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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원 홈페이지_moonewon.wixsite.com/moonewon 인스타그램_@artist_ewon
초대일시 / 2024_0829_목요일_05:00pm
축하공연 / 강지은 해금연주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공휴일 휴관
운중화랑 WOONJOONG GALLERY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로 137번길 14-3 Tel. +82.(0)31.703.2155 www.woonjoonggallery.kr @woonjoong_gallery
유독 더했던 무더위가 이제 끝나가고 있지만, 우리 화랑은 겨울풍경을 담은 문이원 작가의 작품으로 계절을 앞서갑니다. 전시 제목은 『신(新)사군자』展이지만,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없습니다. 화폭을 채운, 이름 모를 들풀들이 사군자(四君子)입니다. ● 작가는 야생식물 소멸의 순간을 포착합니다. 들풀들이 시들고 사라져가는 모습이 천연 자개 바탕 위에 펼쳐집니다. 소멸하는 들풀을 그린 검은 드로잉과 천연 자개의 무지개 빛 바탕, 이들의 극한 대비 속에서 들풀들은 새 생명을 얻습니다. 춤을 추는 듯한 들풀의 흩날리는 움직임과 조각난 자개의 추상성이 지극히 조형적이고, 그 조화는 미묘하고도 절묘합니다. 전통적인 재료를 빌었지만 그 미감은 더할 수 없이 현대적입니다.
드로잉 그리고 드로잉 ● 작업의 기반은 철저한 드로잉입니다. 늦가을과 겨울 중간 즈음이 되면, 야생 식물들은 그 종자를 떨구고 스스로 자연으로 돌아갈 채비를 합니다. 이 때가 작가의 드로잉 시즌입니다. 어김없이 사생도구를 챙겨 길을 나섭니다. 사진이나 영상매체의 도움도 없이. 들풀이 시들어 사그라지는 바로 그 현장에서 그 호흡이 잦아들며 흔들리는 모습을 드로잉에 담아 냅니다. 드로잉은 우선 초기 작업에서 작품의 밑그림이 되지만, 그 자체로도 관람객의 눈길을 잡아 끄는 매력이 있습니다. 좋은 작품은 좋은 드로잉에서 출발한다는, 평범하나 쉽지 않은 그의 원칙에서 작은 이탈도 없습니다.
기법의 경계를 넘나들다 ● 문이원 작업의 틀이 되는 그의 화폭에 우선 주목해야 합니다. 모양을 갖춘 자작나무 합판 위에 삼베천을 고르게 펼치고 찹쌀풀을 입히는데, 목재를 견고하게 잡아주고 표면에 자개를 단단히 붙이기 위한 과정입니다. 다시 황토를 얇게 칠하며 삼베의 결을 다듬어 줍니다. 그 위에 접착안료를 칠하고, 다시 건조하고, 사포질 하기를 반복합니다. 자개작업에 적합한 균질한 화폭을 만드는 과정은 이런 긴 여정과 큰 열정이 함께 해야 합니다. ● 미리 준비된 현장 드로잉이 이 화폭에 구현되는데, 그만의 자개작업이 그 핵심적인 과정입니다. 그러나, 문이원 작업의 차별점이 그가 자개작업을 한다는 점, 즉 작업의 주된 재료가 자개라는 점에 있지는 않습니다. 그의 자개작업은 긴 시간이 요구되는, 까다로운 과정인데, 그가 자개를 활용하는 고유한 방식이 중요합니다. 전통적인 나전(螺鈿) 기법과는 아주 다릅니다. 전통 방식에서는 자개로 대상을 직접 표현하지만, 문이원은 그가 그리는 주된 대상인 들풀들을 안료로 그리고, 오히려 그 남은 공간에 자개를 붙여 채웁니다. 전통적인 나전 기법을 과감하게 뒤집은 틈새에 페인팅을 접목시켰습니다. 재료선택에 거침이 없었던 만큼, 표현기법에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 천연자개 조각들은 다양한 색감으로 여백을 채웁니다. 자개조각들로 가득 찬 넓은 공간은 어두운 밤 큰 무대의 조명이 되듯 이름 모를 들풀들을 비춥니다. 마른 들풀들은 자개 여백의 힘으로 다시 살아나 화폭의 주인공이 됩니다. 이 여백은 때에 따라 푸른 하늘이나 은빛 강물결도 되고, 겹겹의 산등성이, 밤하늘 은하수 아니면 극지의 오로라가 됩니다. 이미 소멸했다고 생각한 들풀들에게 오롯한 다른 생명을 줍니다.
