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터의 배우

Actors in the empty lot

전종대展 / JEONJONGDAE / 全鍾大 / photography   2024_0810 ▶ 2024_0829 / 월요일 휴관

전종대_배우 민규미_잉크젯 프린트_127×100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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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대 블로그_jongdae73.tistory.com

초대일시 / 2024_0810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반디트라소 GALLERY BANDITRAZOS 서울 성북구 성북로 49 3층 Tel. +82.(0)2.734.2312 www.gallerybandi.com @gallery_banditrazos

배우와 연기자 ● 전종대의 『빈터의 배우』는 2019년부터 2023년 사이에 같은 장소에서 배우 한명 한명을 촬영한 사진 연작이다.모두 알다시피 현대의 배우와 사진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역사적으로도 배우나 유명인 사진은 사진이 발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세기 중후반에 이미 널리 퍼졌다.1860년대 파리의 극장 주변부터 최초의 본격적인 인물 사진 스튜디오들이 번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사진이 발명된 이래 사진 없는 배우는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제는 사진이나 동영상으로만 존재하는 '셀럽'도 생겨나고 있다.전종대는 이러한 사진과 배우의 불가분관계를 전혀 다른 입장에서 접근한다.『빈터의 배우』에 등장하는 배우는 대중적인 연예인과는 거리가 멀다.전종대는 배우를 찍지만, 우리가 사진으로 접해본 적이 아예 없거나 거의 없는 연기자를 찍음으로써, '셀럽'과 그에 대조되는 '연기자' 사이의 차이나 소외관계에 주목하게 한다. 보통 유명하기에 배우에 관심을 가지고 보겠지만, 여기서는 유명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관심을 끈다. ● 관객은 『빈터의 배우』를 보면서 '그 배우를 다른 사진으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챈다.우리는 『빈터의 배우』에서 그냥 배우가 아니라 '무명 배우'를 만나며, '무명 배우'란 단순히 그 배우의 이미지가 널리 퍼져있지 않다는 뜻이다.작가가 사진을 찍어 배우를 알리는데 큰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오히려 사진가 전종대는 이 사진들을 전시회를 위해 단 몇 장만 인화할 뿐이다.'셀럽'이 사진(과 동영상)에 거의 완벽하게 의존해야 하는 것과 달리, 이 배우들은 전종대의 스틸카메라에 그만큼 의존할 그 직업적인 필요가 크지 않을 것이다.오히려 사진가가 배우의 포즈, 표정, 분장과 의상, 인상, 동작 등에 크게 영향 받는다는 면에서, 배우는 연기자로서 사진-이미지 이전에 있는 본래의 지위를 회복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수많은 배우의 사진들이 배우를 유명하게 하는 동시에 그의 실존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전종대의 사진은 그 반대쪽을 향한다.배우는 연기자로, 연기자는 그냥 그 사람으로 내려가거나 후진해 유명인, 무명인, 배우, 연기자, 생활인 등등의 구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구별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전종대_배우 이건창_잉크젯 프린트_127×100cm_2019

30초 ● 사진에서는 찰나의 차이가 모든 것을 바꿔버린다.'순간 포착'이라는 사냥의 수사학은 어쩐지 듣기 거북하지만, 피사체는 정말 모든 순간순간 다르다는 것을 사진이 실증으로 깨닫게 해준 것은 부인할 수 없다.그런데 작가는 배우에게 30초에서 1분 가까이 가만히 있으라고 주문한다고 한다.조명과 카메라 성능이 필요 이상으로 발달한 요즘에 이러한 사진가의 요구는 조금 이상하다.정말 정지된 이미지를 원한다면 1/250초 이상으로 셔터 속도를 올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결국 셔터 속도로 결정될 것을 인물에게 요구하는 것은, 카메라에 맞춰 인위적으로 인물을 제어하는 것이다.이는 현대 사진기술에서 불필요하기도 하고 '자연스러운' 촬영을 위해 사진가들이 보통 피하는 것이다.불필요할 정도로 긴 이 시간은 인물의 인위적인 정지 상태를 더 강조하거나, 또는 반대로 같은 정지 상태가 조금 불안정하게 보이게 할 것이다. ● 작가는 마치 옛날 사진가처럼 배우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주문하고, 배우는 움직이지 않기 위해 숨을 참는다.사진이 특정 시간을 잘라내 그것을 인위적으로 길게 늘여놓는다는 것을 카메라 앞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이 시간은 사진 찍힐 때 카메라 앞에서 정지하는 누구나의 습관이 더 의식적으로 늘려진 것과 같다.30초는 물리적으로는 길다고 하긴 어렵지만, 거의 영원히 고착될 사진이미지로 이어진다는 면에서 심리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일 것이다.그것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볼 때처럼 환경과 상황으로부터 고립되는 시간일 것이고, 배우의 몸은 연기의 주물을 뜨기 위한 거푸집처럼 될 것이다.천적을 만나 변색하는 동물로 (사진 이론 등에서) 비유되기도 하는 그런 피사체의 사물화 과정인데, 작가는 배우에게 그 과정을 더 길게, 더 의식하도록 요구한다.따라서 작가가 배우에게 움직이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은, 실제로 깔끔한 정지 상태를 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어색한 시간, 겹쳐진 시간, 고립의 시간, 몸이 경화되는 과정을 담고 싶기 때문이다.인물 쪽에서도 다소 어정쩡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연기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닌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연기는 사라지고 2차원 조각이 남게 될 것이다.배우 민규미 씨가 벤치 위에 한 쪽 발을 올려놓은 자세, 이건창 씨의 불명확한 표현이 바로 그렇다.작가는 카메라가 기계적으로 시간을 멈춰 세우는 정지의 결과가 아니라, 인물의 '정지성'(stillness)을 사진에 담고 싶어 한다.인물을 사진으로 찍기 이전에, 사진으로 되어가는 중의 인물을 찍기로 한 것이다.

