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抄錄). 뽑아서 기록하다

갤러리 보나르 기획 청년작가 초대展   2024_0722 ▶ 2024_073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나윤진_이라한_이찬휘_임세훈_임채혁 정준영_정지원_정한별_정호영

기획 / 갤러리 보나르

관람시간 / 11:00am~07:00pm

갤러리 보나르 Gallery Bonart 경기도 하남시 미사강변한강로158번길 91 (망월동 839-4번지) 1층 Tel. +82.(0)31.793.7347 blog.naver.com/gallerybonart @gallerybonart

우리 예술의 미래, 신선한 젊은 예술가들 ● 저희 갤러리보나르에서 동계 청년작가전 1,2,3부에 이어 하계에도 젊은 청년 예술가들을 모셨습니다. 희망과 열정으로 가득 차서 자신의 세계를 이제 막 구축하기 시작한 그들의 작품은 신선하고 창의적이며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즐거움을 줍니다. 젊은 청년들만이 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탐색과 주체성의 고민은 일상에 익숙해져 꿈과 모험을 잊고 살았던 우리 모두에게 맑은 공기를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 많은 분들이 오셔서 관람하시고 즐기시고 응원해주시길 바랍니다. 2024년 하반기 4,5,6부 중 4부 전시를 시작합니다. (2024. 7. 20) ■ 이승신

공동작업_자연조각 series_캔버스에 혼합재료_22×22cm×27_2024

역사적으로 자연에 대한 회화적 탐구는 많이 이뤄졌다. 그렇기에 캔버스에 자연을 옮기는 것은 진부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2024년, 9인의 작가는 자연을 다시 바라보며 저마다의 삶, 과열된 세상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자연에 대해 사유하고 만끽하며 새로운 감각을 깨우고자 한다. 단순한 재현이 아닌 스스로를 반영한 기록을 한다. 그 속에는 자연을 바라보는 각각의 회화적 특성이 담겨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자연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공유하고,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길 기원한다. ■ 참여작가 일동

나윤진_행복은_캔버스에 유채_53×40.9cm_2024
나윤진_Love_캔버스에 유채_33.4×21.2cm_2024
나윤진_Love_캔버스에 유채_53×40.9cm_2024
나윤진_Moment_캔버스에 유채_40.9×27.3cm_2024

돌아오지 않을 순간들이 또다시 지나가고 있다. 우리가 숨 쉬는 이 공기 속에 흘러가고 있다. 찬란하게 아득히 멀어져가는 순간들은 돌아오는 방법을 모른다. 누구에게는 지나갔으면 하는 이 순간들이 또 누군가에게는 오지 않았으면 하여 미루고 싶은 이 수많은 순간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가 아득히 멀어져만 간다. 우리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순간이 되어 사라지고 일부만이 기억에 남아 산다. 순간은 순식간에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와 어느 순간 우리를 데려가려 하고 있다. 이 짧은 순간 속에서 순간을 기록하여 본다. 우리들의 사라져가는 순간들을 그린다. ● 이 작품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데올로기, 사상 및 관념에서 탈피하는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그동안 지배적이었던 체계가 파괴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마주하였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떠한 태도를 취하게 될까? 작품 속 인물의 표정은 겁을 먹은 듯 또는 깜짝 놀란 듯 보인다. 하지만 박주영은 그저 큰 숨을 들이마시라고 제안한다. 이는 경계 너머의 세상에 두려움을 갖기보다, 긴장을 풀고 다양한 가능성을 마주하라는 안위(安慰)의 의미를 담고 있다. ■ 나윤진