풍경에 담긴 생명 존중 ● 야생식물의 한살이 중 특히 그 시들어가는 모습에 착안합니다. 들뜬 우리 삶에 대한 일종의 '꺾기' 로도 보입니다. 사라짐에 대한 공포와 허무함을 들풀에 대입해서 들여다봅니다. 작금의 젊음과 아름다움은 언제나 끝이 있고, 쇠락과 죽음의 앞에는 언제나 젊음과 삶이 있었습니다. 타오르는 감정이나 솟구치는 욕망도 그 마지막은 쇠락, 그리고 소멸에 양보합니다. 우리는 모두 사라짐과 끝을 향하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뜨겁고 거침없는 하루하루 또한 우리 모습입니다. 들풀은 결국 시들고 사라지지만, 거센 바람, 세찬 빗줄기에 맞서며 척박한 땅을 꿋꿋하게 견디고 살아갑니다. 작가가 들풀들을 사군자(四君子)와 같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 "여기서 이 미움 받는 작은 야생 식물들이야 말로 발생한 어떠한 일들에 휘둘리지 않고 자연의 섭리 안에서 최소한의 영양과 최소한의 땅과 최소한의 관심을 먹고도 꿋꿋하게 한 길을 가는 선비와 같게 나는 느낍니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야생의 식물들은 동양화에서 자주 다뤄지는 사군자(즉, 덕망 높은 학식 있는 군자에 빗대어 추앙받는 매화, 난, 국화, 그리고 대나무)와 다를 바 없이 여겨집니다." (작가 노트 중 발췌) ● 야생 속 들풀과 문명 속 인류를 함께 바라보며, 일상의 소중함과 생명의 존귀함을 은유하고 있습니다. 작은 것도 큰 것도, 부분도 전체도, 모두 하나의 유기적 움직임이고, 함께 환경을 이루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들풀과 사람은 하나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우주적 관점이 그의 작품에 개입되어 있는 듯합니다. 약 45억년 전 탄생한 지구에서 원생생물, 즉 모든 동식물과 균류의 하나의 공통 조상인 세포생물이 약 18억년 전에 태어나고, 여기에서 약 4억 4천만년 전 현재의 솔잎난 비슷한 형태의 최초의 육상식물이 뿌리를 내립니다. 각자 다른 환경에서 적응하고 진화하여 일부는 식물이 되고 다른 일부는 인류가 되어 이 세상을 구성하는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야생과 문명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들풀도 우리와 함께 이 행성을 나누어 구성하는 일부로서 그 존재는 물론 그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존중되어야 합니다. 이들의 죽음, 살아감 그리고 다시 태어남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간절함.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검은 실루엣 속 서정성 ● 차가운 겨울 바람이 때로는 마음을 맑게 해주기도 합니다. 마른 풀잎들이 매서운 바람과 부딪치며 부르는 노래가 귓가로 전해질 무렵. 황량한 들판, 콘크리트벽 그늘 아래, 아스팔트의 갈라진 웅덩이, 그리고 강기슭 모래톱까지. 스케치북을 들고 그렇게 십여 년 넘게 쉼 없이 드로잉 여행을 떠납니다. 고요하고 내밀한 자연 속에서 바람과 풀잎이 전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 열정을 쏟았던 모습 그대로 말라버린 들풀 이파리들. 이들이 그대로 바람에 몸을 맡기고 가벼운 춤사위를 펼칩니다. 이 경이롭고 신비한 순간이 문이원의 화폭에 담깁니다. 마른 들풀들의 춤사위가 아름다운 햇살을 뒤로 하여 펼쳐집니다. 그의 화폭에서는 더 다채로운 햇살들이 검은 들풀들을 아름답게 비춥니다. 들풀을 둘러싼 자개들은 자줏빛 노을이, 보랏빛 새벽안개가, 쪽빛 바다가 되어, 들풀들의 춤사위에 이야기를 더합니다.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그의 작품을 보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눈길을 멈추게 합니다. 관객은 이른바 그림멍을 자각합니다. 들뜨고 부산한 마음이 차츰 진정되고 평온을 찾습니다. 수많은 색색의 자개조각들은 작품 속 검은 들풀을 비추지만, 또한 그 감상자의 얼굴까지 환하게 비춥니다. 그 얼굴은 나는 저 들풀과 어느 만큼 다른가? 이런 질문을 하는 듯합니다. 운중화랑은 문이원의 작품이 주는 이 특별한 감성을 여러분과 함께 나나고 싶습니다. ■ 김경애
