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붙잡을 수 없어도

정수연展 / JUNGSUYUN / painitng   2024_0901 ▶ 2024_0915

정수연_군중심리_종이에 펜_53×41cm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정수연 홈페이지로 갑니다.

드로잉 퍼포먼스 / 2024_0907_토요일_02:00pm

주최 / 언백그라운드 https://www.ubg-official.com/

관람시간 / 10:00am~06:00pm

해운대문화회관 HAEUNDAE CULTURAL CENTER 부산시 해운대구 양운로 97 (좌동 1458-1번지) B1 제1전시실 Tel. +82.51.749.7651 hcc.haeundae.go.kr

2024년 '언백그라운드'의 세 번째 전시는 경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청년 작가 정수연과 함께합니다. 작가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펜을 소재로 작품세계를 이어갑니다. 이번 전시는 정수연 작가가 주로 펼쳐 온 펜화와 드로잉, 펜에 대한 실험적 묘사는 물론 색과 면, 구상을 도입한 색채 작품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마련되었습니다. 작가의 작품 주제는 자연과 가장 맞닿아있으며, 이는 유년 시절 자연에 둘러싸여 자랐던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작가는 그간 의식의 흐름을 해석하기 위한 고민의 감도를 높이는 회화적 실험을 거듭해왔습니다. ● 그녀의 작품세계에서 펼쳐지는 노스텔지어적 풍경은 보이는 자연을 그대로 옮겼다기보다 작가의 과거와 현재에 가까이 닿아있는 '의식'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경험의 총체로부터 자신만의 풍경을 추출하며 펜이라는 매개를 활용해 회화로 펼쳐나갑니다. 잡기 어려운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을 적절히 판단하며 손으로 채집하고 평면에 옮기는 동안 작가의 단편적인 생각들은 다른 의식과 잠재적으로 이어지고, 이는 또 다른 이미지를 창출합니다. 그렇게 제작된 각각의 작품들은 반복적인 것처럼 보여지지만, 넝쿨처럼 얽히고 얽힌 의식의 산물들은 과거와 현재가 서로 비슷하면서도 이어져있는 밧줄처럼 유사성을 지닙니다. 이렇게 정수연의 작품은 작가의 흘러왔던 과거의 총합으로서, 바로 지금 현재를 살아갈 수 있게 지탱하는 이정표로 작동합니다.

정수연_흐르는_종이에 펜_53×41cm
정수연_Monoline, 종이에 펜과 아크릴채색_116.8×80.3cm_2021
정수연_Mono Mabling (1)_종이에 펜과 아크릴채색_80.3×65.1cm_2021

작가의 지나가 버린 유년 시절을 그리워하는 노스텔지어적 경험은 당시의 순수성을 되찾기 위한 여정의 일환으로 회귀적 과정을 지납니다. 그러면서 지극히 현실적인 동시에 지나간 과거라는 혼재된 특성을 지니며 정수연만의 '헤테로토피아'¹를 만들어냅니다. 이 세계는 곧 무의식과 의식이 뒤섞인 상태의 특유의 회화 세계입니다. 그렇게 작가는 시간이 뒤섞인 무의식의 흐름을 잡아내기 위해 현실에서 의도적으로 스케치를 생략합니다. 현실과 의식 사이의 세계를 정확하게 인지하기 위해 자기 자신과 투쟁하며 캔버스에 옮겨 담습니다. ● 작가의 작품에서는 무의식으로부터 추출한 미약한 의식이 그려지고, 그렇게 그녀의 상상과 실은 공존하게 됩니다. 이는 순수와 잔혹이 공존하는 그로테스크한 풍경과 닮아있습니다. 절대로 융화될 것처럼 보이지 않는 뒤틀린 풍경들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자아내며, 기괴하면서도 미학적인 풍경으로 연출됩니다. 누구에게나 공상은 심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공상은 아스라이 사라지기도, 갑작스레 눈앞에 펼쳐지기도 합니다. 전시의 제목 '꼭 붙잡을 수 없어도'라는 문장은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이정하 시집의 「간격」에서 따왔습니다. ● 「간격」 별과 별 사이는 얼마나 먼 것이랴. 그대와 나 사이, 붙잡을 수 없는 그 거리는 또 얼마나 아득한 것이랴. 바라볼 수는 있지만 가까이 갈 수는 없다. 그 간격 속에 빠져죽고 싶다.²

