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스름한 걸음걸이

A Walk in Blueness

김윤수展 / KIMYUNSOO / 金潤秀 / installation.sculpture   2024_0710 ▶ 2024_0907 / 일요일 휴관

김윤수_푸르스름한 걸음걸이展_우민아트센터_2024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211023a | 김윤수展으로 갑니다.

김윤수 블로그_blog.naver.com/kimyunsoo03 인스타그램_@kim_yunsoo_              

초대일시 / 2024_0710_수요일_04:00pm

후원 / 충청북도_청주시_우민재단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요일 휴관

우민아트센터 WUMIN ART CENTER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사북로 164 우민타워 B1 Tel. +82.(0)43.222.0357/223.0357 www.wuminartcenter.org

아다지오 마논 트로포 adagio ma non troppo(천천히, 그러나 결코 지나치지 않게) ● "중립적인 글쓰기는 그런 외침들과 판단들의 어떤 것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그것들의 가운데 위치한다. 그것은 바로 그것들의 부재로 이루어진다." (롤랑 바르트)

김윤수_푸르스름한 걸음걸이展_우민아트센터_2024
김윤수_푸르스름한 걸음걸이展_우민아트센터_2024
김윤수_푸르스름한 걸음걸이展_우민아트센터_2024
김윤수_푸르스름한 걸음걸이展_우민아트센터_2024

