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런한 이야기 Orderly Tales

정종필展 / CHUNGJONGPHIL / 鄭淙弼 / drawing   2024_0703 ▶ 2024_0708

정종필_교통편 시리즈(버스)_종이에 펜, 색연필_21×29.7cm_2007~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주관 / 정종필 기획 / 밝은방(김인경_김효나) 후원 / 서울특별시_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0:30am~06:00pm

갤러리 라메르 GALLERY LAMER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26(인사동 194번지) 홍익빌딩 2층 제4전시실 Tel. +82.(0)2.730.5454 www.gallerylamer.com @gallerylamer

굴러가는 네모 ● 초마다 바뀌는 표정을 닮았다. 정종필 작가의 그림은 순간과 순간을 담은 정직한 얼굴이다. 미세한 변화를 알아채고 싶어 고요하게 들여다보게 되는 얼굴. 누군가의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도 자세히 보면 근육이 꿈틀대고 있듯 그의 그림은 계속해서 움직인다. ● 정종필 작가의 그림은 볼 때마다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보면 볼수록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자꾸만 튀어나와서.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들, 내가 한 번쯤 지어 봤던 얼굴들이 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그 얼굴은 버스와 트럭이었다가(「교통편」), 뉴스 아나운서였다가(「뉴스룸 아나운서」), 여자였다가(「여자 인물」), 결혼하는 연인이었다가(「결혼식」), 공중 전화기와 휠체어 탄 사람, 그림자였다가(「공원」), 동물, 과일, 악기, 표지판(「카드 그림」)이기도 하면서 글자가 되기도, 때로는 그리다 만 선이 되기도 한다. 특히 정종필 작가가 그리는 다양한 얼굴들은 가느다란 선으로 그린 네모 안에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얼굴을 담은 네모들은 반복되고 나열되면서 또 다른 얼굴들이 앞으로도 계속 나타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연달아 이어지는 네모는 종이 전체를 채울 때도 있고, 여백을 남기고 일부분만 채울 때도 있는데, 이러한 불규칙한 연쇄는 보는 이가 네모 안과 네모 밖을 넘나들게 하고, 비어 있는 곳에 시선이 닿도록 만든다. 나는 흰색의 빈 곳을 보면서 작가가 그리는 다양한 얼굴들이 굴러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정면을 응시한 채 멈춰 있는 듯 보이지만 가능성의 시간이 응축된 빈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또 다른 얼굴로 그려지기를 기대하며 미래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고 말이다. 정종필 작가가 중학교 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밤마다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반복과 몰입이 만들어 내는 네모와 네모를 입은 얼굴들이 모나미 볼펜을 쥔 작가의 손끝에서 시작되어 끝없이 굴러갈 것이라는 신뢰를 갖게 한다.

정종필_교통편 시리즈(버스)_종이에 펜, 색연필_21×29.7cm_2007~

네모는 여지로 가득 차 있고 ● 정종필 작가는 기억에 각인된 한 장면을 흰색 A4 용지에 검은색 볼펜의 또렷한 선으로 재현해 낸다. 그중 교통편 시리즈는 작가가 어릴 때부터 등굣길과 산책길에서 보았던 버스와 화물 트럭, 레미콘 믹서트럭 들이 다양한 색을 입고 주차되듯 멈춰 있다. 차들의 앞모습과 뒷모습, 옆모습이 평면에 납작하게 펼쳐져 있는데, 바퀴의 다양한 무늬들, 광고판에 쓰인 아주 작고도 구체적인 글씨들, 버스 내부 손잡이 등의 디테일이 묘사된 것을 보면 이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소요됐을 기나긴 시간을 짐작하게 된다.

정종필_교통편 시리즈(버스)_종이에 펜, 색연필_21×29.7cm_2007~

특히 교통편 시리즈 중에서도 버스 그림들은 '재현의 과정'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그림이다. 완성과 미완성의 경계에 놓인 그림들이 한 장 안에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버스를 그리다 만 선들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완성된 버스들이 알록달록하게 채색되어 있다. 이때 먼저 시선이 닿는 곳은 완성된 버스를 둘러싸고 있는, 버스가 되려다 만 선들이다. 작가가 버스를 그리기 위해 외형을 선으로 그리며 자리를 잡아 놓은 이 흔적들은 수백 장의 다른 그림들과 함께 작가의 작업 공간에 가지런히 보관되어 또 다른 선으로 이어지기를 기다린다. 작가는 보관된 그림 종이의 순서를 정확히 외우고, 자신만의 질서에 따라 종이를 꺼낸 뒤 선을 이어 나가며 그림 그리기를 반복한다. 그러니까 이 선들은 그리다 만 상태의 '멈춤'이 아니라, 언젠가 완성될 가능성을 품은 '과정'인 것이다. 정종필 작가에게 그림 그리는 행위는 늘 '현재형'이다.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완성을 기약하지만 어쩌면 완성될 필요가 없는 이 선들은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던 '완성'의 기준을 전복시킨다. 매일 같은 시간 그림 그리기에 몰입하는 '지금'을 오롯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이다. 뼈대를 그리고, 몸을 만들고, 옷을 입히는 과정의 무한 반복은 선으로부터 비롯된 시간을 팽창시켰다 축소하고, 기억과 기억 사이를 연결한다. 세밀하게 공들여 묘사한 버스 그림들과 그리다 만 선들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그림은 언젠가 또 책상 위에 놓일 여지로 가득 채워져, 비어 있음의 충만함을 감각하게 한다.

