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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 서울문화재단
도서출판 나무아트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4층 Tel. +82.(0)2.722.7760
'극장의 우상'을 비판하는 이흥덕의 극장 ● 얼마 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모 연구소에서 『바른 용어를 통한 사회통합의 모색』이라는 세미나를 했다. 거기에서 기존에 통용되는, 그러나 그들에게는 탐탁치 않은 용어 몇 개를 그들의 입장에서만 "바르게" 변경한 샘플로 제시한 모양이다. '자본주의'는 '시장경제'로, '약육강식 자본주의'는 '조화 자본주의'로, '정글 자본주의'는 '상생경제'로, '과당경쟁'도 '시장경제'로, '승자독식 자본주의'는 '소비자 선택 자본주의'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의 사회공헌'으로, '보호무역주의'는 '무역 규제주의'로, '낙수효과'는 '소득창출효과'로, '재벌'은 '대기업집단'으로, '시장점유율'은 '소비자 선택율'로, '시장지배적 사업자'는 '소비자 선택 사업자'로, '급진적 자유주의'는 '순수 자유주의'로, '자유방임주의'는 '불간섭주의'로, '사적 소유'는 '개인적 소유'로 바꾸자는 거다. SNS에 떠도는 이걸 보고 실소가 나왔다, 실소인 듯했으나 정확하게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웃프다"는 게 맞을 듯하다. 팩트 왜곡의 진지함이 엄연한 현실을 정반대로 뒤집는 프레임 전환을 "학문적으로" 창출하는 곡학아세로 여겨져서다. 자본의 기득권 행태를 보편적 윤리로 윤색하는 이들의 상징조작에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내 삶의 조건이 씁쓸했다. ● 자본주의. 현대판 성전에 추증된 물신의 사회·경제학적 보통명사. 물신.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고 냄새조차 없으되 욕망을 지배하는 갓파더. 자본주의의 절대자인 물신이 횡행하는 이 지상은 오래전 예수가 성전에서 쫓아 버렸던,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던 자들이 재림한 세상 같다. 그 세상에서 물신은 정치·사회·경제·종교·학문·문화 전 부분에서 권력으로 군림하며 그를 추종하지 않는 자들의 입지는 단 한치도 존재하기 어렵다. 구조적으로 체계화된 자본의 권능은 도처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시스템을 쉼 없이 생산한다. 그 결과 자본에 탐닉하는 사람들의 질주는 지상에 그들만의 천국을 성형해냈다. 천국보다 더 천국 같은 판타지의 자본 파라다이스. 비록 그 실체는 신기루이되, 지상의 모든 것들은 그 판타스틱한 일류전의 달콤함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 그런 자본을 우상으로 신봉하는 이 세계는 온갖 욕망 서사가 다양한 드라마로 상영되는 멀티플렉스 만화경이자 요지경 같다. 1관에서는 전쟁, 2관에서는 폭력, 3관에서는 사기, 4관에서는 욕망, 5관에서는 착취 등 궁극적으로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폭주 이야기가 쉼 없이 상영되는 판타스마고리아이자 헤테로토피아이고, 그러면서도 이 드라마들은 생생한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드라마와 다큐가 일치된 이 묘하고도 이상한 시공간에서 우리는 자본의 위계에 의해 규정된 노예 계급의 피동적인 '나'를 본다. 