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제1회 충북설치미술전-들숨, 날숨

배정문_신동욱_장백순_차재영_최민솔展   2024_0820 ▶ 2024_0830 / 일,공휴일 휴관

초대일시 / 2024_0821_수요일_05:00pm

세미나 / 2024_0821_수요일_04:00pm

주최,주관 / 충북미술협회 후원 / 충북문화재단_충청북도 기획 / 조혜령

본 전시는 충청북도, 충북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창작집중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음.

관람시간 / 09:3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충청북도교육문화원 예봄갤러리 Chungcheongbuk-do Students Educational and Cultural Center Yebom Gallery 충북 청주시 청원구 밀레니엄2로 21 Tel. +82.(0)43.229.2617 www.cbec.go.kr

설치미술, 삶을 제작하는 즐거움 - 호(呼): 내쉬는 날숨 ● '설치(installation)'는 "사물을 어떤 장소에 배치함"을 의미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전세계적으로 확산된 하나의 장르, 일종의 표현 방법을 가리키는 미술용어이기도 하다. 설치미술(installation art)은 전통적인 회화나 조소와 달리 표현매체를 주변 환경이나 장소와 밀접한 관계 아래 배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2024년 이곳에 모인 5명의 작가들(배정문, 신동욱, 장백순, 차재영, 최민솔)도 단순히 갤러리 공간에 각자의 작품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곳을 새로운 공간으로 정의하고, 구조화하고, 작품화하였다. 이들의 작품을 포함한 갤러리는 천장, 바닥, 벽면은 물론 외부의 자연환경까지 포함하는 종합적 공간이 되었다. 이 공간에서 작가들이 천천히 함께 내쉬는 첫 날숨은 충북 지역에서 최초로 선보이는 '설치미술전'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흡(吸): 들이마시는 들숨 ● 설치미술은 삶과 예술의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일상성'을 특징으로 한다. 재료의 사용에서도 기존 매체를 넘어 시간, 빛, 소리, 움직임을 포함한,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종류의 소재와 매체를 사용한다. 배정문 작가가 사용한 연필, 저울, 종과 같은 일상 사물은 물론, 장백순 작가가 지게차를 사용해 전시장으로 옮겨 온 거대한 도가니(*쇠붙이를 녹이는 그릇)도 조각가들에게는 익숙한 삶의 도구들이다. 이처럼 우리 삶에서 흔히 사용하거나 접할 수 있는 일상 사물 또는 '파운드 오브제(*found object-일상 사물이 예술가에 의해 발견되어 예술작품이 된 것)'들은 작가들 각자가 가슴 깊이 들이마신 삶의 모습을 나타내기에 적절한 재료들인 것이다. 이 재료들을 갖고 그들이 구현해내는 '숨결'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소소한 행복과 놀라움과 같은 감정부터 사람과 사람,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단상, 그리고 기후위기와 난민문제와 같은 사회 현상까지 그들이 내쉬는 숨결에 고루 묻어있다.