정수연_나열의 아지랑이_종이에 펜과 아크릴채색_91×73cm_2023
정수연_융화_종이에 펜_41×53cm_2019

이 광활한 우주에서 별과 별 사이는 얼마나 멀까요. 별과 또 다른 별이 의식과 무의식이라고 상정한다면, 그 거리는 또 얼마나 무한할까요. 그리고 그곳에서 인간은 얼마나 취약할까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의식의 흐름을 단숨에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손짓이 몸짓으로 이어지는 그 쉽지 않은 과정은 결국 작품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과거의 무의식과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나'라는 의식 사이의 길을 찾듯이 말이죠. ● 이번 전시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가지, 즉 잡을 수도 없고 쉽게 정의하기 힘든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들에 집중합니다. 이를 매개로 우리가 현실세계에서 간과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생각의 흐름인 무의식(과거)과, 보이지는 않지만 현재 사회에서 최우선시 되고 있는 의식(현재)에 대한 또 다른 가치를 재인식하고 마주하고자 합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의 작품을 아주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저 공상과 상상처럼 보이기만 했던 내면의 흐름을 오롯이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김보아

¹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헤테로토피아를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이면서도 그 밖의 다른 온갖 장소들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고 그것들을 전도시키는 장소, 말하자면 실제로 위치를 갖지만 모든 장소들의 바깥에 있는, 일종의 "현실화된 유토피아"라고 정의하였다. "이 반反공간, 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들. 아이들은 그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정원의 깊숙한 곳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락방이고, 다락방 한가운데 세워진 인디언 텐트이며, 아니면 목요일 오후, 부모의 커다란 침대이다." 이 글에서의 헤테로토피아는 정수연의 의식과 무의식의 혼재된 장소성으로 한정하고자 하였다. ² 이정하,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푸른숲, 1994.