이라한_샴쌍둥이의 유산_패널에 혼합재료_82×44cm_2024

인체 자연 발화(人體自然發火). 정상성을 갖춘 인간의 길을 거부하는 것은 뚜렷한 발화의 원인이 없이 갑작스레 인체가 연소하는 것과 같다. 누군가 나서서 대신 불을 붙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파국을 맞이한 내면의 혼란처럼 피어난 불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현실 원칙을 거역한 악귀인 동시에 올곧은 의지로써 변화를 촉구하는 순교자이다. 악귀의 세계와 성자의 세계. 극단적으로 이분화된 세계를 향해 솟아오른 두 갈래의 두개골은, 현실의 경계를 해체 및 통합해가는 자가 감내하게 될 기형적 존재로서의 누명을 나타낸다. 허나 낙담할 필요는 없다. 보아라, 누명을 쓰고 순교한 그는 앞으로 새롭게 다가올 시대를 위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신만의 유산을 가슴 안에 품고 있지 않은가? ■ 이라한

이찬휘_peristrofi_캔버스에 유채, 목탄_48×120cm_2024

살아있는 두근거림이 멈추어 한 줌의 흙이 된다. 새파랗고 억세던 줄기가 힘없이 늘어져 재가 된다. 억겁의 세월 속에서 커다란 바위는 비에, 바닷바람을 타고 날아온 소금기에, 휘몰아치는 바람에 깎이고 부서져 돌이, 자갈이, 모래가, 먼지가 된다. 그럼에도 그 억센 생명력은 그 숨이 다한 뒤에도 - 자연이라는 태동하는 굴레의 일부가 되어 계속해서 살아간다. 고요하면서도 소란스럽게 순환하는 자연에는 낮과 밤, 탄생과 죽음과 같이 섞일 수 없으면서도 단단하게 결속된 거대한 힘이 있다. ■ 이찬휘

임세훈_Life is exhibition_캔버스에 혼합재료_72.7×90.9cm_2024

Life is exhibition, 인생은 전시이다. ● 우리가 살아가며 수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지만 그 중 자연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자연은 절대 독단적인 개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더 쉽게 말하면 나무 한 그루가 독단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비로 인해서 생기는 수분, 대지로 인해서 생기는 토양 등의 수 많은 관계들로 인해서 생명체들이 같이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이 되고, 이로써 나무가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수 없이 많이 부딪히고 깨지며, 서로간의 갈등이 생기고 해소되며 화합하는 등 다 같이 공존해나간다. 이는 작가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작가가 있기에 미술관이 존재하며, 미술관이 있기에 갤러리가 존재하며, 갤러리가 존재하기에 사람들이 미술에 관심을 가지며, 이로 인해 작가가 더욱 살아날 수 있다는 개념이다. ● 나는 이러한 현상들을 통해 이번 작품에서 하나의 관계성을 설명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자연을 보고 관계의 이치를 배울 필요가 있다. 허나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여러가지 관계에서 쉽게 적용시키진 못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해당 작품을 보고 사회 속에서 느꼈던 인간관계의 불편함들과 어려움들에 있어 하나의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 임세훈

임채혁_겨울석양_캔버스에 유채_40.9×31.8cm_2024
임채혁_대청호에서_캔버스에 유채_40.9×31.8cm_2024
임채혁_대청호의 낮_캔버스에 유채_40.9×31.8cm_2024
임채혁_증평에서_캔버스에 유채_40.9×31.8cm_2024

역사적으로 많은 화가들에게 풍경과 빛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뤄졌다. 그래서 나는 풍경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너무나도 많은 사례가 있어서 금기했다. 하지만 질병을 극복한 뒤 바라본 세상에서 풍경에서 나타난 빛의 모습들은 다시금 감동을 주었다. 나는 이 감동의 기억이 기쁨의 감정에 대한 단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자동적으로 이 기억들을 그림으로 기록하고자 했다. 진부할지도 모르는 그림들을 통해서라도 이 기쁨의 단서를 기록하고 싶어졌다. ■ 임채혁