2024 제1회 충북설치미술전-들숨, 날숨展_ 충청북도교육문화원 예봄갤러리_2024

자연과 호흡하기차재영 작가는 우리가 늘 마주하는 자연과의 만남에서 경험했을, 그러나 익숙해서 쉽게 잊었을 어느 한 순간의 감상을 거대하게 증폭시켜 놓는다. 전시장의 한쪽을 천정부터 바닥까지 길게 늘어뜨린 핑크색 천들은 우리를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는 일몰의 시간으로 데려간다. 이 황혼의 시간을 프랑스에서는 '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 일컫는데, 이것은 해질녘 온 세상에 붉은 기운이 스며들어 멀리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차재영의 해질녘 풍경에도 흰 뭉게구름이 이미 붉은 기운을 잔뜩 머금고 있으며, 이 붉은 구름 덩어리가 작가가 '죽은 사물'이라 설명한 흰 창틀을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가고 있다. 낮과 밤 사이의 시간인 황혼은 이렇게 삶과 죽음, 빛과 어두움, 친숙함과 미지의 것들이 서로 스며드는(permeate) 혼재의 시간이다. 이 자연의 시간을 전시장이라는 인공의 공간에 현시하기 위해 작가가 핑크색 천이라는 재료를 선택한 것은 매우 명민한 전략이다. 천이라는 재료는 우리가 항상 입고 다니는 의복 등에서 사용하는 우리 삶에 매우 깊숙이 들어와 있는 재료이면서, 동시에 매우 가변적(plastic)이어서 쉽게 조형적(plastic)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재료이다. 가벼운 소재이지만 웅장한 스케일이 가능해 자연의 숭고미까지 연출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한 핑크색은 주로 대자연(Nature)이 여성으로 의인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품어주고 보호해주는 자연에 대한 차재영의 예술적 은유(metaphor)라 할 수 있다.

신동욱_변이 變異_우레탄, 철사, 폴리머클레이, 동선_가변설치_2024

차재영의 예술적 자연이 핑크색 천이라면, 신동욱의 예술적 자연은 금붕어로 대표된다. 작가의 어린 시절 동네 양어장과 냇가에서 만난 금붕어는 그에게 생명과 환경, 그리고 삶의 방식을 알려주는 매개자로 기능한다. 원래 금붕어가 붕어의 돌연변이이지만, 인간의 욕심은 더 화려하고 더 아름다운 관상용 금붕어의 여러 품종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 신동욱은 양어장이나 수족관이 아닌, 동네 도랑이나 냇가에서 자라나는 금붕어들이 보다 색이 연하고, 날렵한 지느러미를 가진 것을 관찰하였다. 인위적인 환경에서 야생 자연으로 돌아갔을 때 그 환경에 재빠르게 적응하여 겉모습뿐만 아니라 생활 패턴도 변신을 거듭해나가는 것이 금붕어인 것이다. 그렇게 생(生)의 힘은 작은 생명체에서도 강력하다. 신동욱 작가의 금붕어들은 전시장에서 또다시 변이(變異)를 반복한다. 예술이라는 가상(假像) 공간에서 변이는 제한이 없다. 우리가 흔히 만나는 유금 금붕어의 몸체는 다양한 크기로 반복되고, 그 위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자연의 모든 색을 흡수해 입고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이 몸체들에 붙어 있는 지느러미와 꼬리의 형상이다. 마치 몸에서 나온 거미줄이나 촉수처럼 형형색색의 철사와 동선(銅線)으로 서로 연결되고 뻗어나가고 있어, 벽과 바닥과 같은 물 한 방울 없는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여 변이하는 중인 모습으로 보인다. 이것들은 이 가상공간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기이하고 생경한 변종 생명체와도 자유롭게 접속 가능하게 해 줄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말한 반복과 변이를 통해 새로운 형상의 존재를 창조하는 과정을 우리는 신동욱 작가의 금붕어들에서, 그리고 관객의 마음의 눈에서 자라나고 있는 또 다른 예술 생명체들에게서 목격하는 것이다.