전종대_배우 김두안_잉크젯 프린트_100×80cm_2020

연기자와 생활인 ● 『빈터의 배우』는 모두 같은 장소, 같은 숲에서 찍은 것이다.이 숲에 별다른 특징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장소가 그냥 어떤 숲이며 익명의 공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모든 사진들이 한 장소에서 조금씩 이동하거나 각도를 달리 해 찍은 것이기 때문에, 숲은 사진관의 배경 스크린처럼 하나의 추상적인 공간으로 변한다.피사계 심도가 낮고 초점이 얼굴에 맞춰져 숲은 흐릿하게 시선에서 멀어진다.숲과 어울리지 않는 정장을 입고 있거나 눈에 띄게 연극적인 의상을 입고 있으면 숲은 배경으로 한 번 더 물러난다.그 극단적인 경우는 배우 김두안 씨의 초상이다.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빨간 옷을 입어서 녹색 숲은 몸의 순수한 바깥으로만 남아있다.이렇게 보면 숲은 야외일 뿐, 스튜디오, 무대, 배경그림과 같다.숲에는 가끔 벤치가 있는데 이 역시 무대나 스튜디오의 소품처럼 보인다.옛날 사진관이나 어린이를 위한 연극무대가 종종 숲이나 자연 공간을 일반화해서 모방한다면, 사진 속의 숲은 그런 스튜디오, 무대를 다시 모방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인물과 필연적인, 또는 구체적인 연관이 없는 셋업(setup)이다. ● 30초에서 1분 사이 정지해있는 배우-모델이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인위적으로 자신을 고립시키는 것에 더해, 배우-모델은 이렇게 공간으로부터도 분리된다. 우리는 배역이나 캐릭터는 물론이고 이것이 어떤 연극일수 있는지 짐작 할 수 없다.이건창 씨를 찍은 사진에서, 그는 아주 기묘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그 주변은 이에 대해 어떤 정보도 주지 않는다.빈터는 그냥 장소이지 배우와 자극을 주고받는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주변 환경이 인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사진은 아무것도 밝히지 않기 때문에, 아주 흥미로운 명연기일 수도 있는 이건창 씨의 복잡한 표정은 이건창 씨 자신 말고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한다.연기자의 연기 표현이 되려면, 그가 어떤 이야기 가운데 있거나 적어도 주변의 인물이나 상황, 배경 등에 반응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이 인물을 우리가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식당에서 만나는 누군가의 남편이나 방금 퇴직한 회사원일 것이라고 상상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에게 어떤 유형학적인 선입견이 자리 잡을 틈도 없이 이 얼굴은 이건창 씨에서 시작해 그에게 되돌아간다.그는 그의 이름과 얼굴, 체중과 키, 양복과 넥타이, 나이와 경험이겠으나 이런 말이 다 무의미할 것이 분명한 그인데, 한 가지 온당한 설명이 있을 수 있다면 이 사진 속의 그는 시공간 모두에서 고립되어 있다는 점이다.그는 사진으로 되어가는 중에 있으면서,아마도 그가 아닌 누군가(아마도 배역)가 되어가는 중일 텐데, 그는 결국 다른 누구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진의 모든 세부에 남긴다.현실을 살아가는 그 이건창이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배우에서 연기자로, 연기자에서 모델로, 모델에서 그 자신으로 환원된 상태의 한 남자이다.