생각은 물론 감각조차도 왜곡되어 불안과 초조와 절망으로 '내'가 '나'인지 모를 정도의 인지부조화 상태에 도달한 나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겐 지옥인 이곳이 누군가에게는 천국이기도 할 것이다. 자본의 제국을 욕망의 실현장으로 믿는 이들에게 이곳은, 희망 고문이 신앙으로 대체된 이율배반의 플라스틱 이데아이기도 하니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 이를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 한다"로 패러디 한 스피노자. 다시 그 둘을 "I shop therefore I am"으로 동시 차용한 보드리야르는, 생각-욕망-소비행위가 일원화된 현대인의 삶을 이 레토릭으로 개념화했다. 그리고 보드리야르의 "I shop therefore I am"을 건조한 고딕체 문자와 신용카드로 몽타주한 바바라 크루거는 자본주의의 핵심을 시각적으로 명료하게 증명했다. 34년 전 일이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광고 양식으로 바로 그 자본주의를 역설적으로 공격한 것. 당시 이 작품이 대중에게 소구되며 선풍적인 반응을 일으킨 것은, 자본주의 모순이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충분히 인식 되었다는 것이겠다. 현실에 대한 예술가의 개입은 당대성을 작업에 수렴하며 삶의 화두를 깨우치는 일이기도 하다. 작가마다 시선의 방향, 말하는 방식, 작업 개념이야 서로 다르고 또 다양하겠지만, 궁극적으로 동시대에 대해서 자기 입장을 표출하려는 태도는 공통적이다. 화가 이흥덕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가 반인간적이고 지옥 같으며 부조리하고 천박해도 우리는 당면한 삶을 살아내야만 하는데, 그러기 위한 유일한 무기가 이흥덕에겐 미술행위다. 자본이 지배하는 현장에서 겪은 세상살이를 그 특유의 그리기로 발언하는 행위. 이때 작업은 이흥덕의 내밀한 일기이자 고백이고, 동시에 그가 살고 있는 현재를 형상적 표현방식으로 관객에게 제시하는 다큐-드라마이기도 하다. 희극과 비극, 사실과 가상, 비애와 풍자를 넘나드는 이흥덕 특유의 미적 프로세스와 형식이 거기에 있다. 이럴 때 작업은 자연스레 크리틱을 동반하며 모순에 저항하는 무기가 된다. 자신에 대한 성찰과 함께 현실 세계를 향한 반성적 작업 태도는, 타자와의 공감을 통해 연대로 연결되는 것이기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 이흥덕은 지금까지 40년 이상을 초지일관, 자신의 일상으로부터 유래하는 내면의 변화와 객관적 현실을 오버랩하는 작업을 해왔다. 미시적 개별 현실과 동시대적 화두를 어떤 형상 문법으로 어떻게 화면에서 현전시킬지 그 형식을 개진하면서 지속했다. 망막에 포착된 모든 것을 기억에 저장해놓고, 현재 대면한 사건(개인적 경험이든 미디어를 통한 정보든)의 현장 스케치에 그 기억 속 사람과 사건을 소환해서 현재화한다. 지금의 시제에 과거부터 집적해온 소재들을 호출해서 주제에 삼투시키는, 이른바 시공의 몽타주인 셈이다. ●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80년 이흥덕은 「다무」그룹과 1981년 「겨울 대성리」전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줄곧 권력과 자본의 위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심리적 도상을 회화로 드러내 왔다. 1980년대 5공 정권의 반민주적 억압에 억눌린 소시민의 불안을 표출하는 『쫓기는 사람』 연작과, 유린당하는 여성 이미지로 마초적 폭력에 노출된 시대성을 은유한 『소녀』 연작이 회화작업의 출발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에는 정치와 자본의 속물성에 의해 잃어버린 광장과 