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面不知 生面表識

정복수의 초상화를 전복하는 초상화

정복수展 / JUNGBOCSU / 丁卜洙 / painting   2024_0814 ▶ 2024_0914

정복수_정복수의 초상화를 전복하는 초상화-生面不知 生面表識展_나무화랑_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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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4_0816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1. 이 전시는 생성형이다. 작업실에서 내밀한 작업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작품을 공개하는 일반적 전시 양상과는 다르다. 전시 제목처럼 작가가 타자를 전시 공간에서 공개적으로 그리는 프로젝트라서 작품 결과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한 과정 중심의 전시란 뜻이다. 따라서 작가도 기획자도 긴장된 상태에서 숨 가쁘게 전시를 진행할 수밖에 없다. 공개 프로젝트라 작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의의 해프닝을 즉흥적으로 수용해야만 하는 일종의 모험성 이벤트라고나 할까. 아무튼, 한 달 동안 작가와 기획자는 한 공간에서 각각 자기 업무이되 공동의 일을 하며 붙어 있었다. 작가는 작업으로, 기획자는 기록을 하면서. 기실, 이런 기획은 이미 10년 전인 2014년에 이미 이곳 『나무아트』에서 한 번 한 적이 있다. 정복수의 「뼈 속 풍경」전이 그것이다. 전시장 벽 뿐만 아니라 바닥 전체에 캔버스를 깔고, 관객이 밟으면서 관람하는 가운데 그림을 그린 '바닥화'전이었다. 관객들 반응이 좋았고, 그림으로 둘러싸인 이 전시공간에서 관객과 작가가 함께 뒹굴거나 술을 마시며 즐겼던 기억이 선연하다. 그러니까 이번의 초상화전은 앞의 바닥화전과 내용이나 컨셉은 다르지만, 전시장에서 관객에게 작업의 테크닉이나 디테일 등 전과정을 공개하며 진행하는 커뮤니티 아트 형태의 전시란 점에서는 비슷하다. 초기 기획 노트에 메모한 이 전시의 의도는 "작가의 작업실에서 은밀하게 제작되는 회화의 상례를 뒤집는 실험적 프로젝트"로서 "과거 진부한 초상화에서 일탈한 초상화 개념 도출로, 오로지 작가 내면으로부터 표출되는 주체적 자화상과, 생면부지(生面不知)의 관객을 그리는 현장 초상화를 통해서 '초상화'에 대한 정복수식의 표현적 형상성"을 채굴(生面表識:모델과 작가의 관계를 인지하는 작업행위)하려던 것이었다. 이는 미술과 일상이 어떻게 작업으로 수렴되는지에 대한 실험이자, 작가와 관객이 작업행위라는 '구체적 현상'과 그 결과물인 이미지를 공유하는 '추상적 가치(소통성)'에 대한 실체적 접근이다. 또 회화와 관객과의 새로운 입장에서 접촉을 유도하는 해프닝이자 퍼포먼스이기도 하다. 낯섦과 익숙함의 경계를 넘어선 경험을 통해서 작가와 관객은 기존 작가중심의 일방적이고도 위계적인 전시 문맥에서 벗어난 조우를 하게 되고, 이는 회화가 기획 방식에 따라 얼마나 적극적인 소통성을 담보하고 있는 장르인지를 확인하는 프로젝트다. ● 물론 이 한 달의 전시 기간에 이 시도가 곧바로 정리될 성질은 아니다. 전시 공간에서의 현장 작업을 통해서 새로운 형식과 양식에의 실험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다만 한 달 동안 약 서른 점의 드로잉, 콜라주, 아크릴화 등을 시도했고 일정 부분의 완성작과 또 일정 부분의 미완성을 작업실로 옮겨서 계속 작업 중임을 보면, 정복수의 이번 시도가 제법 긴 시간과 과정을 요구하는 프로젝트임은 분명해 보인다. 『나무아트』에서의 한 달간 작업+전시는 이 실험의 단초일 뿐이다. 결국 앞으로 긴 시간 작가 정복수가 이를 긍정적인 결과로 연결해서 그 결과물을 생산해내야 한다.

정복수_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52.5×45cm_1976
정복수_자화상-길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23~4
정복수_자화상_캔버스에 목탄과 아크릴채색_91×116cm_2024

