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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리 홈페이지_www.ahreesong.com 인스타그램_@ahreesong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강릉시 주최,주관 / 대추무파인아트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대추무파인아트 Daechumoo Fine Art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소목길 18-21 Tel. +82.(0)33.642.6708 www.daechumoo.com @daechumoo
나와 너, 너와 나, 분별없는 몸으로의 시도 ● 동일성 철학은 개별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 안으로 끌어들여 차이를 거부한다. - 심귀연
몸의 소리 ● 몸은 말없이 우리에게 신호를 보냅니다. 아니 '말없이'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몸의 말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몸의 말걸기를 단박에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죠. 몸의 말, 우리에게 건네는 그 신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가 몸의 주인이라는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몸의 주인이 아니니까요. 우리는 선험적으로 몸을 지배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요? 잔혹 연극의 창시자로 알려진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는 연극에서 언어를 제거하려 했습니다. 몸의 목소리는 문법을 따르지 않는, 그야말로 야생성 자체를 되찾고 싶었던 겁니다. 이처럼 스스로 언어를 버리는 행위는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인간 역시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조각이란 사실을 환기하는 과정일 겁니다. 언어의 바깥을 향하는 과정을 아르토는 '기관 없는 신체'라 불렀습니다. 이 개념은 들뢰즈(Deleuze) 철학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들뢰즈의 탈영토화 개념을 떠올려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기관 없는 신체와 탈영토화는 인간을 구성하는 정신, 몸, 언어와 같은 관습에서 벗어나라고 주장합니다. 만약 정신, 몸, 언어를 제외한다면 과연 인간에게 남은 건 무엇일까요? 이는 곧 인간을 구성하는 기관들과 분리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르토는 이처럼 몸과 기관을 분리하려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로 통일된 몸이란 파시스트와 다름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기관 없는 신체는 독재와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몸의 신호를 듣는다는 것은 정신이 통치하는 몸이 아닌 몸 자체의 소리를 감각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몸이 신호를 보낸다 해도 자신이 그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신호라면 어떨까요? 익숙치 않은 신호들은 대개 무시되거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전보다 명확하게 그 존재감을 드러낼 수도 있을 겁니다. 유럽의 근대사상은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물질은 사고하지 않는 비존재로 여겼습니다. 알다시피 정신과 물질로 고정된 데카르트(Descartes)의 이원론은 물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인간만이 영혼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지요. 인간의 언어 습관이야말로 인간중심주의를 가장 잘 드러냅니다. 인간은 비인간 존재를 두고 이것, 저것으로 지칭합니다. 이는 주검을 경외시하는 관습과도 이어져 있습니다. 죽음은 영혼과 신체를 분리하여 영혼이 사라진 신체를 타자화, 사물화합니다. 그만큼 근대 사상은 정신 우월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인간중심주의로 벌어진 무분별한 개발주의의 여파로 인한 전지구적 기후위기를 통해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자는 반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란 결국 지구를 황폐화한 인간중심주의로 비롯된 현상입니다. 가시화된 기후위기는 침묵하던 물질이 인류에 고하는 경고이자 물질이 외부의 영향을 받아 반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최근 들어 신유물론 연구가 활발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현재 새로운 학문적 경향을 끌고 가는 신유물론은 정신과 물질을 동등하게 바라보고자 합니다.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관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인간이 물질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예술 현장에서의 반성과 성찰도 눈에 띄는 변화입니다. 송아리의 작업 세계는 전지구적인 위기라는 거시적 관점과 작가 개인의 성장사에서 겪은 하나의 사건이라는 미시적 관점이 포개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은 작가가 이러한 미시사적 세계와 접속하여 다양한 존재들이 어떻게 새로운 환경 또는 생태계를 향하여 다가가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잃어버린 몸, 되찾은 몸 ● 송아리는 십 대에 성장판 이상으로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게 됩니다. 당시에는 장애 판정을 받았으나, 성인이 되면서 비장애인이 되는 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작가는 신체를 기준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범주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것은 장애와 비장애의 기준이 기준은 어떻게 구성되며 장애 판정의 조건과 장애 유무가 포함하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일 것입니다. 장애를 구분하려면 먼저 비장애라는 표준화된 기준이 필요합니다. 장애는 정신과 신체가 이러한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 병리학적 경우일 겁니다. 그러나 장애 판정 여부는 단지 병리학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장애는 사회적 소외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과거의 장애 인식은 비장애성에 근접하기 위한 의학적 치료에 집중되었기에 장애인의 사회적 관계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2) 작가가 장애를 겪게 된 건 초등학생 시절이었고 당시 발레를 전공하고 있었습니다. 작가는 본인이 겪은 장애에 애써 의미를 두지는 않습니다만, 이후 그의 작업세계는 몸을 유일한 존재가 아닌 다중적인 존재를 질문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몸이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이 되어버린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장애인에서 비장애인으로의 전환은 분명히 개인적∙심리적∙사회적∙신체적 공백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이 공백이 이후 그의 작업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어설픈 몸짓, 괴물성, 비인칭성은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일 것입니다.
