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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화요일 휴관
디알갤러리 DR.GALLERY 전북 익산시 왕궁면 금광길 72-36 (동용리 775-5번지) @drgallery0423
외관상 작가의 그림은 추상 아니면 반구상에 가까운 경향성의 회화를 예시해준다. 알다시피 추상은 의미 내용보다는 형식논리에 강하다.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과 같은 형식요소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회화라고 보는 논리다. 회화는 다만 회화일 뿐이라는 논리다. 물론 여기서 그 자체 완전한 추상은 없다거나,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추상은 없다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형식논리에 천착한 모더니즘 패러다임과는 배치되는 논리 같고 말 같지만, 여기서 그 형식요소에 마음을 담았다면(녹여냈다면), 그렇게 형식요소로 하여금 감정의 표상이 되게 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여기서 반구상이 소환된다. 주지하다시피 반구상은 알만한 사물 대상을 추상화한 것이다. 추상의 배경으로 감각적이고 재현적인 현실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 만큼 추상적 형식 속에 알만한 사물 대상이 암시되는 회화적 형식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의 경우로 치자면 사물 대상과 함께 사물 감정이 암시된다. 여기서 사물 감정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근대 감정과도 통하는 것인데, 마치 색 바래고 빛바랜 오랜 벽면 앞에 선 듯 그 속에 시간을 농축하고 있는 것 같은, 시간의 앙금을 보는 것 같은, 파스텔 톤의 중성적이고 고답적인, 우호적이고 부드러운 색채감정이며 질감이 그렇다.
"이리"의 현실 그림으로 실제를 그렸다기보다는 마음으로 되불러낸 이미지를 그리고, 추억 그러므로 기억으로 소환한 분위기를 그렸다. 기억을 소환한다는 것, 그것은 결국 그리움을 되불러온다는 것이며, 그리움으로 화한 실제를 현재에 되새긴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억은 현실 그대로를 재현해주지는 않는다. 기억은 현실을 변형시키는데, 좋은 기억은 과장하고 나쁜 기억은 축소한다. 여기서 좋지 않은 기억이 현실을 축소하는 것은 가능한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한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억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는 각색하고, 때로 없는 현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자체 기억의 역학(혹은 미학)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얼핏 작가의 그림은 색 면과 색 면이 조화를 이룬 정적이고 안정된 화면 구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그리기와 지우기가 수도 없이 반복되는 치열한 과정을 숨겨놓고 있다. 그림의 논리로 치자면 그리기와 지우기가 반복 중첩되는, 심리로 치자면 드러내기와 숨기기가 교차하는 밑도끝도 없는 과정(하이데거라면 대지와 세계의 변증법 그러므로 은폐와 비은폐가 교차하는 과정이라고 했을)을 함축하고 있다. 말하자면 작가의 그림에서 그리기와 지우기의 반복과정 자체는 형식논리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 이면에서 이런 기억과 관련한 치열한 과정(다시, 하이 데거를 인용하자면 투쟁)이 뒷받침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이리"에 대한 작가의 추 억에는 때로 상처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 트라우마마저도 그리움의 색감과 질감과 분위기로 승화시켜 놓고 있는 것에 작가의 그림의 미덕이 있다(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그리움이다).
이처럼 작가는 "이리"의 과거와 현재를, "이리"에 얽힌 사사로운 기억을, 기억과 더불어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을 조형으로 옮겨 놓고 있다. 그렇게 작가가 실제로 그려놓고 있는 것은 "이리"의 기억(그러므로 어쩌면 추억)이지만, 동네에 대해 떠올리는 감정(근대 감정?)이 비슷한 탓에 작가의 그림은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그렇게 기억을 그리고, 추억을 그리고, 그러므로 그리움을 그린 것이며, 그리움의 색감과 질감과 분위기를 그린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상실한 고향의 색감을 떠올려주고, 잃어버린 원형의 질감을 감촉하게 만든다. ■
Vol.20240815c | 서진옥展 / SEOJINOK / 徐眞玉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