밀폐된 동시대를 환유하는 『까페』 연작, 1990~2010년대에는 팽창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낙원인 메갈로폴리스(서울) 밖으로 밀려나는 소시민들의 개별적·집단적 소외를 다룬 『지하철』『신도시』『중산층』 연작과, 그 사이에서도 원초적 에로스로 서민적 감성을 낙천적으로 유머화한 『春』 연작도 그렸다. IMF를 겪은 분단국에서 몰락하는 서민의 신산한 삶과 불평등한 신자유주의를 풍자하는 2010년대 『지옥도』 연작은 자신의 실존을 도시 서민의 애환으로 전형화하는 풍속적 도상의 결정체였다. ● 이어지는 맥락에서 2010년대 후반부터 지금에 이르는 최근 대작들은, 현란하게 포장된 소비 자본주의의 감성을 바로 그 '감성'으로 비판하는 역설적 형상 문법으로 구성되었다. 본인의 체험-심리-타자의 입장-사회화된 사건들이 상호 엮이면서 갈등하는 소재들의 배치, 원색으로 예민해진 색상, 사실성과 만화적 캐릭터의 접합, 재현성의 적극적 왜곡을 통한 표현성, 골법용필骨法用筆의 붓질, 캔버스에 접착하는 안료의 물질감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능청스런 유머로 또 때로는 예민하고 진중한 그로데스크로 드러냈다. 이흥덕식 풍자라고나 할까, 등장하는 숱한 사물과 익명의 캐릭터들이 상호 얽히거나 단절하며 동시대 자본주의의 다종다양한 현상들을 비판적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그 결과 사람-사물-사건이 엮인 각 시기마다의 사회적 환경과, 거기에 연동되는 작가 본인의 개인적 독백을 동시에 담은 실존성을 확보했다. 작가의 개별적 정서가 사회적 층위의 집단성으로 확장되었다가, 다시 각 개인의 실존적 문제로 환원하며 동시대적 문제의식으로 타자에게 전유되는 소통 프로세스도 창출했다. 특히 근작인 『가족』과 『기지개』와 같은 도회적 일상성의 긴장감 배후에 도사린 2020년대식 관계론적 리얼리티의 섬세하고도 예민한 시선과 표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이흥덕의 40년 작업을 관통하는 형상성의 무대는 '자본 전체주의'고, 이흥덕은 그것을 사람-사물-사건의 연대기로 상영되는 극장에 비유했다. '리얼'과 '로망'이 동시상영 되는 이 극장은, 이흥덕이 과거 작품 제목으로 표기했던 "행복한 나라에서 쓴 금요일의 일기"에서의 "행복한 나라"이지 싶다. 지극히 패러독시컬한 이름의 이 극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의 장소성과 함께 시대 현실을 반영하는 회화 공간이다. 자본에 의한 불평등이 야기하는 여러 현상들을 이 극장에서 이흥덕과 우리는 함께 겪어 왔고 겪고 있고 또 보고 있다. "자본이 성장할수록 불평등은 심화된다"는 토마 피케티의 지적처럼, 불행하게도, 자본이야말로 자본주의가 원천적으로 안고 있는 모순이다. 자본과 불평등이 뫼비우스의 띠로 현시화된 구조. 바로 이 지점이 우리 시대 언어와 감성과 인지능력까지 이 부조리에 포획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조건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유명한 명제도 이제 "자본은 존재의 집"으로 그 실체적 의미가 바뀐 듯하고, 예술과 문화도 자본에 의해 역으로 규정되는 실례들이 우리 시대 삶의 표지이자 전형처럼 보인다. 자본이야말로 동굴과 시장과 극장과 광장을 아우르는 우상, 즉 현실권력이란 뜻이다. ● 이흥덕은 사람-사물-사건을 모아 이런 자본주의에서의 세상살이 를 제시한다. 다만 사실을 '사실적'으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자신에게 축적된 숱한 경험을 각 작품마다의 내용에 따라 재배치하면서도, 각 작품마다의 맥락상 서로 다른 문법과 성격을 연출해낸다. 형식 변주이자 실험이다. 