저는 '미움받는 야생식물'을 그립니다. 뭇사람들이 자신의 사유지에는 없었으면 하는 식물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개인의 기호에 따른 가치판단을 기반으로 하는 단어인 '잡초'. 하지만 식물학자 피터 델 트레디치(Peter Del Tredici)는 잡초는 제거의 대상이 아닌, 생태적, 사회적 그리고 심미적 가치의 대상이라고 역설합니다. 저는 2010년 겨울, 산책 중에 그들에게 매료되었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순간이 피터의 말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경험이 작업을 하게 된 동기이면서 동시에 작업의 주제가 되었고, 빛을 등진 그 식물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으로부터 '검은 춤' 프로젝트가 탄생합니다. 이후 겨울마다 이들을 만나러 야외로 나가 그들을 스케치하고 영상에 담고 키 작은 그들을 처음 조우했을 때의 찬란한 순간을 기억하며 작품에 담아왔습니다. 사계절 끝에 다 타고 남은 재처럼 가장 가벼운 상태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다음 세대의 생을 기약하듯 생의 마지막 움직임을 남기는 일년생 야생식물. 한 가지 색상으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하늘빛을 표현하기 위해 차용한 자개 빛으로 실루엣만 남기고 화면을 채워 나갑니다. 이렇게 '미움받지 않아도 될 우리 주변의 식물'은 완성됩니다. ● 일부 작은 부분이 전체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는 자기 유사성을 띠는 프랙털(fractal) 구조와 같이 야생의 작은 잡초를 통해 인간의 삶, 그리고 더 나아가 지구, 우주의 삶 사이의 유사성을 같은 선상에서 관찰하고 고찰하게 되었습니다. 생성-삶-소멸, 그리고 또 다른 생, 이 반복이 세상의 대다수 이치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잡초라 일컬어지며 도외시되는 야생식물에서 소우주(microcosm)를 떠올리며 그들이 경험했을 사계절과 야생에서 만났을 동물들을 상상하며, 그들이 느꼈을 감정들을 문인화 풍의 스케치에 시와 글귀를 적고, 영상화했으며 평면자개회화에 표현해 겨울의 야생식물에 관한 사유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모색해 왔습니다. ● 공진화(共進化/coevolution)는 한 생물 집단이 진화하면 이와 관련된 생물 집단도 진화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진화생물학의 개념입니다. 즉 포식자와 먹이 생물, 숙주와 기생 생물, 공생 생물 등과 같이 생물 간에 일대일 관계가 형성되어 서로 영향을 주는 진화 과정입니다. 저의 소재, 야생식물 역시 인간과 함께 역사적, 진화적으로 뒤엉키며 이 무관한 두 종 사이 안에서 독특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습니다. 이들은 상대가 없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행동, 적응, 생리, 유전적인 변화를 일으킨 역사를 일구어 왔습니다. 게다가 잡초의 적응도가 높아지고 분포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인간의 태도와 기술과 행동도 변화해 왔습니다. 저는 개발되고 길들여진 도시에서도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 콘크리트 틈, 한강 안 섬을 둘러싼 시멘트 블록 위에 생긴 모래톱 위에 서식하는 야생풀들이 제초제와 날카로운 제초기로부터 달아나 뿌리내린 동물과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람의 행위가 개입되지 않은 '날것'인 야생초들은 어쩌면 생태계를 떠받들고 있는 기반이 되는지도 모릅니다. ● 여기서 이 미움받는 작은 야생 식물들이야말로 발생한 어떠한 일들에 휘둘리지 않고 자연의 섭리 안에서 최소한의 영양과 최소한의 땅과 최소한의 관심을 먹고도 꿋꿋하게 한 길을 가는 선비와 같게 나는 느낍니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야생의 식물들은 동양화에서 자주 다뤄지는 사군자(즉, 덕망 높은 학식있는 군자에 빗대어 추앙받는 매화, 난, 국화, 그리고 대나무)와 다를 바 없이 여겨집니다. ■ 문이원
슬픈 아우라: 이름 없는 존재가 추는 소멸과 생성의 '검은 춤' ● "물기는 바람과 땅속에 스며들고 나를 먹여 살리던 새파랗던 잎새들은 천근만근 구차하게 달라붙어 중력의 힘으로 나를 저 나락으로 끌어당긴다. 또 다른 생명을 위해 나를 멸하는구나." / "그 검은 춤은 물거품처럼 슬픈 아우라여라." (문이원, 식물스케치 옆에 적은 글귀 중.) ● 잃는다는 것에는 전혀 다른 두 의미가 내재해 있다. 낯익은 것들이 차츰 사라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일이기도 하다. 익숙한 것들이 사라짐으로써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문이원의 예술에서도 '잃음'의 순간이 있었다. 길을 잃었던 시기. 그 시기에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났고, 그 새로운 것이 그에게 들어와 상처와 보듬음의 반복 속에서 자개처럼 영롱한 작품으로 탄생해 우리에게 다가왔다.