장백순_1800°_도가니, 흑연, 미니어처 등 혼합재료_가변설치_2024

지구와 호흡하기장백순의 「1800°」는 보다 직설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환경과 그 안의 인간 그리고 자연의 삼라만상을 드러낸다. 정제될 금은, 녹여낼 철과 쇠를 품고 1800도의 용광로에 들어가는 흑연 도가니는 매년 더 뜨거워지고 있는 지구를 상징한다. 지금 우리는 인류세(Anthropocene) 시대를 살고 있다는 주장이 통용될 정도로 인간은 인간만의 편의와 욕심을 위해 지구 생태계를 훼손해가고 있다. 장백순 작가가 버려진 도가니에 심은 죽은 나뭇가지는 지구 온난화 현상에 의해 멸종 중인 수많은 종(種)들 중 하나를 대변한다. 이렇게 생태계 위기, 기후변화, 해양오염, 쓰레기 문제를 유발시킨 인간들은 이 뜨거워진 대지에 발을 딛고도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작가가 일일이 색칠하고 변형시킨 작은 피규어들이 재현하는 인간 군상은 "들끓는 도가니"라는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 자신의 번지르르한 모습에 도취되어 인간 이외의 다른 종(種), 그리고 지구 생태계의 문제에는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발이 딛고 있는,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검은 땅은 이미 균열과 융기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땅, 도가니를 떠나 갈 곳이 없다. 지구환경의 모든 것들, 즉 대지와 바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생태계의 모든 종들, 거기에 인간이 쓰고 버리는 것들(things)조차 모두 상호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에서 벗어나야, 척박한 땅 버려진 도가니가 다시 생명을 품는 지대로 전환될 것이다.

배정문_난민 & 종말의 방주_유리섬유, 합성섬유, 천연이끼, 연필, 주물종, 저울_가변설치_2024

배정문 작가는 기후위기뿐만 아니라 난민 문제까지도 우리의 문제로 시각화한다. 그는 전시장에 망망대해를 떠도는 난민들의 배를 위태롭게 위치시키며 설치미술의 묘미를 보여준다. 베트남전 당시 보트로 탈출했던 보트피플(Boat People)부터 오늘날 기후변화로 빈곤국인 고국을 탈출하는 기후난민(Climatic Refugee)에 이르기까지 난민문제는 비단 국가와 국가 간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2018년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난민을 둘러싼 첨예한 찬반논쟁에서 경험했듯 여기에는 종교, 문화, 인종, 젠더 갈등뿐만 아니라 인간의 혐오감정, 그리고 차별과 배제의 정치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복잡한 관계들이 배정문의 「난민&종말의 방주」에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아상블라주(assemblage)되어 있다. (프랑스어로 모으기, 조합, 결합의 뜻을 지닌 '아상블라주'는 설치미술이 가진 혼합매체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기법이기도 하다. 매체특정성을 고집하던 모더니즘의 종언과 함께 등장한 설치미술은 특정 매체에 대한 관심 없이 주로 혼합매체를 이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살고자 하는 의지와, 목적과 방향을 잃고 떠도는 모습이 모두 투영된 방주는 작은 바늘저울 위에 간신히 뱃머리를 대고 있다. 하지만 저울은 방주에 태운 생명의 가치를 가늠할 바늘을 이미 상실했으며 이 무게를 얼마나 더 버텨줄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상태이다. 방주에 가득 핀 이끼는 난민이 처한 어둡고 습한 환경, 먹을 것 하나 없는 빈곤함을 보여주며, 그 사이사이 가시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는 수많은 연필들은 난민들이 경험했고 앞으로 맞닥뜨려야 할 위험과 상처, 그리고 도전을 표상화한다. 그들은 이 난관을 뚫고 과연 연필로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고, 새로운 삶을 그리는(draw)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을까. 하늘에 달린 종들이 과연 그들에게 구원을 알리는 종이 될까, 아니면 종말을 알리는 조종(弔鐘)이 될까. 그것은 우리의 환대(hospitality), 그것도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환대 여부에 달려 있다. 다만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말한 환대는 우리가 이방인 또는 난민과 맺는 관계뿐만 아니라, 나와 타인, 혹은 인간과 다른 종과 맺는 관계, 언어와 기술이 맺는 관계까지 포함하는 인간 생활 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현상이자 행위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에서 우리 앞에 놓인 설치작품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삶을 위한 예술(art for life's sake)'의 전형적인 예시들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작품들을 통해 우리의 삶에서 자각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발견하고, 인간과 세계가 맞이하게 된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을 사유하기 때문이다.