어떤 배우가, 등장하는 영화에 따라 주연-조연, 선인-악당, 부자-빈자로 그 역할을 달리하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사실 제시와 함께 때로는 과장과 생략과 왜곡으로 그리기 방식을 변주하면서 말이다. 작가의 표현성이 우선하는 형상적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가 사실적으로 반영된다는 점에서 리얼리스트의 면모 또한 드러난다. ● 물론 이흥덕은 자신을 투사로 설정하고 직접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작업을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계몽도 선전 선동도 아닌 개별적 체험의 조형적 발화와 타자와의 수용이 동일선상에서 이루어지는 예술의 민주적 소통기능의 바탕에서, 작품이 관객에게 미적 판단으로 소구되기를 바란다. 이런 경우 작업은 정치적 현실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소통과정에 의한 문화적 맥락으로 기능하게 된다. 민중미술의 공격성과 궤를 같이하면서도 독립적으로 활동해온 40년 이력을 보면, 이흥덕의 고집스러운 작가주의적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이흥덕만의 성격과 체질에 의한 심미적 정치성이라고나 할까.
이흥덕의 2,000년대 이후 근작은 맑고 화사하고 달달하되 비릿하다. 자본주의적인 유미적 감각으로 부르조아 특유의 계급적 욕망을 투명하게 형상화한 고명도 화면엔 안락함과 긴장감, 나른함과 공격적 방어본능이 극적으로 혼재한다. 화사한 대낮 해변에서의 휴식과 풍요로운 과일들의 색채와 같은 사람들의 의상과 피부가 발산하는 원색 소비의 향연. 쾌락과 포만, 멋드러진 패션과 몸매가 명도 높은 비유로 가득하다. 여유. 중산층의 꿈의 현장. 유예된 노동의 시간. 달달한 판타지다. 그러나 불편한 디스토피아란 느낌이 스멀스멀 피부로 감지된다. 플라스틱 모형처럼 성형된 과일과 그 과일을 모조한 듯 화장된 피부 하부층으로 함몰하고 있는 인간관계와 관계 사이의 냉담함이, 작렬하는 피서지의 햇빛으로 투명하게 포장된다. 철저할 정도로 쾌락적인 그리기로, 그런 쾌락을 준거로 설정한 자본주의를 야유하는 공격성이 주사바늘처럼 내 피부를 뚫고 근육으로 침투한다. 서늘하다. 그리고 뭔가 초조해진다. 그 초조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러자 화면으로부터 내 감각으로, 감각에서 의식으로, 그리고 그런 의식으로부터 인식을 거쳐 마침내 형상 회화의 매력적인 지점에 도달한다. 미적 쾌감이 인다. 이흥덕의 그림에 동화된 것, 좋다. ● 이흥덕은 쉼 없는 형상性의 체화와 축적을 통해서 형상禪을 구현해낸 작가(라고 나는 여긴)다. 2020년 이후 근작에서 이런 진화된 시각과 촉감으로부터 유래하는 촉지적 상징성이 야기하는 미적 쾌감은 더 선명하게 도드라진다. 놀랍다. 영화처럼 드라마틱한데도 오히려 더 생생하게 현전하는 화면은, 그래서 그 예민한 감각을 넘어서는 리얼리티로 내 몸과 마음에 각인된다. 이 정도의 작품성이면 한국 현대 형상 회화에서 하나의 지점을 확보한 것이라고 나는 감히 주장한다. 이 말은 이흥덕이 자신의 주제와 회화적 문법과 어법을 고수하면서도, 쉼 없는 그리기의 변주와 확장을 통해 그만의 고유한 미적 지점을 창출해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제껏 민중미술을 위시한 여타 현실참여적 미술의 양식적 궤적에서 벗어난 지점에 도달한 이흥덕만의 유니크한 회화 스타일은, 자신을 포함한 소시민의 개별적 개인사로부터 한 시대의 집단성으로 확장하는 형상성을 획득한다. 사건과 사실의 기록이란 기계성을 넘어서서, 사람-사물-사건이 날 것으로 조우한 상황에서 돌출하는 현상을 감각적 인지이자 인지적 감각으로 포착한 언어다. 