전종대_배우 권양자_잉크젯 프린트_100×80cm_2020

정체성 ● 그 환원의 구조는 이렇다.지금까지 이야기에 동의한다면 『빈터의 배우』의 주인공들은 적어도 사진 안에서 어떤 연기도 하지 않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인물들이 어떤 배역을 완벽하게 사실적으로 소화한다면, (우리가 이 배우들을 모르고 있는 한, 또 특별한 의상을 걸친 시대극이 아닌 한) 우리는 배역과 배우를 분리할 수 없을 것이다.반대로 만약 배우가 배역과 불일치한다면, 바로 그 상태가 연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배우가 어떤 배역이나 상황을 연기하고 있는지 우리는 전혀 모를 뿐만 아니라,어떤 특정한 배역 연기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단정하기 어렵다. 이에 더해, 작가는 배우에게 되도록 무표정으로 해달라고 주문한다고 하니, 어떤 감정표현이 있다 해도 그 감정은 애매하게 떠돌 뿐이다. 그래서 사진에 남아있는 인물을 '한 중년 여성', '어떤 중년 남자', '그', '그녀'라고밖에, 더 정확히는 사진 각각의 제목이기도 한 그들의 이름밖에 달리 부르기 어렵다. 그렇게 분류되고 추상화된다는 뜻이 아니라, 분류하고 추상화할 수 없을 정도로 구체적인 인물로 고립된다는 뜻이다. 물론 개개의 인물, 사진마다 정도 차이는 있다. 사진 속의 안주암 씨는 뭔가 초초하게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권양자 씨는 기대하던 일이 이뤄지는 순간을 보는 것 같고, 정연희 씨는 체념한 것 같다.그런데 정연희 씨의 체념이 연기인지 그녀 자신의 것인지 결정적인 증거를 찾을 수는 없다.그 구분이 불명확할수록 흔히 말하는 '좋은 연기'라고 한다면 이 분들은 완벽한 연기를 하는 것일까?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 분들이 어떤 연기를 하는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연기력을 평가할 수 없다.작가의 카메라는 배우를 주인공 연기자로 회복시키는 동시에, 연기로부터 앞뒤의 시간과 좌우의 장소를 빼앗고 있기 때문이다.움직임, 배역, 대사, 설정과 상황 등을 빼앗은 결과는 역설적이다.이 배우들은 고립된 각각의 인물로 충분히 자족적이면서, 어디에나 등장할 수 있고 누구나가 될 수 있는 '각각의 누구나'가 된다.

전종대_배우 이서순_잉크젯 프린트_100×80cm_2020

영화 캐스팅 전문가가 배우의 인상을 탐구하듯이, '누구나인 각각의' 분위기를 우리는 느껴본다.배우의 옷, 헤어스타일, 장신구, 주름살, 화장법 등을 자료로 (배우 외의 다른) 직업, 나이, 체취, 삶의 경험, 성격, 상태, 배역 등을 상상한다.이서순 씨의 얼굴과 표정을 보면 여간해서는 그녀를 속여 넘길 수 없을 것이다.벤치에 앉아 있는 황호상 씨는 굵은 저음으로 말할 것이다.장순녀 씨는 어떤 일로 조금 착잡하지만 곧 극복해낼 사람이다.백육동 씨는 누가 자신을 어떻게 보든 더는 상관이 없다.권양자 씨는 남의 시선에 아예 둔감할 것 같다.작가가 인물을 시공간에서 고립시켜 사진이 침묵에 빠져있다 해도, 인물의 디테일은 그렇게 조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말이 많다. 정연희 씨의 투박해 보일 정도로 밑창이 높은 새하얀 구두도 말을 하고,권양자 씨의 길고 가지런한 속눈썹은 강렬한 표현이고, 황호상 씨의 이마주름과 양복 주름에도 언어가 깃들어 있다.김란 씨의 깊게 파인 쇄골과 다소 기이하게 늘어뜨린 팔은 인물이 고립된 시간과 공간을 뚫고 어디론가 향하는 힘이다. ● 카메라와 인물의 관계에서 능동이 '셀피' 쪽이고,수동이 증명사진 쪽이라 단순화해 볼 수 있을 것이다.전종대의 사진은 증명사진에 가깝다.다만 증명의 목적과 내용이 다르다.여기서 실물과 사진이 같은 인물이라고 증명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오히려 그들은 모두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라는 것을 증명한다.'되어가는 중'이란 수수께끼 같은 말이다.되어가는 중이므로 그가 아니라는 것도 아니고, 그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어쨌든 배우들은 배우, 연기자, 생활인, 정연희(와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들)로 되어가는 중이며, 그 방향은 반대로도 움직인다.한 꺼풀씩 입어가기도 하고, 한 꺼풀씩 벗어가기도 한다.배우들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사람, 어디서나 볼 것 같은 사람, 아는 누군가와 닮은 사람,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호감을 주는 사람, 고생을 많이 한 사람, 끼가 많은 사람, 외로운 사람 등등이 되기도 할 것이다.어떤 방향으로 변화하는 중이라고 하더라도, 이서순, 장순녀, 백육동 등은 언제나 바로 그 사람이 주인공인 자리로 반복해서 돌아온다.

