동이 누락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고 따라서 지역에서의 지역미술사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는 것이다.

현광국_아내_캔버스에 유채_91×73cm_1983~2004

현광국 선생은 그림에 현백(玄白)이라는 서명을 하였고 미술활동에서 호를 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미술계에서는 현백이라는 호가 이름보다 익숙하다. 이 호는 자신과 부인(백봉현)의 성에서 따온 것으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 담긴 이름이다. 선생은 일평생 손에서 붓을 놓지 않고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단 활동은 활발하지 못했다. 제자들에 의하면 패거리 정치에 혼탁한 화단의 시류에 휩쓸리는 것을 싫어해서 전시에 참가하더라도 작품만 걸고 모임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 선생은 공주고보 다닐 때부터 그림을 배우고자 했으나 일본인 미술교사의 차별이 심했고 졸업 후 국내에서는 마땅한 곳이 없어 일본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画学校)로 유학을 갔다. 가와바타 미술학교는 1909년 가와바타 교쿠쇼에 의해 설립되어 1945년까지 존속한 사설 교육기관이다. 많은 한국의 유학생들이 여기를 거쳐 갔다. 서양화가 박영선, 조목하, 배동신, 박고석이 가와바타 미술학교 졸업생이며, 정현웅과 구본웅도 이 학교를 나왔으며 김인승, 김경승 형제와 오지호는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데생 등 기초를 배웠다. 충청지역의 선배인 김두환과 구종서도 여기를 다녔다.

현광국_금강변_캔버스에 유채_91×117cm_1991

현백 선생의 화풍은 유럽의 인상파 이후 후기인상파의 영향이 커 보인다. 당시 일본에 불었던 인상파 열기와 연관되어 교육받은 결과일 것이다. 제자들에 의하면 고흐, 고갱, 세잔을 특히 강조했고 자연 현장에서의 직접 사생을 실천했다. 선생의 작업 스타일은 2,30호 정도의 캔버스를 현장에서 3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려 작업을 한 후 집으로 가져가서 물감이 꾸덕꾸덕해지면 마무리하고 사인하는 식이었다. 사진을 보고 그린다거나 상상해서 그리지 않고 반드시 현장 사생을 통한 작업 태도를 견지했던 것은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포인트라 할 것이다. ● 선생은 야외 사생을 나갈 때 주로 오토바이를 이용했는데 부인과 동행하기를 즐겼으며 때때로 제자를 태우고 다니며 사생을 하였다. 또한 학교 제자가 아니지만 특별히 배움을 요청한 경우 사생에 동행하기도 하였다. 제자들에 의하면 그림을 그리면서 항상 즐겁게 콧노래를 불렀는데 이러한 태도는 작가로서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 그림그리기는 즐거움이며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니 보는 사람도 즐거울 수밖에 없다. 야외 사생에 동행했던 제자들은 아직도 그 콧노래의 멜로디를 기억하고 있다.

현광국_사과_캔버스에 유채_31.8×40.9cm_1997

선생은 정물화도 그렸지만 특히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풍경의 소재는 극히 일부만 제외하고 오로지 공주의 자연이며 풍경이다. 공주의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애정 어린 눈길로 사람들의 사는 골목과 나지막한 집과 주변 풍경을 그렸다. 결코 명승고적을 찾아다니며 그린 풍경이 아니라 삶의 일부인 주변 풍경을 그린 것이다. 세잔이 말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생빅트와르 산을 비롯한 고향 풍경을 그린 것처럼 또는 고흐가 자신의 생활 주변을 사생했던 것처럼 공주의 자연 풍경은 그의 그림 소재이자 표현하고자 하는 조형 언어였다. ● 선생은 상당수의 정물화를 남겼는데 고흐나 세잔을 연상시키는 밀도 있는 조형의 세계를 보여준다. 세잔이 정물화를 통해 화면의 구도와 대상의 입체감을 추구한 것과 같이 선생의 정물화도 빈틈없는 구도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그림의 소재는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꽃과 과일, 기물이다. 정물은 주로 거동이 불편해진 말년에 그린 그림이 많았는데 그런 만큼 원숙한 필치와 색채를 구사하였다. 세부 묘사보다는 단순화된 형태와 화면의 분할과 구도 그리고 따뜻한 색채가 돋보이는 아름다운 정물화들이다.