함께 호흡하기 ● 숨을 내고 들이는 행위인 '호흡'의 또 다른 의미는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과의 조화"이다. 사실 개개인의 들숨과 날숨의 사이에서는 무한한 시공간이 발생한다. 그 시공간을 채워나가는 것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 이곳에 펼쳐진 작품들의 시공간을 채워나가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설치미술은 이처럼 직접적인 참여를 통한 관람자의 체험을 중요한 요소로 여긴다. 그리고 그 체험은 총체적이다. 각 개별예술, 즉 회화·조각·건축·음악·무용·연극의 요소가 통합되어 제시되는 설치미술에서 관객은 스스로 특정 시간에 공간의 내부로 구성되는 역할을 담당한다.

최민솔_무제_포맥스에 아크릴채색_가변설치_2024

이번 전시에서 관객에게 이러한 '총체적 수행성'을 경험하게 한 작품은 최민솔의 「무제」이다. 최민솔 작가는 포맥스판을 연결해 거대한 사각형의 미로를 만들었고, 이 미로를 성인의 눈높이, 즉 허공에 띄웠다. 이 미로의 입구는 두 곳이며, 내가 걷고 있는 눈앞의 길 외 다른 곳의 풍경은 차단되기 때문에 관객은 길을 따라 걷다가 어느새 다른 곳에서 들어온 다른 이와 마주칠 수 있다. 길의 폭은 상당히 좁아 두 사람이 동시에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에 누군가는 양보를 해야 한다. 누가 양보할 것인가, 어떻게 양보할 것인가? 주저앉을 것인가, 비껴 다른 길로 물러설 것인가? 아니면 그를 따라 같은 방향으로 가기로 선회할 것인가? 최민솔 작가가 미로로 상징화한 세계와 같은 곳에서 우리는 종종 타인과 마주한다. 타인을 마주할 때 나타나는 태도는 각자의 삶에서 복잡한 교육체계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체득되고 내면화된 아비투스(*habitus-특정한 환경과 조건에 의해 형성된 성향이나 사고, 판단, 행동의 체계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용어이다)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어린아이와 성인이 다를 것이고, 세대 간, 남녀 간, (부르디외의 용어대로) 사회적 계급 별, (요즘 유행을 따른다면) mbti 유형에 따라 다른 행동이 나타날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최민솔 작가는 이러한 아비투스의 발현 관찰을 위해 사회적 장(場, champ)을 시야를 제한하는 미로로 구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조형적 장은 아래가 뚫려 있어 이 장 바깥에 위치한 사람들에게는 미로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준다. 거대한 사각 박스로 얼굴은 가려진 채 이리저리 움직이는 다리들을 보면 미궁 속에 갇힌 반인반수 미노타우로스,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편법으로 미궁을 탈출한 다이달로스와 이카루스, 그리고 실타래 실을 풀어가며 미궁 속에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대적하고 무사히 탈출한 테세우스의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우리는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미지의 타인과 관계맺음을 하고,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이며,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어떠한 삶의 태도를 취할 것인가. 작가가 보여주고자 했던 한정된 공간에 위치한 인간, 사회적 인간(homo socius)의 다양한 존재론적 모습이 무겁지 않게 이처럼 유쾌하게 연출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 덕분이다. ● 설치미술의 '감상'은 관객이 직접 작품을 만지거나 그 위에 드로잉을 하고, 작품 안에 들어가고 나가는 등의 직접적인 참여 행위는 물론, 다른 이의 참여 퍼포먼스를 바라보며 스스로 작품의 의미를 창출해나가는 행위도 포함한다. 이렇게 작품과 호흡을 함께 하며 매순간 의미를 완성해가는 설치미술의 '감상 퍼포먼스'는 예술의 제작행위라 할 수 있다. 이곳에 작품을 설치한 예술가 다섯 명만 예술가인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작품과 함께 들숨 날숨으로 호흡하며, 각자의 삶을 따로 또 같이 제작하는(poiesis) 예술가인 것이다. ■ 한의정

Vol.20240820e | 2024 제1회 충북설치미술전-들숨, 날숨展

@ 제주비엔날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