잃음의 시기 ● 문이원은 메마른 겨울의 야생식물이 다음 생을 위해 쓰러져 가는 순간, 바람을 만나 흔들리는 모습을 하늘빛처럼 아름다운 자개를 배경으로 표현하는 작가다. 하지만 기억할 것은, 이러한 작업이 그의 대표적인 표현 방식이기는 하나, 그의 작업이 이 하나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겨울이 되면, 그는 야생식물의 모습을 촬영하고, 그것을 스케치하며, 그 순간 느껴지는 감정을 시로 표현하고, 영상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 등 다양한 작업을 이어간다. 이 모든 과정이 그가 '검은 춤 프로젝트'라고 명명한 그의 전체 작업이다. 이 프로젝트를 공식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것은 2018년으로, 그는 그해에만 서울(⟪검은 춤_허공에 그린 몸짓⟫, 갤러리도스)과 뉴욕(⟪허공의 검은 춤⟫, 뉴욕한국문화원)에서 두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9년 만에 공백기를 깨고 선보인 개인전들이었다. 문이원은 2003년 첫 개인전(⟪동풍_울리다, 다물다⟫, 관훈갤러리)을 시작으로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의 간격으로 개인전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2009년 개인전 ⟪What's your plan B?⟫ 이후, 오랜 기간 전시의 공백기를 가졌다. 그 기간 간헐적으로 기획전과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다. (이 시기는 작가가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립대(UBC)의 유학 시기와 겹쳐 있어, 이 때문에 활동이 뜸해진 측면도 있다.) 문이원은 "점점 시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몇 년 동안 작업을 안 했던 시기"가 있었다고 밝혔는데(인터뷰), 이 시기가 공백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때를 작가의 '잃음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긴 공백기를 가졌고, 이 시기 전후로 인물을 표현하던 이전 작업(2003~2009)이 야생식물의 마지막 몸짓을 표현하는 작업(2018~)으로 변모했다.