현광국_눈비의 동해변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1999

현백 선생의 작품세계는 한국적 인상주의라 하는 남도화풍을 이끌어온 광주의 오지호와 같이 공주에서 토착적 후 기인상주의를 추구한 지역미술의 선구자로 기억되어야 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공주라는 소도시의 지역적 한계와 주류화단과의 연결고리를 갖지 않고 본인만의 자연에 대한 의지와 인상주의적 화법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갔다. ● 선생은 화단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제자들과 지역 미술계의 요구에 의해 소극적으로나마 미술 활동을 하였다. 1975년 공주의 중고등학교 미술교사들이 주축이 된' 금강미회(錦江美會)'가 결성되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이 또한 선생이 주도적으로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회원들이 명망 높은 지역의 선배 미술교사이니 상징적으로 추대하는 형식으로 회장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광국_데데울 나루터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1989

지역미술사에서 초기 미술활동이 미술교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은 공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지역에서 공통적으로발견되는 현상이다.' 충남미술협회'의 초창기 회원은 90% 이상이 교사들이고 그중 활동에 열성적이었던 사람들은 후에 지역대학에 미술학과가 개설되면서 교수로 옮겨가서 활동의 폭을 넓혀가기도 하였다. 서울에서도 전업으로 미술활동하는 것은 어려웠던 시기였고 따라서 지방에서는 더욱 열악한 상황이었다. 또한 그나마 지역에는 미술을 전공한 전공자들이 귀해 교사들이 가장 엘리트들이었다. 특히 일찍이 일본 유학을 다녀온 현백 선생은 지역미술계에서 명망이 높았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 그 외 단체활동으로 1979년 창립된 대전충청지역구상작가 모임인' 이신회(以新會)'에 참여한 것도 이 모임의 주축이었던 제자의 적극적인 초대 때문이었다. 또한 지역의 원로 미술인으로서 1981년 창립한 한국미술협회 공주지부 회원으로 정년퇴임 후에는 고문으로 참여하였다. 대체로 소극적인 활동에 그쳤다. 1990년에 창립전을 연' 공주풍경전'에 참여하였는데 이 전시는 선생의 평소 작업 방향과 맞는 활동으로 의미가 있었다. 이렇든 외부 활동에는 소극적이었으나 그리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선생의 작업 태도를 보면서 진정한 예술가는 활동을 많이 하는 자가아니라 작업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현광국_공주풍경 Ⅱ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1975

선생은 개인전이라 할 수 있는 큰 전시를 한번 했는데 미술계 작품활동이라기 보다는 의미 있는 사회활동의 일환으로 실행한 특별전시였다. 1984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영명장학회 기금마련을 위한 특별전이다. 선생의 작품들은 막내 아들(현정효)이 잘 보관하고 있어 이번 전시에서 많은 작품을 보여주게 되었는데 그중 70년대 작품이 적은 것은 그때 60여점을 출품하여 완판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작품을 구입한 소장자들을 찾기 어려워 그 시절의 작품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한편 상당수의 서예 작품이 보관되어 있는데 선생은 한글과 한자 서체를 독창적인 방법으로 연구하여 서체의 아름다움과 조형미가 담긴 높은 수준의 작품들이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다루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조명을 해 보아야 할 영역이다.

3. 많은 사람들이 글로벌을 이야기하면서 지역 소멸을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으로 보면 로컬의 가치가 지금처럼 관심 받았던 때도 없었다. 21세기의 세계관인 글로벌라이제이션은 전 지구가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로컬이 세계와 소통하는 것이다. 현대는 글로벌이 아니라 글로컬이다. 따라서 지역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 소멸을 넘어 발전적 미래를 이룰 수 있는 길이다. ● 공주는 역사의 도시이며 교육의 도시이고 아울러 문화의 도시다. 문화는 인간의 삶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공주는 오랜 세월 동안 호서지역의 정치, 경제, 행정의 중심지였고 그 역할이 축소된 근대 이후에도 교육도시로서 수많은 인재를 길러낸 고장이다. 사람의 일과 사람의 이야기가 풍부하다. 이런 것들이 문화적 콘텐츠가 되어 새로운 시대의 경쟁력이 될 것이다. ● 따라서 공주의 인물을 발굴하여 조명하는 것은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며 문화를 꽃피우는 일이다. 미술분야에서도 공주 출신으로 외부에 나가 성공한 작가에 대하여는 많이 알려졌으나 정작 공주에서 살면서 공주를 그린 공주사람에 대한 조명은 소홀하였다. 현백 선생의 예술세계를 통해 공주라고 하는 지역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길기대한다. ■ 임재광

Vol.20240905f | 현백 현광국展 / HYONKANGKOOK / 玄白 玄光國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