2. 정복수가 1970년대에 거울 보고 자신을 그린 세 점의 자화상 이후, 직접 사람을 보고 모델링을 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50여 년간 많은 작업량으로 숱한 사람을 그렸지만, 모델이나 사진을 보고 작업한 경우는 없었다. 인간에 대한 정복수의 입장을 드러내거나 진술하는 것이 목적이었지, 그 외형을 모방하거나 재현하는 데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정복수가 내게 모델을 직접 "보면서" 그리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복수로서는 전혀 새로운 시도다. 이유를 물으니 곧 칠순이 되는 나이인데, 이제 모델링을 통해서 사람을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고 싶다고 답했다. 또 지금 해보지 않으면 앞으로 영영 못 할 것 같아서라고도 했다. 모델링이라는 지극히 기초적이고도 고전적이며 또 일정 부분은 습작의 영역에 속하는 작업방식이, 작업을 시작한 지 50여 년이 된 정복수에게는 새로운 시도에 속한다니 참으로 역설적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작가가 도전을 하겠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저지르는 게 답이다. ● 그렇게 해서 기획은 시작되었다. 자원한 모델 4명의 초상화+작가 자화상 총 여섯 인물(투병중인 디자이너 문승영 작가, 자하미술관 강종권 관장, 노동조 대학교수, 안승원 의사, 그리고 작가 본인)을 정복수는 한 달 내내 그렸다. 드로잉, 수채, 사진 콜라주, 아크릴, 유화, 목찬, 연필 등으로 모델을 지우거나 드러내면서 거기에 정복수 자신을 입혔다. 모델의 외형과 작가의 체질 사이에서 유사성과 이질성이 동시에 레이어로 중첩되며, 인물의 환골탈태와 함께 캐릭터의 정체성과 고유성이 해체되거나 재조립 되었다. 일테면 정복수가 그린 문승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승영에게 오버랩된 정복수의 심리나 감성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번 프로젝트에서 제작된 초상화들은 대부분 대상의 성격과 형상에 작가의 심리나 형식이 겹친, 일종의 탈 대상적 탈 재현적 속성이 강하다. ● 각각 뚜렷한 개성을 가진 모델을 정면에서 대면하는 작업은 정복수에게는 새롭게 접하는 소재이자 방식이다. 오감으로 모델의 성격을 수렴하면서도, 거리두기를 통해 모델과 작가 본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심리나 감각적 현상을 포착하고 표현하는 양식 생성 실험이라고도 하겠다. 결국 그 형상은 모델을 닮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델도 작가인 정복수도 아닌 채, 그 둘 사이를 부유하며 생성된 제3의 캐릭터이자 회화적 기호라고 하겠다.

정복수_디자이너 문승영 초상_캔버스에 아크릴릭채색, 콜라주_130×97cm_2024
정복수_의사 안승원 초상_캔버스에 유채, 연필_53×45cm_2024

다시 말하지만, 대상을 보면서 그리는 모델링은 대부분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는 초기 습작 과정에 해당한다. 그런데 화력이 50년이나 된 원숙한 중진 정복수에게는 실험적 프로젝트에 속한다. 아이러니한 일이기는 하지만, 정복수에게서는 대상을 분석-재현하는 방식에서 확연하게 이탈하는 것이기에 이 모델링은 습작을 넘어서는 직관적 실험의 영역이 된다.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하기 위해 인체 해부학에 근거한 명암법·선원근법·공기원근법 등 서구식 기법이나 전신사조(傳神寫照)와 같은 대상 중심의 동양화의 미학적 입장에서도 벗어나, 오로지 인간에 대한 새로운 형상적 진술을 위해 이런 시도를 할 뿐이다. 습작을 넘어서는 본작업의 무게감이 충분한 이유다. ● 모델과의 대면과 대화를 통해 그 캐릭터를 어느 정도 수용했으되-이는 그동안 사람의 본능, 욕망, 삶의 양식, 습관 등을 익명화시키며 인체를 다뤄온 정복수 고유의 형상성에 비하면 획기적 변화다-, 그럼에도 정복수의 주관적 프리즘에 의한 기존 정복수식 형상 어법 비중은 여전하다. 그의 몸에 체화된 그림 그리기 스타일에 어느 정도 모델의 성격이 반영되어서 정복수 회화언어의 변화를 보여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생득적으로 성취한 회화언어의 바탕에서 이루어지는 확장의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나는 이 한 달간의 공개 작업+전시를 통한 시도가 정복수 작업의 획기적 전회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가 그리는 다양한 인간에 대한 또 하나의 변주가 모델링이란 방식의 양식적 실험을 통해 심층적으로 심화되는 과정이라고 여긴다. 칠순을 눈앞에 둔 중진 작가가 새롭게 구사하는 표현 언어로, 이 시도가 더 예민하게 정복수식의 인간형을 포섭해 내는 새로운 무기의 장착이라면 적당한 비유일 듯싶다. 그래서 그것은 정복수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인간형을 위해 시도하는 형식 탐구의 영역이다. 서두에 언급했듯 정복수는 1970년대 두어 점의 자화상을 거울 보며 그린 이후 2024년 지금까지 50여 년간, 대상을 재현하는 방식을 전적으로 거부하며 그의 가슴과 기억 속에 있던 온갖 유형의 인간상을 끄집어내며 그려왔다. 그러니까 이번에 시도하는 모델링에 의한 초상화는, 여전히 그의 내면에 가득한 인간상을 실제 모델을 통해 드러내려는 또 다른 회화적 문법의 확장이라는 것이다. 모델링이라는 미술사 내 초상화의 구상적 특성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전통을 전복 시키는 방식으로…. 중세 미술의 아카데믹한 재현적 속성에서도 현대미술에서의 탈 재현적 입장에서도 벗어난, 정복수식 주제의 인간형을 도출하는 형식으로 말이다. ● 과거의 초상화는 어느 시간의 단면과 표정을 포착해서 인물의 성격을 영속적으로 남기는 것이었다. 형상을 통해서 일종의 기록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개는 대상이 되는 모델의 주문으로 생산된 메카니즘이기에 주문자는 교황·왕·귀족·성직자·자본가나 동양에서는 왕·사대부·선비 등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상류 계층이 고객의 주를 이루었다. 계급성에 의한 주문으로 인해 사실적 묘사에 인물의 품격, 엄격함, 아름다움 등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게 다반사였다. 이런 경우 화가는 수고비를 제공하는 모델의 요구조건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화가는 주체가 아니라 복합적인 그리기 능력을 제공하며 모델이 지급하는 제작비에 종속된 기능인이었다. ● 19세기 카메라의 발명은 이런 주문생산 구조와 형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사진에 의한 초상은 인물과의 외형적 유사성을 더 높이며 시간과 비용까지 절약시켰다. 화가에게 고가로 주문하고 긴 시간 모델을 서던 근대 이전의 초상화 메커니즘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어졌다. 상층 계급을 그리던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진술에 의한 초상은 일반 대중도 애용할 수 있는 문화적 기호의 영역이 되었다. 당연히 고비용의 사실적 재현의 초상화는 쇠퇴를 맞고, 화가의 주체적 형식이 돋보이는 인상주의 회화에서의 초상화가 등장하게 된다. 세잔이 움직이는 모델에게 사과와 같은 정물성을 요구하거나, 고흐가 자화상이나 타자의 초상화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투사하는 스타일을 적용한 것이 그 실례다. 이후 현대미술에서 초상화는 대상인 모델보다는, 더 적극적으로 작가 자신의 지향성이나 사회적 주제를 상징화하는 다양한 인물화 양식으로 변주 되어왔다. ● 이 지점에서 보자면 저렴한 작화비를 조건으로 평범한 생면부지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정복수의 이 초상 프로젝트는 나름 대안적인 제도와 미술행위로서 초상화 개념을 도출하려는 한편의 시도라고 여겨진다.