정수연_꼭 붙잡을 수 없어도展_해운대문화회관_2024
정수연_꼭 붙잡을 수 없어도展_해운대문화회관_2024

내부의 흐름을 조망하며 ● 정수연은 경주에서 활동하는 1997년생 신진 작가로, 꽤나 젊은 축에 속하는 작가다. 그는 '펜'을 주요 재료로 사용한 펜화를 그린다. 주로 유년 시절 자연에 맞닿은 환경에서 자란 경험을 토대로 생태에 관한 기억, 생태를 보며 떠올린 심상, 과거의 생태가 현재의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고 이를 회화로 표현한다. 2016년부터 전시를 시작한 그는 지금까지 꾸준히 유사한 주제에 천착해 왔다. 그 주제는 바로 '의식'이다. 2024년 9월, 부산에서 개최한 『꼭 붙잡을 수 없어도』의 작품들 역시 자신의 의식에 관한 깊이 있는 고찰에서 비롯하며, 전시의 말을 빌리건대 그 의식의 '흐름 속 잡히지 않는 것'을 특히 새로운 경향으로 선보였다. 전시가 말하는 의식이란 바깥의 관계, 달리 말해 타인의 의식과 연동되는 외부자적 시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내부로서 정신 세계의 작동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전시는 자기 내부에 '흐르지만', 잡히지 않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일 테다. 그리고 잡히지 않는 것의 존재를 상정하면서, 전시는 의식이 흐른다는 그 속성 때문에 반드시 일어나고 마는 필연의 귀결로서 유동적, 비정지적 상태가 지니는 의의를 짚는다. ● 그러한 흐름의 상태는 전시 제목에서 같은 의미의 다른 말로 지시되었다. '붙잡을 수 없다'라는 문장을 썼다면 그것은 단호하고도 비관적으로 과거 혹은 미래를 바라보는 이의 시선을 제시함으로써 포기하는 마음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러나 전시는 '꼭 붙잡을 수 없어도'라는 의미심장하게 흐리는 말을 사용하여 어떤 여지를 남기는 듯했다. 붙잡을 수 없을지언정 계속해서 해내 보리라는, 끊임없이 이어가 보리라는 결심이랄까. 그것이 꼭 반드시 지켜지지 않아도 혹은 또 다른 일로 확장되었다가 다시 돌아오더라도 괜찮을 법한 작은 의지와 바람, 소망을 내재하는 소박한 마음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전시를 통해 무엇을, 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내부에서 흐르는 의식에 관해 어떤 것을 경유하기에 소박한 마음을 내비치게 되었던 것일까? ● 정수연의 그림에는 노스탤지어가 담겨 있다. 이는 과거에 경험한 것이 지금의 자신에게도 여전히 떠오름으로써 형성되는 감정이다. 작가의 경우 과거에 미련을 갖고 되돌아보며 후회 또는 회한을 남기는 것보다는, 그때 그 시절의 소중한 기억들을 지금에 와서도 지속적으로 간직하며 그것이 자신의 내부를 돌보는 데 활용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또한 그 기억 속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자연'과 맞닿아 있었던 시간들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는 자연에서 겪은 바를 '생태'에 관한 경험이었다고도 말한다. 이를 기록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그림이며, 그 속에서 '공상 흐름'이라는 세부 주제를 발동시켜 생태의 구조와 맞닿은 공상들을 흐르는 듯이 그려 낸다. 그에게 공상이란 의식의 탐구, 자기 내부에 대한 관찰과 유사하게 내면에 퍼진 생각들을 뜻하며, 그것이 시간마다 달라진다는 점에 주목하여 꺼낸 단어다. 어떤 시간에 자신이 놓일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존재와 관계없이 이미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주체는 무엇을 떠올리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그가 말하는 공상 흐름은, 생태에 대한 기억이 불쑥불쑥 솟아나는 순간들을 내버려두고, 잠시간 눈길을 준 뒤, 이를 붙잡아 그림의 화면 위로 불러내는 것의 연속을 말한다. ● 한편, 전시에는 2018년에 그린 초기작부터 2024년에 그린 최근작까지 다양한 시간에서 그린 그림들이 나란히 배치되었다. 「군중심리」(2018), 「괴이함」(2019), 「뒤틀림」(2019) 등 작가의 초기작은 인물, 나무, 꽃 등의 형상을 활용한 구체성을 지닌 회화로 나타났다. 작품 제목이 알려주듯 초기에 작가는 공포심이라는 감정에 집중하여 내면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군중 속에서 불안함을 잔뜩 머금은 표정에, 내면에서 일어나는 요동침을 시각적으로 그린 「군중심리」는 특히 정면을 보는 중심인물의 동세, 중심인물을 향한 모든 군중의 시선을 구도로 활용한다. 이는 그림에서 흰색 바탕 위에 검은색 펜만을 이용한 간단한 재료의 사용과 더불어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그보다 이후에 그린 「괴이함」, 「뒤틀림」은 주제부가 인물이 아니라 나무와 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정직한 나무, 꽃 모양이 아니라 제목이 은유하듯 괴이하게도 뒤틀린 형상, 비현실적으로 확장된 가지의 개수와 형태, 꽃과 나무가 현실에서는 융합할 수 없음에도 그러한 장면을 상상해 그린 초현실적 결합이 두드러진다. 점점 인물에서 자연물로 이동한 그의 시선과 함께 현실과 다른 비현실, 초현실의 표현들, 작가의 말을 따라 '애니메이션'에 가까운 표현들이 조금씩 그림에 등장하는 모습이다.