1. 경계 - 적요 ● 푸르스름하게 걷는다는 것, 그것은 동트기와 석양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경계는 결코 하루의 문을 정확히 열어주지도 꼼꼼하게 닫아주지도 않는다. 이처럼 열림과 닫힘 사이의 어색한 빈틈, 이 지점에서 김윤수는 여기도 저기도 아닌 어떤 곳으로의 사이를 통해 세상을 관측한다. 그가 말하는 푸르스름은 존재하지만 규정되지 않은 상태, 혹은 임의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그 어떤 묘사도 그 상태를 정의내릴 수 없다. 이 부분은 바르트가 중립적인 글쓰기를 강조한 이유와의 접합점이기도 하다. 바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야말로 상투적인 재현이나 번지르르한 미사여구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문학이 언어를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학적 언어의 폐기 또는 백색의 글쓰기로 불리는 글쓰기의 영도(Writing of Degree Zero)는 이처럼 문체와 형식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언어(파롤)를 되찾아가기 위한 하나의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는 의미를 장식하는 관습에서 벗어나 심지어 언어를 죽이라고까지 요구하는데, 이는 형식에 길들여지기보다 오히려 침묵하는 것, 또는 중립적인 빈 공간을 통해 그 어디에도 참여하지 않은 모호한 지점에 걸쳐있으라고 역설한다. 이를 김윤수의 작업에 대입해보면 푸르스름이란 경계지는 정동(affect)을 일으키는 기제가 아니었을까.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 짓궂은 날씨, 후덥지근한 공기와 같이 다채롭게 나타나는 푸르스름에 관한 시각적 상상력은 색채와 움직임에 그치지 않고 날씨로 인한 기분의 변화, 자연 현상과의 감응, 그리고 이와 연결된 대기(atmosphere)의 변화마저도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윤수의 푸르스름한 걸음걸이는 근대 이후 성좌가 된 몇몇 작가들을 연상시킨다. 먼저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 터너(J. M. W. Turner)는 당대를 표상하는 증기기관차를 자주 이용하는 여행객이자 동시에 기관차의 속력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심지어 터너는 증기기기관차의 창문을 열고 10분 동안이나 속도를 몸으로 느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터너는 당시 원근법의 권위자였기에 기관차의 속력을 체험하지 않더라도 이를 충분히 재현할 수 있는 능력자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직접 증기기관차에 몸을 싣고 직접 감각한 경험은 재현의 기술을 넘어선 살아있는 감각언어와 같았을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대표작 중 하나인 「비, 증기 그리고 속도_그레이트 웨스턴 철도」(1844)이다. 또 다른 화가 모네는 어떠한가. 하루를 온통 루앙 성당을 몰래 관찰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대기의 흐름과 일종의 스크린이 된 성당의 파사드를 포착했고 빛의 성질을 통해 부피와 질량으로 이루어진 텅빈 공간을 제시한 터렐(J. Turell)도 떠올리게 한다. 그간 김윤수가 다뤄온 푸르스름한 색채는 아우라를 지닌 기제처럼 느껴졌다. 시간의 더께와 더불어 이 색채는 작가가 세계를 인식하는 현상학적 존재론과 공명하는 지점에 다가가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 우리가 조금 더 깊게 들여다 볼 것은 바로 보이는 것 너머이다. 작가는 모든 것이 침잠한 형언하기 어려운 묵상의 상태를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다가가는데, 그 끝에 멀고도 가까운 적요의 세계가 있다.『푸르스름한 걸음걸이』는 작가가 관람자와 함께 그의 고향이자 이상향인 적요의 세계를 함께 걸어보자는 속삭임이기도 하다. 그의 초기작 중 하나의 예를 들자면, 김윤수는 골판지를 일정하게 잘라내어 감아 쌓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 과정을 거쳐 비로소 거대한 소쿠리와 같은 형태의 결과물이 나타난다. 수공예 방식으로 제작된 이 조각은 자연스레 나타나는 중력의 원리로 고정되지도 그렇다고 무너지지도 않은 상태로 유지된다. 이처럼 그의 작업 전반에는 유연함과 임의성이 동반되는데,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이른바 미술이 요구하는 관습과 형식의 요구에서 탈주하여 질료가 지시하는 하나의 방향으로 따라감으로써 자연스레 수행적 과정이 이어진다. 여기에서 수행은 목적이 아니라 물질과 촉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사이를 길항한다. 김윤수는 이처럼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상태로 불러온다. 블랑쇼(M. Blachot)는 문학의 본질을 바깥에서 찾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예술의 본질이 작업의 시간에 있다는 의미이다. 김윤수는 초기작부터 현재까지 말이 거주하지 않은 세계를 견지한다. 그가 사용하는 조형언어들 - 울트라마린, 낱말, 드로잉, 종이, 인쇄, 씨앗, 책, 가변성 - 은 그의 작업과 삶 전반에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반복을 위한 반복이 아닌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 조금 더 멀리 나아가기를, 반대로 조금 더 자신의 생각 가까이로 다가가기 위함일 것이다. 그래서 작업은 말 대신 생각을 끌어내는 하나의 미학적 장치와 같을 것이다. 이는 동시대예술에서 설명과 지문의 비중이 커지는 흐름과는 결이 다른 태도의 차이를 드러내는 지점이다. 그래서'적요(寂寥)'는 김윤수가 어떤 작가인지를 보여주는 낱말이다. 적요는 소리가 사라진 텅 빈 상태를 비유한다. 그는 적요를"대기를 메우며 소리를 닫고 깊이를 지우는 풍경"(작가의 글)이라고 설명한다. 모더니즘 이후 세계가 벌인 속도경쟁은 결과적으로 원형적 세계의 흔적을 지우고 그곳에 새로운 표지석을 세우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적요의 세계란 소외의 개념일 수 없을 것이다.

김윤수_바람의 표면_비닐 쌓기_59×37.5×27cm_2011~8
김윤수_표류(그녀의 바다에서 그의 하늘까지, 그녀의 산과 그의 구름 사이)_ 캔버스에 울트라마린블루 안료, 파스텔_ 130×194cm_2006~7
김윤수_네 개의 구멍_판화 종이에 울트라마린블루 안료, 파스텔_55.5×75.4cm×4_2006
김윤수_푸르스름한 걸음걸이展_우민아트센터_2024
김윤수_푸르스름한 걸음걸이展_우민아트센터_2024