작업 초기에는 생물학적 변이 또는 변종성을 주목하는데, 이 당시에는 포스트휴머니즘을 참조하기도 하지만, 작가는 포스트휴머니즘에 내재한 진화론적 입장과는 거리를 둡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그의 세계관은 진화론적 생존이라기보다 끊임없이 새로운 되기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호주의 인류학자 비키 커비(Vicki Kirby)는 초월적인 세계관을 품고 있는 포스트휴머니즘을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물질과 비물질,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이분법을 초월하자는 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커비에게 몸 자체는 하나의 기관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생각하는 기관이기에 "모든 물질은 끊임없는 현현을 통해서 스스로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쓴다"3)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의견은 들뢰즈와 가타리(Guattari)의 '되기' 개념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미 그들은 글쓰기를 통해 이분법의 초월을 실천했습니다. 그들이 함께 글을 쓰려는 의지는 『천개의 고원』 서문 「리좀」 첫 페이지에 다중적인 정체성을 분별하지 않는 글쓰기로서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더 이상 「나」라고 말하지 않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고 말하든 말하지 않든 더 이상 아무 상관이 없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움을 받았고 빨려 들어 갔고 다양화되었다."4) 각자 자기의 것을 찾아낼 것이라는 그들의 '되기' 개념은 포스트휴머니즘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은 초월하라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소수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죠. 그들이 기관 없는 신체(CsO, Coprs sans Organ)를 강조한 이유는 기관을 생명의 반대 개념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들뢰즈에게 기관 없는 신체란 기관-기계에 맞서서 '미끄럽고 불투명하고 팽팽한 자신의 표면'을 대립시키는 것이자, 묶이고 연결되고 재절단된 흐름에 맞서 자신의 '미분화된 무형의 유체'를 대립시키는 것"5)이라고 여겼습니다.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는 서구의 신학사상과 대립합니다. 신학은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사상이자 관습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과연 인류는 인간중심적 태도에서 벗어나 다양체에 다가가는 길목에 도달한 것일까요? 송아리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이자 다중인 신체 개념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수행적 조각 ● 송아리의 예술세계는 고정되기를 거부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퍼포먼스적 조각(performative sculpture)"라는 개념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작가는 퍼포먼스의 일회성 대신 이를 연장하여 행위성과 조각성이 등가가 되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그의 초기작 「고인 시간 Contained Time」(2014-2024)은 식물 열매를 방수용 우레탄으로 밀봉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부패하면서 액화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작업입니다. 작가는 이 작업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와 같이 「고인 시간」은 실시간으로 움직이며 과정들을 끊임없이 형성한다."6) 퍼포먼스적 조각이라는 개념은 1990년대 들어서 구체화되었지만 뒤샹(Duchamp)의 레디메이드, 플럭서스가 추구한 일상적인 것들의 새로운 질서 만들기, 그리고 앤디 워홀(Andy Warhol)의 기계적인 작업 과정을 비롯하여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급진적 젠더 이론이 제시한 수행성에 이르는 인식의 재맥락화는 성, 인종, 언어와 같은 이분법적인 견고한 고정관념을 허물어트리는 이념의 실천이기도 합니다. 또한 퍼포먼스 조각과 수행성을 의미하는 performative 사이에는 이 개념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의미의 간극은 상이할 수도 있습니다. 작가는 모더니즘에서 후기모더니즘으로의 경계에서 확장된 의미의 저자성을 그 예로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작가가 지시하는 퍼포먼스적 조각은 오히려 수행적 조각의 범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여기에서의 수행성은 예술가와 물질 사이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일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내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물질의 변화로 비롯된 양태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컨대 태도를 드러낸 비정형적인 비체(abject)를 통해 앵포르멜(informel)한 조각의 잠재력을 끌어낸 에바 헤세(Eva Hesse)의 작업부터 플럭서스의 실험과 서유럽의 누보레알리즘(Nouveau Réalisme) 운동을 거쳐 앤소니 곰리(Anthony Gormly)가 자신의 몸을 무한하게 복제하는 수행적 작업 방식도 참조할 대상입니다. 