정수연_꼭 붙잡을 수 없어도展_해운대문화회관_2024
정수연_꼭 붙잡을 수 없어도展_해운대문화회관_2024

기괴함에 관한 공상을 지나, 2021년부터 작가는 '모노 마블링(Mono Marbling)'이라는 개념을 개발하여 새로운 방식의 구성에 주목하고 있다. '모노(mono)'는 '단색'을 의미하는 말로, 작가가 다채로운 색감이 아니라 두, 세 가지 내외로 선정한 적은 색을 중점적으로 사용해 화면에서 단조로운 톤을 의도했음을 드러낸다. '마블링(marbling)'은 기름과 물이 섞이지 않는 점을 이용해 물의 회전에 맡긴 자유로운 원형의 형태들이 공존하는 방식을 뜻하는 기법으로, 작가는 그 형태만을 화면 위에 가져와 이미지로 활용했다. 「Monoline」(2021)부터 「Mono Marbling」(2021) 연작까지 회오리치듯, 혹은 이를 변주한 사각의 패턴, 위로 뻗는 줄기 모양 등이 등장한다. 또한 화면의 일부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 칠을, 다른 일부는 검은색 바탕에 흰색 칠을 하는 등 구역을 명확히 분할하기도 했다. 이처럼 대비되는 표현들은 유기적인 '모노 마블링' 기법에 더불어 밝음과 어둠이라는 반대항을 병치시킴으로써 마치 정돈된 질서와 혼란한 혼돈을 동시에 내비치는 듯하다. 2022년쯤부터 작가는 '모노'를 확장하여 푸른 빛을 주조색으로 활용하는 청색의 회화를 추구하게 된다. 흑백의 대비가 인상적인 연작을 지나 「파편된 인상」(2022), 「꽃의 흐름」(2022) 등 초기작의 특징이었던 구체적인 형상이 다시금 불리면서 이에 마블링 기법이 첨가되었다. 유동하는 흐름처럼 그려진 꽃잎의 선들이 주요 형태를 이루는데, 화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색이 분홍색에 가까운 보라색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작품들과는 변별되는 지점이 생겼다. 점차 2023년이라는 비교적 최근의 작품으로 넘어가는 동안 작가는 본격적으로 파란색 계열을 돋보이게 한 회화를 제작해 나갔다. 「청의 흐름」(2022)을 비롯해 「몽상의 형상」(2022),「꿈의 시작」(2022) 등은 모두 밝은 하늘색, 중간 파란색, 짙은 남색 등 파란 색조 안에서 채도와 명도를 조절한 다양한 청색으로 구성된다. 특히 「청의 흐름」은 세로로 긴 직사각형을 이용해 가로로 긴 화면을 여러 구역으로 촘촘하게 나누어 파란색의 형태들이 위에서 아래로, 또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방향성을 가지며 이어지는 느낌을 자아낸다. 「몽상의 형상」 또한 비슷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딱딱한 도형이 아니라 이전에 보았던 것처럼 둥글게 회오리 짓는 마블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더 유동적인 형태를 띤다. 흥미로운 것은 두 작업의 제목에서 '흐름'과 '몽상'이 만난다는 점이다. 「청의 흐름」은 표면적으로는 청을, 내재적으로는 흐름을 조명하는 작업이며, 「몽상의 형상」은 내재적으로는 몽상을, 표면적으로는 형상을 조명하는 작업이다. 즉 작가는 초기 작업들에 이어 내면의 흐름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 표현의 방식을 넓혀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전시 기간 중에는 한 차례 작가의 라이브 드로잉 퍼포먼스인 「느리고 여유로운 나의 드로잉」이 진행되었다. 수 시간 동안 진행한 퍼포먼스에서 작가는 캔버스와 이젤을 전시 공간에 두고,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동세에 둘러싸여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타인들의 시선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고 여전히 이전과 동일하게 흐르고 있는 내면에 주목하고자 하는 작가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다. 그가 의식의 흐름, 생태에 관한 기억을 시작으로 모노와 마블, 청색을 활용해 가며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 조용한 유동의 상태들이 이를 바라보는 타인들의 내면에서 발동하여 또 다른 내면에의 탐구로 나아갈 것이라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수연의 이야기들은 그렇게 점층적이고 다채롭게 쌓여 간다. ■ 김진주

Vol.20240902g | 정수연展 / JUNGSUYUN / painitng

@ 제주비엔날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