2. 코레오그래피 ● 우민아트센터의 전시장은 가운데 벽면을 기준으로 두 개의 직육면체 공간이 서로 어긋나게 마주하고 있다. 작가는 이 두 공간이 하나의 입구로 열려 있는 특이성을 이용해 벽을 기준으로 삼아 일정한 간격으로 드로잉을 설치하고 그 주변에 높낮이를 달리한 설치작업, 아트북, 오브제 등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는 주제의 높낮이, 매체의 속성, 작업에 관한 연대기적 분류가 애초부터 제외되었다. 설치의 원리가 있다면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관계항을 따라가는 것. 무엇을 지시하기보다 중립적인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무엇보다 두 개의 전시장을 횡단하는 (일정한 방향 없이 흔들리는) 드로잉은 공기의 흐름 또는 몸 또는 풍경의 지문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더불어 이 드로잉들은 악보 또는 무용보 또는 약도처럼 활용될 것이다. 전시의 관람자는 벽면에 일정하게 자리잡고 있는 드로잉을 의식없이 따라가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관람자는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이자 동시에 드로잉과 함께 동행하는 동반자가 된다. 따라서 드로잉은 이 기행의 씨실이 되고 동반자는 날실이 되어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하나의 공간 사이를 직조하게 된다. 씨실이 된 드로잉 사이사이에 출판물, 오브제, 텍스트, 씨앗 등이 위치하는데, 동반자는 씨실 주변의 존재들을 관찰하며 자연스레 코레오그래피의 공간이라는 새로운 겹 하나가 생성되는 것을 감각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드로잉은 감상의 대상에서 관람자와 상호작용하며 모종의 비언어적 관계가 형성된다. 관람객이자 전시의 동행자인 익명의 인물들은 드로잉이 걸린 간격을 따라가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추상적인 풍경을 옆에 두고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아가 본인 스스로 조금 빠르게 혹은 조금 느리게 속도를 조절하면서 본인도 몰랐던 저마다의 보폭을 찾아갈 것이다. 김윤수의 작업은 매체나 그 규모와 무관하게 느리지도 그렇다고 결코 서두르지도 않은 그만의 고유한 시간과 호흡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더 푸르스름한 걸음걸이란 과연 무엇인지 질문해보자.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아무래도 걷기라는 문맥일 것이다. 오늘날 걷기는 사회문화보건을 위한 신체 실천으로 확장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걸음걸이는 신체 건강을 측정하는 하나의 표준이 되어가고 있다. 다양성의 시대라고 부르짖지만, 현실은 하나의 목적을 위한 유사상품의 홍수에 빠진 시대이다. 한편 김윤수가 제안하는 걸음걸이는 존재하기를 위한 어떤 절실함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고요의 세계를 추구한다는 시적 서사는 예술가의 삶이 현실 바깥에 위치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술은 블랑쇼가 역설하듯, 세계의 안쪽으로 더 격렬히 침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창작 자체가 예술의 본질이라는 의미이다. 나에게 김윤수의 푸르스름한 걸음걸이는 하나의 화두처럼 다가왔다. 스테판 말라르메(S. Mallarmé)의 시 「한번의 주사위가 결코 우연을 없애지 못하리라」(Un Coup de Dés Jamais n'abolira le hasard, 1897)는 시의 의미 이전에 활자들이 존재하는 공간으로서의 페이지(page)를 주목해야 한다. 말라르메는 형식화된 시를 폐기하고 페이지를 평면의 공간, 드로잉의 장소로 원기능을 전유하여 문장을 해체하고 낱말들을 주사위 던지듯 페이지 위에 흩뿌려 시가 하나의 드로잉이자 행위에 따른 우연의 결과로 제시한다. 침묵의 상태에 머물고 있는 묵음의 낱말과 문장은 이제 전시의 행위자인 동반자의 몫이 된다. 여기에서 동반자는 마치 말벌처럼 드로잉과 공간 사이를 연결하는 매질이 되어 비로소 푸르스름한 걸음걸이가 엉기성기 직조되기 시작한다. 예컨대 부르스 나우만(B. Nauman)의 걷기는 초기 조각이 신체의 유기성을 고민하게 된 서구 조각의 분기점을 마련한 콘트라포스토를 차용하여 조형예술의 물성이 작품 제작에 그치지 않고 비물질적인 신체 행위와의 연결고리를 질문한다. 이에 반해 김윤수는 어떤 특정한 걷기를 제안하지 않는다. 전시의 관람자는 작품을 따라가면서 어떤 운율의 흐름을 파악하게 된다. 다만 그것이 특정한 몸짓이나 행위로 체현되는 것은 아니다. 벽면을 타고 씨실의 리듬이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 위아래에 다른 드로잉, 설치 등이 리듬에 영향을 주거나 주석을 붙여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렇게 관람자-동행자는 매우 사소하게 허리를 숙이거나 쪼그려 앉아 어떤 변화에 감응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푸르스름한 걸음걸이는 또렷한 하나의 형상으로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걸음은 주저하고 눈치보고 그러다가도 용기를 내어 작업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입 속에 맴도는 말과 같은 걷기이기 때문이다.