그 발화는 긴 시간 부조리한 세계와 반복적으로 대면해서 작가 내면에 점착된 마음의 토로겠지만, 이 시각언어가 타자에게 수용되면서 우리 시대를 직관적으로 감지하고 반성할 수 있는 기제로 작동하게 된다. 그 시각성은 타율적으로 분단된 나라의 자본주의에서 사람-사물-사건이 관계하는 삶의 기록이자, 반대로 그 기록을 소화해낸 소시민 작가 이흥덕 본인의 진술과 표현을 뒤섞은 결과물이기도 하다. 체험과 (무)의식과 성찰과 미감이 질료로 작동하면서 만들어낸 메시지로 말이다. ● 우리 삶과 일상은 사람과 사람, 주변을 형성하는 환경인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발생된 사건으로 구성된다. 개별적 개인사이거나 공동체적 사건이거나 간에 사람-사물-사건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우연히 발생한 해프닝이든 정교하게 기획된 이벤트든 간에, 그런 작은 단위적 단서들이 시대와 사회를 경천동지하게 만드는 거대한 현상의 근거가 된다. 이흥덕의 작품도 그런 과거와 현재가 연속되는 부조리의 재귀와 현전에 대한 일기이되, 그것이 형상화되며 타자와 대면하는 순간부터 자본주의와의 긴장된 관계를 형성하는 기제가 된다. 한 폭의 회화에 담긴 서사가 환유나 상징을 통해 사회적 의미망으로 확장하는 과정의 바탕에는 작가와 관객의 미적인 연계성이 있다. 작가 내면에서부터 발아한 형상성이 관객의 마음에 이르는 이행성移行性 Transitivity의 단서, '미적 쾌감'이 그것이다. 그것이 연속성까지 확보하게 될 때 합리적 '선호관계'와 같은 공리적 가치가 성립하게 된다.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 등가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흥덕의 작업은 그의 마음으로부터 유래한 지향성이 그만의 독특한 감각적 형상으로 이행했기에, 서사를 용해해버린 그 형상성을 미적으로 소구한 관객은 이후 용해되었던 서사를 다시 주체적으로 소급해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이흥덕 회화의 급소와 장점이 동시에 있다.
이흥덕의 회화는 지금 그리고자 하는 내용과 연관된 과거 사건들이 화면 이곳저곳에 자리하며 구성된다. 소환된 기억 속 소재는 작가에 의해 의도적 그리기로 전환되며, 그것은 내용과 표현의 충돌과 조응을 이루는 질료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의외의 국면, 낯선 분위기, 이채로운 그리기 방식으로 재생산된 화면으로 변주된다. 사건의 재현이나 현상의 기술을 넘어 그의 (무)의식과 감성과 인식적 지향성이 두루 얽힌 기능으로 작용하면서. ● 그 대형의 화면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과 사건은 공간이나 시차의 간극처럼 각자 고립되어있다. 이 사람 저 사람과 이 사건 저 사건이 상호 연관성 없이 여기저기 돌출해서 배치된 상황의 재현이자 묘사다. 다양한 상황에서 각각 고립되었던 인물들이 작가의 의도로 소환되어 복합적으로 연계된 이 화면은, 긴 세월 동안 관찰로 스케치된 소재들이 종국적으로 모이는 저수지이자 주제의 요람인 셈이다. 하루가 모여 일주일이 되고, 그 일주일이 모여 한 달이 되듯, 이흥덕의 기억에 인화된 이 숱한 고립들이 콜라주되어 현실적 의미망으로 전환한 화면. 그것은 선형적이거나 연쇄적인 시간의 나열이나 설명이 아니다. 오늘 일어난 사건과 연관된 기억 속 사람이나 사건들이 불연속적으로 호출되어 화면을 형성하는 구조다. 각 단위 사건을 하나의 화면에 불러 모았다가 다시 각 단위로 균열시키면서 전체와 부분, 서사와 형상, 사건과 주제가 충돌과 종합을 통해 맥락화되는 과정과 과정의 몽타주다. 기승전결로 도출되는 합리적 결말의 플롯이나, 단 하나의 통로로 환원되는 내용의 일방적 코드를 파기한 형식이기도 하다. 예컨대 작품 『떠도는 사람들』을 보자. 