송아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정체성을 스스로 선택하고 교체할 자유를 획득하면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몸을 구축한다. 관용적으로 표현되어온 '정상'의 '순수한 몸'에 도전하며 신체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유발한다."7) 위의 인용문은 송아리에게 몸은 자신만의 것도 아님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과 타자를 구분하지 않으려 합니다. 특히 몸을 통해 표현하려는 욕망과 각기 다른 몸의 하나-되기의 실험은 팬데믹 이후 더욱 강화된 위생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의지로 보입니다. 이처럼 그의 점점 더 분별없는 세계로 나아가는 중입니다. 따라서 퍼포먼스적 조각(performative sculpture)을 직역한 수행적 조각으로 번역한다면 시각예술의 차원을 넘어 신체와 연결된 다양한 담론을 아우르는 열린 개념이 될 것 같습니다.
분별없는 몸 ● 「갗그물 Skin-Net」(2023)은 그간 신체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실험들이 혼합된 작업으로 라텍스 피부를 가진 비정형적이면서 기계 장치가 삽입된 유연한 조각이자 퍼포머가 그 안으로 들어가 행위를 하는 일종의 피부-조각입니다. 디디에 앙지외(Didier Anzieu)는 피부를 신체에서 가장 큰 기관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메를로-퐁티(Merleau-Ponty)에게 피부는 모호한 존재입니다. 피부가 느끼는 것이 외부의 자극인지, 아니면 내부에서의 발현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피부를 단정합니다. 그것은 외피이기에 외부의 것을 차단하는 기능으로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생각하는 피부의 의미도 이와 유사합니다. 그는 「갗그물」의 라텍스 피부가 곧 존재와 다름없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중피부는 자아를 덮개처럼 감싸거나, 내부를 보호하기 위해 외부를 차단하거나, 타자들과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 지점이나,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안팎을 넘나들며 다른 신체로부터 탈구되어서도 낯선 존재들과 만난다"고 말합니다. 「너는 나의 숙주」(2022)는 「갗그물」로 나아가는 변곡점의 작업처럼 보입니다. 본 작업은 팀으로 이뤄졌는데, 작가에게 '팀'은 남다른 의미를 가지는 듯합니다. 송아리는 애초부터 구체적인 주제를 통해, 그리고 모든 공정을 함께 수행하는 방식을 통해 팀 전체가 작업에 관한 무한책임을 갖는 방식으로 보입니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팀원은 콘셉트부터 소리 채집, 편집, 신체 활동, 특정 식물에 관한 실험과 음식 실험에 이르는 매우 미시적이면서 동시에 창작을 기반으로 하되 주제에 따라 주제, 작업 방식, 내용, 성격 등이 끊임없이 변화하여 특정한 틀에 갇히기를 미리 차단하려는 것 같이 보입니다. 알다시피 공동체란 이념만큼이나 현실적인 관계로 구성됩니다. 그래서 송아리의 공동작업이 기대되기도 합니다. 더불어 일련의 실험을 거치면서 작가가 지향하는 퍼포먼스적 조각이 앞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증을 더합니다. 내가 처음 본 「갗그물」은 변증법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수용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와 작업 과정을 살펴본 후 나의 생각은 바뀌었습니다. 「갗그물」의 피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매질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습니다. 내부와 외부가 결국 하나인 상태, 그러니까 「갗그물」은 그 자체로 경계지인 셈입니다. 왜냐하면 이 피부-조각은 바깥이면서 동시에 안이기 때문입니다. 「갗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상작업 「피부정전」(2023)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피부정전」은 내시경 카메라로 위와 장을 관찰한 영상물로 병변을 찾기 위한 의학적 검사와 달리 피부라는 신비로운 세계를 탐험한다는 입장으로 촬영된 작업입니다. 작가는 특정 기능이 장착된 기계라도 그 목적을 달리 사용한다면, 그러니까 태도와 목적이 바뀌면 그 내용도 차이를 산출한다는 걸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 작업에 이르자 송아리의 작업은 트랜스휴머니즘과의 접속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모여 사는 세계는 아마도 매우 낯설게 느껴질 것입니다. 여성학자 뤼스 아리가레(Luce Irigaray)는 서구 남성들이 문명을 일으켜 자연을 통치하게 되었다고 자랑하지만, 막상 정신 고갈과 기억상실로 인해 동일성의 반복을 일으켰다고 평합니다. 그러면서 "타자를 배려하지 않은 채 세계를 짓고자 함으로써 인간은 또한 자신으로부터 고유의 것을 몰수당하는 데 이바지했다"8)고 진단합니다. 이처럼 「갗그물」에 이르러 작가는 여성, 괴물, 타자, 장애, 신체를 담론화하면서 동시에 질료적 다양성을 꾀하기 시작합니다.