정복수_미술관장 강종권 관장 초상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콜라주_53×45cm_2024
정복수_생각의 깊이와 무게(노동조 교수 초상)_패널에 목탄, 아크릴채색, 오브제_160.1×80cm_2024

3. 정복수는 그동안 사람만 그려왔다. 가슴이나 머리속에 있는 인물을 돌출시키거나 자신의 스타일로 개념화한 인체를 형상화해 왔다. 구체적인 사건이나 상황에 처한 실존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도 원초적인 본능과 욕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원형적 인간상이었다. 당연히 표정과 행위를 통한 동사형 형태와 익명적 기호로 그 인체는 드러났고, 그 형상을 통해서 인간과 문화에 대한 정복수식의 애증이 발화되었다. 거기에서 결과한 공격성은 언어나 서술이 아니라 상징성으로 현전되었고. ● 이번 "초상화를 전복"하는 초상전도 마찬가지다. 모델을 보고 그리는 방법의 시도로, 그의 인간에 대한 접근법이 하나 넓어졌을지언정 그의 미학적 입장이나 작업 태도가 달라진 건 아니다. 다만 낯선 생면부지의 타자와 직접 대면하고 대화하며 그림을 그리는 동안, 모델의 개별적 존재감을 자신의 주제에 추가하려는 시도는 분명 정복수에게는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자원한 모델들은 모두 기존에 정복수(가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의 작품에 동화된 분들이었기에, 정복수가 자신의 체중에 타자의 공감을 얹는 작업의 과정과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 『나무아트』에서의 한 달간 프로젝트가 끝났다. 전시 후반기로 접어들 때쯤 작가는 많이 힘들어했지만 버티면서 공개작업을 일단락지었다. 그러나 이 모델링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아보인다. 기껏 한달, 이제 한 발자국 걸음마를 뗀 시도 상태라고 생각된다. 『나무아트』로부터 정복수의 은밀한 작업실로 이주해 간 그림들이 더 그려지거나 변주하면서 새롭게 그 심화된 얼굴을 드러낼 것이다. 더불어 이 경험들은 또 다른 빈 캔버스에 또 다른 방식으로 형상화될 것이고. 어느날 불현듯, 한동안 은폐되었던 이 작업들이 또 다른 작품들과 함께 세상에 나타날 때, 분명 독자적인 완성으로 환하게 빛날 것을 기대한다. 이 글로 이번 전시기획자인 내 역할은 일단락되었다. 썩 훌륭하지 않은 여건이라 작가도 나도 힘들었지만, 내 나름대로는 보람 있는 기획이다. 자원해서 고생한 정복수 형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다음에 또 새로운 기획으로, 이런 고생 함께 사서 합시다"라고… ■ 김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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