과거와 현재, 산 자와 죽은 자, 그 사이 좀비와 귀신들까지 떠도는 한국근현대사가 공간과 시제를 넘어 현재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비극적 서사임을 은유하는 시점視點이다. 사건의 서술과는 전혀 다른 시각적 형상성의 작동이라 하겠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모방하는 대상에 집중하게 되므로" 단순 재현보다는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특히 "사건과 사건 사이에 필연적 또는 개연적 인과관계가 잘 설정될 때 더 설득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회화에 적용할 때는 전혀 다른 입장이 요구된다. 이흥덕의 화면에서 각 단위로 군집한 사람들은 특정한 상황에 함께 처해 있으되, 여타 타자들과는 인과관계가 없다. 앞서 언급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이흥덕은 사건과 사건 사이를 분절시키고 플롯의 구조를 해체하면서 자본주의의 단면 단면들을 여기저기서 노출한다. 시공간을 비틀면서 인과관계도 뒤집어버린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전복한 이 시각적 단층 사이에서 비로소 비끼어 나오는 혼돈의 상징성으로 더 리얼한 이미지를 증폭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소재와 공간을 평면화해서 사람과 사물과 사건과 시간을 중첩할 수 있는 평면 회화라서 오히려 가능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듯 잘 정제된 균형감이나 질서보다는 단절과 충돌의 혼돈이 불러일으키는 이흥덕식 상징은 좀 더 풍부한 해석의 단초와 통로를 제공해준다. 이런 특색은 과거에도 여전했다. 일테면 이런 식이다. ● "이흥덕의 그림은 세상 속에 있는 숱한 사람들과 그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바라보며 다시 세상을 이야기한다. 마치 지구하고도 한국, 그리고 서울의 어느 지붕 밑 식탁 위의 사과와 과도를 보면서 결국은 사과나 칼 세상 모두를 아울러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들의 사소한 일상인 사과나 과도를 보면서 다시 테이블, 방, 집, 동네, 서울, 한국, 지구로 역으로 확대한다는 뜻이다. 비극을 희극처럼 아이러니하게 얘기하는 그의 그림은 때로는 은유로, 때로는 상징으로, 때로는 기호물들은 통하여 욕망과 권력(힘)의 레토릭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사과나 사람을 '사과'나 '사람'이 아닌 싱싱함이나 부패로, 선과 악으로, 그리고 욕망이나 이성으로 환치시킨다."(김진하, 『회화-되돌아 보다』 중에서, 2000)
형상성은 시제나 사건의 단순 나열과 제시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화면에 담긴 여러 사건의 관찰과 기억들이 분절-해체-재조립을 통해 구축한 기표가 상징화를 통한 기의로 진화할 때 가능하다. 이흥덕의 그림은 기표가 곧바로 기의로 결정화되는 포스터나,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인포그래픽이나, 통계적 정보전달 형식인 팍토그램Factography의 직접적 소통체계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질료와 형태와 서사들이 직관적인 형상성으로 결과하는 명료함을 띄기도 한다. 