정종필_교통편 시리즈(버스)_종이에 펜, 색연필_21×29.7cm_2007~

그리다 만 선에 먼저 시선이 닿았다면, 그다음으로 시선이 닿는 곳은 완성된 버스의 본체다. 앞모습과 뒷모습에서는 마치 어떤 생물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익살스러움이 묻어난다. 앞 유리창 와이퍼는 삐죽 쳐진 눈썹, 각기 다른 모양의 전조등은 두 눈, 번호판에 쓰인 숫자는 웃는 입술 사이로 드러난 가지런한 치열 같아 보인다. 바퀴의 다른 무늬들은 미세한 조각들로 새겨지면서 만화경의 다양한 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변주된다. 특히 버스의 앞모습 중에서도 삼각형에 가깝게 표현한 부분은 버스 그림에서 가장 독특한 지점이다. 이는 작가가 좌회전 또는 우회전하는 버스의 모습을 봤던 장면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은 버스의 얼굴이 세모를 품은 네모였다는 것. 네모는 매번 새롭게 탄생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해 주는 이 부분은 정종필 작가만의 고유한 시선을 보여준다.

정종필_결혼식 시리즈_종이에 펜, 색연필_21×29.7cm_2004~

교통편 시리즈에서 여러 선의 흔적과 완성된 버스 형상들이 올록볼록한 요철을 만지는 듯한 감각을 발생시켰다면, 결혼식과 공원 시리즈에서는 각기 다른 시간의 장면과 사물들 여러 개가 한 장 안에 뒤섞이며 패턴을 만들어 낸다. 결혼식 시리즈에서는 신부와 신랑 그림 주변으로 피아노, 해바라기, 나비, 무지개, 신호등, 허수아비, 과일, 씨름하는 선수 등 일상적인 사물과 생물들이 감싸고, 공원 시리즈에서는 공중 전화기와 휠체어 탄 사람을 중심으로 지나가는 사람들과 말린 생선, 고양이, 분수대, 솜사탕 리어카 등의 그림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러한 사물과 생물들은 작가의 유년 시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각각 다른 시간대에서 각인된 것들로, 한 장면 안에서 바느질하듯 조합되고 엮인다. 기억의 콜라주처럼. 고정된 한 장면을 중심으로 다발적인 기억들이 와글와글 모여들면서 마침내 A4 용지를 가득 채운 그림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 특유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 그림이 자아내는 따스한 온기는 정종필 작가가 주변 사람들에게 건네는 카드 그림을 보면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직장 동료와 낮에 함께 그림 그리는 사람들에게 작가는 직접 그린 카드 그림을 손수 건네준다. 색연필로 채색한 아기자기한 그림들의 특징은 한결같이 미소 짓거나 활짝 웃는 표정이라는 점이다. 보는 나도 따라 웃게 되는 얼굴들이다. ● 정종필 작가의 시선은 늘 사람을 향해 있다. 이는 대부분의 얼굴들이 옆모습이나 뒷모습보다는 정면을 향해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주변 풍경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품는 작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편안히 여기는 방식인 그림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고 나눈다.

정종필_뉴스룸 아나운서 시리즈_종이에 펜_21×29.7cm_2015~

네 모 는 침 묵 으 로 노 래 한 다 ● 뉴스룸 아나운서 시리즈의 얼굴들은 입술을 오므리거나 다문 채 무언가를 말할 준비를 하고 있다. 아니, 이미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수많은 얼굴들이 내뱉는 목소리가 만드는 기묘한 화음이 들리는 것만 같다. 그림을 보는 나의 숨소리가 겹치면서 그림과 나는 침묵으로 노래하는 우리가 된다. 아나운서 그림을 계속 그리는 이유에 대한 대답으로 작가는 "목소리가 좋아서"라고 말했다. * ● 작가는 타인의 말소리를 기억에 담아두었다가 시각적으로 불러낸다. 이때에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미묘한 변화와 차이로 고유한 리듬을 만들면서 기록한다. 언뜻 보면 똑같은 인물들을 같은 구도로 그린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얼굴들은 머리 스타일, 입고 있는 옷차림, 넥타이 패턴, 바깥과 실내를 오가는 배경이 조금씩 달라지면서 나란히 이어진다. 작가가 보았거나 혹은 새롭게 창조해냈을 장면들에서 침묵으로 만들어진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하다.