전종대_배우 정연희1_잉크젯 프린트_100×80cm_2023

사진과 의식(儀式) ● 작가는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정지해 있을 때 희열을 느낀다고 쓰고 있다. 모델과 사진가 모두의 몸이 굳어가는 이 시간에 작가는 '내 안의 어두운 감정들이 해갈되는 기분'을 느끼며'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그가 되어보지 않는 한 우리는 이 감정을 정확히 묘사하기 어려울 것이고 그 이유도 알 수 없을 것 같다.그 감정이 원하는 장면을 포착했을 때의 직업적 쾌감일지, 허무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일시 정지 시키는 사진술의 마력(魔力) 덕분일지, 인물로부터 운동성을 빼앗는 사진가의 권력행사 때문일지 알기 어렵다.한 가지 추측은 가능하다.작가는 가족의 연이은 상실 후에 심한 고통을 겪었고, 그것이 『빈터의 배우』를 시작하게 된 동기였다고 한다.'빈터'라는 제목도 상실이나 상실감을 뜻하는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사진으로 존재 붙잡기를 반복하는 행위에서 모종의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빈터에 잠시 머물다 가는 배우'라는 관념에 다소 상투적이긴 하나 결국 심오할 수밖에 없는 알레고리가 있을 것이다. ● 작가는 대부분 중장년의 배우를 선택했고 촬영시간도 해가 중천에서 떨어지기 시작할 때부터이다.요즘 기준으로 보면 아주 거추장스러운 대형필름카메라를 삼각대 위에 세우고, 값이 너무 비싸서 몇 장 정도만 찍을 수 있는 슬라이드 필름을 쓴다는 것도 이 촬영의 의식(ritual)에서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대형카메라가 화면의 상단이나 하단을 흐리게 만들어 인물에 약간의 귀기(鬼氣)를 부여하는 것도 의식의 한 단계를 이룬다.이렇게 보면 카메라를 등지고 서있는 민규미 씨, 정연희 씨의 모습은 숲을 조금은 저승처럼 보이게 하는 것 같다.그런데 이러한 사진적 의식이 사진에 스며들어 있는 주제인 것일까? 아니면 사진 자체와는 큰 연속성이 없는 것일까?

전종대_배우 정연희2_잉크젯 프린트_100×80cm_2023

의식이란 바램이나 존경, 사랑 등의 실현을 위해 그에 현실적으로 적합한 수단을 사용하는 대신에 (현실적인 수단이 없을 때가 많기 때문에), 그 바램이나 존경의 가치를 독립시켜 의미체계를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따라서 대부분의 의식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비어있지만 심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가득 찬 것이 될 수 있다.술을 따르고 향을 피우는 등 현실의 활동과 평행하는 형식을 취하지만 그 의미는 어디까지나 상징적이다.작가에게 카메라, 셔터, 빛, 숲, 인물 은 이런 제의의 차원과 겹쳐져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이것은 인물들이 숲 속의 익명일 때, 그 인물의 생애를 충분히 읽을 수 없고, 그러한 상상의 읽기가 어떤 순간 모두 무망해질 때 더 두드러질 것이다.그러나 반대로 배우들이 자신의 수많은 디테일을 통해, 그 디테일의 총합을 넘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게 될 때는 그렇지 않다.그럴 때에는 유령이 출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힘이 느껴진다.그것은 이 덜 알려진 연기자들의 생활력이다.한명의 관객으로 『빈터의 배우』를 보고 내게 정화되는 느낌이 있다면 이 생활력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다소 경건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빈터를 '장악한' 배우들이 유명하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 대한 존경을 끌어낸다. ■ 박찬경

Vol.20240810a | 전종대展 / JEONJONGDAE / 全鍾大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