다만 전반적으로 기표와 기의 사이 통로와 코드를 교란하는 역설적 서술과, 거기에 몸이 반응한 질료의 물질성 및 주관적 표현의 교집합으로 상징이 증폭되는 탈 지시적 어법이라서 소통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 의식과 무의식의 파편적 발아체인 워딩Wording이 작가의 문체로 전환하며 체계화되듯, 고립된 이미지들의 충돌과 차연이 의미화가 되는 이런 과정은, 이흥덕의 의도된 화면 구성 계획과 체질인 유희적 그리기의 쾌감이 결과적으로 엮인 유기적 형상성이다. 선형적 시간성이나 고정된 공간성에서 벗어나 예기치 않은 돌발적 화술로 기승전결 이야기 방식을 타파한 이 그리기의 역설은, 단 한 장면의 회화를 '단 한 장면'이라는 단점으로부터 역전된 전향적이고도 전지적인 시점으로 전환시킨다. 오래된 장르이자 한정된 평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층적 서사와 심층적 심리를 담아낼 수 있는 이흥덕식 회화의 응결점, 심리로부터 감각을 거쳐 인지에까지 이르는 형상성이 주제를 견인해내는 프로세스로 작동하면서 말이다. ● '형상'은 대상에 얽매인 재현적 '구상'에서 이탈해서 소재를 조형적으로 자유롭게 활용할 때 가능하다. 이럴 때 형상은 그 내용으로부터 미적 감각으로 환골탈태한다. 사람과 사물과 사건의 변형된 형태와 동세와 표정, 고정된 공간에서 이탈하는 구도와 배치, 변주되는 색상, 몸짓과 붓질, 그로 인해 화면에 점착하는 안료의 물질성 등의 조형적 프로세스가 내용을 최소한으로 응축시키는 형상으로 진화하면서 소재나 서사를 궁극적 시각성으로 화면에서 변태시킨다는 것. 정치만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라, 회화적 프로세스도 과정과 과정이 예측하기 어렵게 살아서 꿈틀대는 유기적 생물이다. 이런 프로세스를 거치면서 질료와 작가의 몸을 포섭한 회화는 비로소 시각적 일류전을 넘어선 리얼리티를 생생하게 담보해낸다. ● 다만, 이런 형상화과정을 통한 작품과 타자의 디테일한 소통은 그 진행 속도가 느리다. 느릴 수밖에 없다. 미적 쾌감은 작가의 심중 감정과 정서가 묘연한 물질 형식으로 상징화된 탈 지시적 언어라 그렇다. 작가의 의도가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 '아포리아'가 더 크게 발생하는 형상성의 속성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내용이 시각적·촉각적 형상성으로 변주나 폭주할 때, 관객 또한 직관의 주체가 되어 능동적으로 느끼고 해석해야만 비로소 그 형상적 속성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이행성'의 조건인 미적 쾌감, 즉 직관에 의한 작가-화면-관객으로 전달되는 미적 수용과정이 성립할 때라야 그것이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 주체는 스스로 길을 찾고-느끼고-깨닫는 존재다. 형상 회화는 작가의 주제 의식과 주관성에 방점을 둔 제작과정이기에, 관객도 스스로를 해석의 주체로 상정해야 그 소통의 간극을 메울 수 있다. 관객 스스로 생성시킨 접근 방식에만 방언과 같은 형상은 문을 연다. 그렇게 작품에 접근한 관객은 작가의 형상적 프로세스에 의해 소거된 서사들까지 소급 추적해서 확인할 수 있다. 감각으로부터 인식에까지 이르는 너비를 직관으로 수용할 수 있는 혜안의 개가다. 작가에 대한 경력이나 가십성 정보를 넘어, 작가 의식이나 감각을 수용할 수 있는 관객의 공감력이 필요한 건 그래서다. ● 지난 40년간 진행되어 온 작업 궤적과 연결되거나 단절된 이흥덕의 2020년 이후 최근작은, 그 자체로 그의 작업 과정이 획득한 성취물이다. 오랜 기간 군사독재와 자본주의와 넉넉하지 않은 화가의 일상에 짓눌린 채 버텨온 핍진성과 인간적 윤리인 사회의식과의 마찰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이되, 그런 현실에 그림으로 대응한 의지의 결과이기도 하다. 