김윤수_푸르스름한 걸음걸이展_우민아트센터_2024
김윤수_푸르스름한 걸음걸이展_우민아트센터_2024
김윤수_푸르스름한 걸음걸이展_우민아트센터_2024
김윤수_푸르스름한 걸음걸이展_우민아트센터_2024
김윤수_푸르스름한 걸음걸이展_우민아트센터_2024
김윤수_멀고도 가까운_수채 종이에 울트라마린블루 과슈_1400×4267cm_2023
김윤수_허밍 허밍_작업노트, 야생의 씨앗, 고비사막 모래, 울트라마린블루 안료, 비닐, 44페이지로 구성된 압화노트, 울트라마린블루 아크릴물감 콜라주_2020~1
김윤수_허밍 허밍_작업노트, 야생의 씨앗, 고비사막 모래, 울트라마린블루 안료, 비닐, 44페이지로 구성된 압화노트, 울트라마린블루 아크릴물감 콜라주_2020~1_부분
김윤수_바람이 밤새도록 꽃밭을 지나간다_ 바람드로잉 360장 쌓기, 옆면에 색연필_10.3×32×21.4cm_2016
김윤수_모든 것이 온다, 모든 것이 간다 (바람이 쉼이 없이 세상의 모든 경계를 어루만져준다)_ 38페이지로 구성된 책, 잉크젯 프린트, 프렌치 제본_23.5×36cm_2015

3. 비-재현 ● 이번 전시 서문에서 김윤수가 인용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사소설 『설국』의 첫 문장,"현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는 내게 많은 상상과 질문을 일으켰다. 이 명문은 자연과 문명 사이에서 나타난 숭고한 순간을 증언한다. 가와바타의 글을 통해 김윤수가 건네고 싶었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눈으로 덮인 고장의 모습에서 초월적인 숭고미를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곧이어 뒤따르는 문장도 살펴보자."창밖의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이 문장을 읽는 순간, 김윤수는 숭고한 세계의 현현 이전에 색채와 대지의 관계 그리고 이 관계 속에 내재하는 헤아릴 수 없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들의 섞임과 분유의 상태를 상상했을 것이다. 생각해보자. 고장을 덮은 눈더미는 밤이라는 비가역적 시간의 본질을 전복하고 있다. 자연이라는 절대적인 질서 너머를 향하는 행위야말로 실재를 발견하려는 예술가의 숙명일 것이다. 김윤수는 이 인용문을 빌려 자신이 얼마나 푸르스름한 세계에 도달하고 싶은지를 비스듬이 드러내는 것 같다. 나는 김윤수가 작업을 통해 절대적인 것과 불안정한 것이 스스로 균형을 잡아가며 역사, 전통, 기억으로 형성되는 인류학적 장소성을 벗어나 색채와 물질의 고유성이 나타나는 지점을 찾아가는 기행자와 같다고 여긴다. 김윤수는 자연의 광경을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현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풍경 너머 가장자리를 향한다. ■ 정현

Vol.20240710e | 김윤수展 / KIMYUNSOO / 金潤秀 / installation.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