'검은 춤'을 추기까지 ● 문이원은 '잃음의 시기'에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세 가지 주요 계기를 경험했다. 바로 '매료의 순간', '학문적 구축', 그리고 '자개의 발견'이다. 2010년에서 2011년으로 넘어가는 어느 겨울날, 작가는 우연히 언덕배기에서 빛을 등진 채 서 있는 야생식물들의 실루엣을 보고 강렬하게 매료되었다. 그 순간이 깊이 각인된 것이다. 그는 그때부터 이 모습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이 매료의 순간이 바로 현재 작업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 그 후 작가는 유학을 떠나, 유학을 마무리할 즈음 '아토그래피컬 문인화(a/r/tographical literati painting, ALP)'라는 새로운 장르를 제안하는 논문을 완성한다. 이 논문은 야생식물 촬영, 스케치, 작시(作詩), 영상 제작, 자개 작업 등을 순환적이고 통합적으로 선보이는 문이원 프로젝트의 토대가 된다. 물론 이 논문은 '매료의 순간'에서 파생된 '학문적 구축'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학 시절, 그는 '미적 경험을 타인과 공유하기'라는 프로젝트를 위해 무작정 아무 버스나 타고 가다 마음이 이끄는 곳에 내렸고, 그곳에서 광활한 해변에 있는 야생식물을 마주하게 된다. '매료의 순간'을 다시 만난 것이다. 이 순간은 프로젝트의 소재가 되어 그림이 되고, 시가 되고, 영상이 되었고, 많은 이에게 호평을 받았다. 이 경험은 조선시대 문인화(literati painting)와 a/r/tography(아토그래피)의 유사성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아토그래피컬 문인화'라는 학문적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a/r/tography는 '예술(art)'와 '기록(graphy)'를 결합한 개념으로, 하나의 예술 교육과 실천 기반의 방법론이다. (2002년 InSEA(국제 예술 교육 학회) 세계 대회에서 Irwin과 de Cosson이 처음으로 발표했다.) 문인화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예술가의 내면세계와 철학적 사유를 담아내는 통합적 예술의 한 형태다. 문인들은 시(詩), 서(書), 화(畵)를 결합하여 하나의 예술 작품을 완성했다. 아토그래피 실천가는 예술 작업과 학문 연구, 교육 등을 종합적으로 수행하는 예술가이자, 연구자이며, 교육자로, 장르를 넘나들며 예술적 실천을 선보인다. 문인화가도 그림, 서예, 시 등을 창작하며, 단순히 화가가 아니라, 철학자이자, 교육자, 사상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문이원은 이 두 장르의 유사성을 파악하여, 전통적인 문인화의 정신을 현대적인 a/r/tography와 결합한 새로운 예술적 접근인 ALP, 즉 '아토그래피컬 문인화'를 창안했다. ALP는 예술 작품을 단순히 시각적 결과물로 보지 않고,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며 교육적, 학문적 가치를 창출하는 전인적(全人的) 예술을 의미한다. 문이원은 겨울에 야생식물을 탐색하고, 그것을 스케치하고, 시를 짓고, 이를 자개 작업으로 만들고, 영상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다. 이것이 바로 ALP의 실천이다. 작가는 '검은 춤 프로젝트'로 ALP를 구현하고 있다. ● '자개의 발견'은 문이원 작업의 형식적 도약을 이끌었다. 식물의 본래 색이 사라지고 실루엣만 남아 바람에 흔들리며 검은 춤을 출 수 있는 것은 그 식물이 빛나는 하늘을 등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느낌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문이원은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빛을 표현하고 싶어 홀로그램 안료를 찾게 되었고, 그러다 자개를 발견했다. 자개의 발견에 가슴 벅찼던 그는 망설임 없이 자개 표현 방식을 배우기로 결심했고, 먼 거리를 마다치 않고 자개 장인을 찾아가 배우는 끈기로 자신만의 의미 있고, 독특한 표현을 획득했다. 이로 인해, 꺼져가는 식물의 몸짓은 화려하게 반짝이는 자개를 배경으로 더욱 빛나게 되었다.
신(新)사군자: 포스트휴머니즘의 사유 ● '매료의 순간', 문이원이 본 것은 단순히 바람에 춤추는 검은 실루엣뿐일까? 그 실루엣이 아름다운 것은 봄의 생기와 여름의 푸름, 가을의 충만을 지나, 소멸해 가는 마른 줄기와 이파리가 다음 생을 위해 쓰러져 가며 보여주는 몸짓에서 비롯된다. 작가는 이 몸짓을 통해 자연의 섭리와 우리의 삶을 성찰한다. "그들의 삶 안에는 생성과 소멸, 소멸이 있은 후에야 또 다른 생성이 가능한 생의 순환이 담겨 있음을, 그들 삶이 우리네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작업노트) 일년생 야생식물의 마지막 순간, 메마르고 뒤틀린 몸짓은 소멸을 앞에 둔 슬픈 몸짓이지만, 작가는 "그들의 스러짐에서 다음 세대로의 순환이라는 순리와 희망"을 발견한다(작업노트). 문이원은 이 모습을 가장 찬란한 순간으로 보았고, 그래서 그 검은 실루엣, 바로 그 검은 춤의 아우라를 반짝이는 자개로 드러내고자 했을 것이다. 