정종필_뉴스룸 아나운서 시리즈_종이에 펜_21×29.7cm_2015~

정종필 작가에게 그림 그리는 작업(특히 자신이 창작하는 그림)은 삶의 우선순위 중 맨 처음에 놓이는 중심이다. 그의 일과는 매일 동일하다. 오티스타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한 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손을 씻고 바로 작업하는 책상으로 간다. 컴퓨터로 뉴스 기사와 여러 인물을 검색한다. 그다음에는 주로 송창식 음악이나 동요를 들으면서 A4 용지에 모나미 볼펜과 마카로 교통편, 뉴스룸 아나운서, 결혼식 등 좋아하는 테마들을 그려 나간다. 또 종이 신문의 일러스트를 보며 A4 용지 크기의 도화지에 따라 그리고 나면, 마지막으로 노트에 일기를 쓰고 동화책을 필사하는 것으로 작업을 마무리 짓는다.

정종필_여자 인물 시리즈_종이에 펜_21×29.7cm_2015~

특히 동화책 필사 노트는 단순히 글자를 나열한 것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그림 작품처럼 눈여겨보게 된다. 문자를 주고받을 때는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바르게 지키는 작가임에도 필사할 때는 띄어쓰기 규칙을 무너뜨리고 글자와 글자 사이의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마치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을 보는 듯한 한글 글자들은 매일 똑같은 루틴을 지켜내는 작가의 일상과 무척 닮아있다. 작가의 루틴은 작가가 자신의 그림에 물방울이나 과자 부스러기가 튀어 얼룩이 묻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처럼 매일매일 귀하게 다루어지며 엄격하게 반복된다.

정종필_여자 인물 시리즈_종이에 펜_21×29.7cm_2015~

정종필 작가의 그림들은 한때에는 낙서로 취급되어 버려진 적이 있다. 우리의 하루하루도 매일 과거가 되어 버려지고 있듯 이 그림들 또한 의미 없는 반복이라 여겨졌으리라. 그럼에도 정종필 작가의 그림이 관객 앞에 놓일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반복 덕분이다. 계속해서 버려진다고 해도 절대 버려지지 않는 것. 결코 버릴 수 없는 것. 누구나 마음에 품고 있는 그 무엇을 정종필 작가는 매일 종이에 꺼내고, 실현하고, 움켜쥔다. ● 이러한 정종필 작가의 무한한 반복과 변주는 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 ** 을 연상하게 한다. 이 작품은 레몽 크노가 '한 젊은이를 우연히 버스와 광장에서 두 번 마주친다.'는 간단한 일화를 99가지 문체로 변주해낸 글이다. 현재, 과거 버전이나 희곡, 노래 버전, 수학과 기하학 버전 등 다채로운 방식으로 묘사되는 이 작품은 '다양한 문체가 지닌 잠재성과 혁명적인 힘을 보여주는 책'으로 문체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나의 이야기를 얼마나 어떻게 다르게 변주해내는지를 목격할 수 있는 이 책은 끝없는 변주로 점철된 정종필 작가의 그림과 매우 흡사해 보인다. 움베르트 에코는 이 책을 두고 '바퀴를 발명해낸 것과 같은데, 이걸로 누구든 원하는 만큼 멀리 갈 수 있으리라.'라고 했다. 정종필 작가의 그림 또한 보는 이를 먼 곳으로 데려다준다. 그것은 정종필 작가가 매일 밤 어김없이 종이를 마주 보며 손끝을 부지런히 움직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그가 그려 나갈, 한계 없이 열려 있는 네모를 입은 얼굴들을 보면서 함께 굴러가고, 여지를 상상하고, 노래하며 걸어가고 싶어진다. 끝을 알 수 없는 정도의 멀리까지. ■ 라유경

* 김효나·김인경, 『무엇: 발달장애 창작자의 시각적 표현을 이해하고 지원하는 책』, 밝은방, 2021. ** 레몽 크노, 『문체 연습』, 조재룡 옮김, 문학동네, 2020.

Vol.20240703d | 정종필展 / CHUNGJONGPHIL / 鄭淙弼 / draw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