탈주선 ● 팬데믹 이후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합니다. 인본주의는 인류가 지켜야 할 최우선의 가치라는 최종전선이 무너진 겁니다. 전 지구적 팬데믹은 세계 근대화 이후 인류 전체가 처음으로 인간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한 시기입니다. 인도의 역사가이자 후기식민주의 학자인 디페시 차크라바티(Depesh Chakrabarty)에게 팬데믹은 바이러스라는 미생물과 인간 사이의 "진화적 싸움"으로서, "인간, 호포사피엔스라고 불리는 종 기술적 지배력은 가졌을 지언정 이 행성에서 펼쳐지는 다윈적인 생명과 진화의 역사 바깥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사건이라고 해석합니다.9) 이제 더 이상 인간은 지구상의 가장 우월한 존재가 아닙니다. 생명에 대한 범주와 대상의 기준이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당연시되던 인식의 틀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세상의 질서가 얼마나 인간 중심으로 편재되었는지는 가장 가까운 일상에서도 쉽게 발견되죠. ● 이미 모더니즘이 도래할 즈음부터 인류는 지구의 미래가 위태로워질 것임은 예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견에도 불구하고 인간중심의 세계관은 자연의 원리에서 보다 편리하고 쾌적한 상태의 삶을 추구합니다. 더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하려는 의지는 단순히 속도만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생태의 흐름과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죠. 들뢰즈가 말한 탈주선(Flying Line)도 자본과 개발주의의 폭력에서 벗어나라는 의미였을 겁니다. 이른바 끊임없는 성장이라는 모더니즘의 욕망이 커질수록 예술은 속도를 지연시키거나 아예 멈추게 하려는 시적 개입을 시도해 왔습니다. 예술가들의 시적 개입은 단지 모더니티의 문제를 재현하여 고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방위적인 변화를 요청합니다. 이 요청은 그간 인간중심주의에 길들어진 습성을 바꿔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겁니다. ■ 정현
* 각주 1) 심귀연, 『이 책은 신유물론이다』, 날, 2024, 67쪽 2) 캐롤 토마스(Carol Thomas), 「장애이론」, 『장애학의 오늘을 말하다』(Disability Studies Today) 참조, 그린비, 2017, 74-75쪽 3) 임소연, 「비키 커비의 읽고 쓰고 말하는 몸」, 『신유물론』, 몸문화연구소, 2022, 154쪽 4) 들뢰즈 & 가타리, 『천개의 고원』, 새물결, 2001, 11쪽 5) 송민숙, 「들뢰즈와 아르토 기관 없는 신체」, 불어불문학연구 121집, 102쪽 6) 송아리, 「변이신체 표현 연구: 퍼포먼스적 조각을 중심으로」, 박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2023, 31쪽 7) 위의 책, 31쪽 8) 뤼스 이리가레, 『사랑의 길』, 동문선, 2002, 147쪽 9) 황정아, 물질과 문학, 그리고 인간-되기, 문학동네, 2022 봄 제1호, 155쪽 critinq.wordpress.com/2020/10/16/an-era-of-pandemics-what-is-global-and-what-is-planetary-about-covid-19, 재인용
Vol.20240709d | 송아리展 / SONGAHREE / 宋아리 / painting.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