자개는 하늘빛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몸짓을 보여주는 식물의 아우라이기도 하다. ● 사실, 자연의 섭리와 생의 순환이라는 주제는 '검은 춤'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문이원은 초기 작업에서 인간의 욕망과 공허한 현대인의 삶을 탐색해 왔으며(「중독」 시리즈, 2004), 소통 부재로 인해 고립된 인간, 더 나아가 고립된 우주적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그 사유를 확장했고(「섬」 시리즈, 2006), 2009년 ⟪What's your plan B?⟫에 이르러서 욕망으로 들끓는 인간 문명이 초래한 폐해를 작업으로 선보였다. "'따뜻한 겨울'과 '시원한 여름'을 즐기는 사이, 우리는 맑은 공기와 안전한 음식, 아름다운 풍경, 건강한 우리들의 2세, 그리고 다양한 종의 동·식물들을 잃어버리고 있다."(작업노트) 작가는 인간 중심의 공허와 고립이라는 주제에서 점차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 시각으로 전환하며, 지구 행성에서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이 낳은 폐해를 성찰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유는 '검은 춤'에 이르러, 해러웨이(Donna Haraway)가 자신을 포스트휴머니스트가 아니라 '퇴비주의자(compost-ist)'라 칭하며 우리는 human이 아니라, humus(퇴비, 두엄)라 한 것과 유사하게, 문이원 또한 인간(human)의 소멸이 다음 세대 또는 다른 종의 생성으로 이어지는(해러웨이식으로 말하면 퇴비가 되는) 자연의 섭리와 생의 순환으로 확장된다. 이러한 사유의 중심에는 포스트휴머니즘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 ● "신사군자"에는 문이원의 포스트휴머니즘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사군자(四君子)는 유교 문화권에서 군자(君子)의 덕목을 상징하는 네 가지 식물(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을 의미한다. 이는 다분히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적 사고방식을 반영한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이 식물들은 정직, 순결, 겸손, 인내를 상징한다. 그런데 지구 행성적 차원에서 이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야생식물, 흔히 잡초라 불리는 식물은 쓸모없는 존재인가. 지구 행성적 차원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가 군자라 부르는 식물들에 비해 가치 없는 게 아니다. 야생식물은 지구 생태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어쩌면 인간의 선택을 받지 못해 더 자유로운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 과연 이들[야생식물]의 삶과 돈 주고 팔려나가 결국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그들[관상용 꽃과 식물]의 삶 중 어느 게 더 나을까."(인터뷰) '사군자'라는 개념에도 인간중심주의의 폭력성이 내재해 있다. ● 문이원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인간중심주의의 시각을 넘어 지구 생태적 관점에서 새로운 사군자를 그린다. 그가 그리는 군자는 위계적 지위체계의 상층부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이름 없는 존재들이다. 문이원은 이 존재들의 생기(봄), 푸름(여름), 충만(가을)이 아니라, 소멸(겨울)의 모습이야말로 지구 행성의 진정한 군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그가 '신사군자'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고매한 난초도, 지조 있는 매화도, 기품있는 국화도, 신의를 지키는 대나무도 아니다. 생의 마지막에서 한없이 가벼워진, 힘없는 야생식물의 마지막 몸짓이다. 그러나 이 몸짓은 강력하다. 쓰러져 흙 속에서 썩어 다음 세대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의 안으로 스며들어, 다음 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 자개는 '진주의 어머니(mother of pearl)'로 불린다. 모래알 같은 이물질이 살을 파고들 때, 아픔을 견디며 그것을 감싸고 또 감싸서 진주를 만들듯, 자개도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문이원의 자개 작업에는 인내와 끈기, 아픔, 그리고 희망이 담겨 있다. 자개의 화려함 뒤에는 타찰법(打擦法)과 할패법(割貝法)으로 자개를 붙이고, 6개월 동안 말린 후 안료를 넣어 다시 말리며 사포질하는 일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마지막으로 영롱한 광이 날 때까지 끊임없이 사포질하는 인고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래서 자개 작업의 영롱한 빛은 소멸하는 존재에 대한 찬사이며, 그 마지막 몸짓을 위한 격조 있는 노래이자, 찬란한 다음 생에 대한 희망이다. 아름다움은 결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문이원이 쌓아온 인고의 시간은 아름다움이 되어 지금 우리 앞에 이렇게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 안진국
Vol.20240829c | 문이원展 / MOONEWON / 文履元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