일상에서 조우하거나 비끼거나 갈등을 빚은 사람-사물-사건들로부터 유래한 관계와, 그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행위에 대한 이흥덕식 진술이고 이흥덕식 표현이자 이흥덕식 기호인 이 작품들은, 미적(이면서도 통속적)인 층위에서 우리의 일상을 반영해내고 있다. 그것은 서사를 담보하면서도 몸의 궤적을 통한 개별적 흔적이자 사회적으로 전형화된 기호이기도 하다. ● 소외, 부조리, 아픔, 폭력, 이별, 공포, 가난, 고독, 상실, 고통, 죽음, 아쉬움… 등이 리얼한 다큐멘터리로 펼쳐지는 곳이자, 우리 삶의 이야기가 생생한 곳. 도미에의 계급성과 풍자, 에드워드 호퍼의 고독과 고립,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비정형적 상징과 알레고리, 브뤼헬이나 단원의 일상과 풍속, 혜원의 에로스, 임멘도르프의 인위적으로 닫히거나 열린 공간, 발튀스의 발칙한 에로티즘, 벤샨과 보테로의 표정과 캐릭터, 불화(지옥도)의 동양적 평면성, 밀레의 소박한 겸허, 앙소르의 군중과 페르소나, 마그리뜨의 떼페이즈망, 호크니의 대중적 감각, 민화, 여타 만화적 상상력, 팝아트의 기호 등과 같은 레이어들이 모두 이흥덕의 용광로에서 용해되었다가 다시 이흥덕식 거푸집을 통해 이흥덕식 미장센인 이흥덕식 표현성으로 남는다. 상징주의, 즉물주의, 리얼리즘, 팝아트, 신구상, 민중미술, 형상미술, 만화와 영화 등을 종횡으로 넘나들면서 구축한 이흥덕식 형상성에서는 말이다. ● 그렇게 이흥덕식 희비극이 상영되는 이 극장은 우리 생이 치열한 인정 투쟁과 상징 투쟁을 벌이는 현장, 즉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주변부에 있다. 그곳에서의 '불안'과 거기에서 탈출하고자 미적으로 '저항'하는, 좌절과 도전의 변증적이고도 반복적인 연대기가 이흥덕 작업의 이력이겠다. 그의 작품이 부자나 권력자와 같은 기득권 계급이 아닌 소시민의 질긴 생존 일기라서 그런지, 아니면 자본주의 위계에 저항하는 블랙 유머와 정서를 포괄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더 그의 그림에 끌린다. 그러나 내 개인적 끌림보다 큰 매력은 그가 성취한 작업의 내용과 형식의 독자성이다. 40년 이상 자기복제 없이, 자본주의 하 '극장의 우상'인 물신을 '극장'과 같은 화면으로 비판해온 작가적 윤리와 자기 미술에 대한 개념이 그 바탕임은 물론이다. ● 5공 정권의 폭압에 억눌린 평범한 소시민의 불안과 초조의 독백과 토로에서부터, 동시대적 현상에 대한 성찰을 거쳐, 마침내 자본주의 전반적 부조리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단계에 이른 작업 진행 과정은 우리 사회의 변화와 다르지 않다. 작가의 당대에 대한 작업내용과, 새롭게 시도하는 조형성과, 40년이라는 시대성의 변모가 동일한 궤적과 속도와 긴장도로 작품에 반영된 동시대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정직하고도 뚝심 있는 미학적 태도와 작업 행위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또 당대의 사회 문화적 변동을 그의 마음과 몸이 충분히 감지하고 있어야만 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이흥덕을 '작가'로 신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는 긴 세월 동안 말이 아닌 작품으로 자기 내면과 자신이 살아온 시대와의 관계를 온존하게 증명해왔다. 가까운 후배로 긴 세월 그를 지켜 보아왔기에, 나는 그가 작업에 인생을 걸고 진실된 작업을 지속해왔음을 이렇게 분명하게 증언할 수 있는 것이다. ■ 김진하
Vol.20240819a | 이흥덕 Painting 2024-1982 / 지은이_이흥덕 @ 도서출판 나무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