정준영_이소_캔버스에 유채_100×66cm_2024

내가 주목한 건 '끝'에 관한 이야기이다. ● 식물(나무)에게 '완성'은 없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도에 차이만 있을 뿐, 조건만 갖춰진다 면 끈임없이 자라난다. 하지만 '끝'은 있다. 재해든, 벌목이든 어떻게든 '끝'을 맞이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끝'은 형태적인 파괴도 있겠지만, '생명 유지'의 종결이 좀 더 정확한 의미 인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 '재개발'과 나무의 상당한 담론적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집'이라는 공간에 '완성'이 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집'이라는 공간은 '시작'과 '끝' 이 반복될 뿐, '완성'이란 존재하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 집은 다 지으면 완성이 아닌가? 그건 '완공'이지, '완성'이 아니다. '집'이라는 공간 자체 의 '완공'은 '완성'보다는 '시작'의 의미에 가깝다. 그림으로 치면, 이제 막 왁구를 다 짜고, 젯 소를 칠해 놓은 것이다. '집'이라는 공간의 의미는 거기서 누군가가 살아가며, 시간과 흔적이 쌓이며 비로소 그 의미가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흔적. 또 새로운 누군가가 그 흔적을 비집고 들 어와 ● 새로운 흔적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집'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와 '집'은 같은 시간을 향유하며, 같이 늙어가고, 낡아간다. 이러한 의 미에서 '집'은 '가족'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요새는 집을 하나의 경제적 재화로 생각하고 자주 이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이러한 의미는 약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집'에 '끝'은 있을까? 아까와 같이 답을 먼저 하자면, '끝'은 있다. 서론이 길었는데, 내가 이번 작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집'이라는 공간의 또 다른 '끝'의 형태 중 하나인 '재개발' 및 '재건축'이다. '재개발'은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집'이라는 공간이 끝을 맞이하는 것, 즉 나무로 치면 필요에 의해 행해지는 '벌목'과 유사하다. ■ 정준영

정지원_발할라 VALHALLA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24

'발할라', 는 전사들의 전당, 즉 전쟁터에서 희생당한 전사들 중 선택받은 자들의 영혼만이 갈 수 있는 신성한 공간을 뜻한다. 우리는 전쟁터와 같이 과열된 현대사회의 자연 속에 태어나 꽃 피어나기 위해 저마다의 현실 속 고충과 상실을 통해 무너지며, 성장한다. 그렇기에 무너진다는 것은 성장을 의미하고 있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끊임없는 무너짐을 통해 성장하고 성장을 통해 꽃 피운다. 어린 소년일 뿐 이었던 지난 날의 자신은 전쟁터와 같던 현대사회의 자연 앞에 시들어버린 꽃과 같이 무너졌다. 하지만 이를 통해 소년에서 벗어나 어른스럽게 꽃 피우려는 개인의 이야기를 작업에 담아내고자 한다. ■ 정지원

정한별_F(ake)ancy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24

눈에 보이는 1차적 이미지로 빠르게 판단이 내려진다. 가짜와 진짜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그렇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의의를 두게 된다. 비싼 로고를 단 인조 모피가 진짜 털 보다 고가에 거래되기도 하며, 온라인 속 게임 캐릭터에게 자신의 옷보다 고가의 옷을 사 입히기도 한다. 주위에 존재하는 자연을 들여다보기보단 자연을 가꾸고 편집하는 게임을 하곤 한다. ■ 정한별

정호영_뜯어진 나무 속의 작은 것들_캔버스에 유채_53×45.5cm_2024
정호영_벽돌 사이의 작은 식물들 1_캔버스에 유채_53×45.5cm_2020

"~사이의 작은 식물,이끼,곰팡이" 는 본인이 어린 시절 유독 작은 동식물들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며 다녔던 기억에서 시작된 작업들이다. 어린 시절의 이 경험들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어릴 적 취미이며 작은 식물,이끼,곰팡이,곤충 등을 볼 때는 아직도 어린시절 기억과 그 장소, 냄새들이 다시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본인은 이러한 경험과 장면을 다시 재구성해서 이미지화 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해 오고있다. ■ 정호영

Vol.20240722b | 초록(抄錄). 뽑아서 기록하다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