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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02:00pm~07:00pm / 월,화요일 휴관
갤러리인 HQ GALLERY IN HQ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 97 (연희동 719-10번지) 1층, B1 Tel. +82.(0)10.9017.2016 @_innsinn_
새-(충돌하고, 현현하며, 반복하는)-해 New-(Colliding, Apparating, Recurring)-Year ● 새해가 특별한 이유는 과거를 무(無)화시키기 때문이라고, 가장 마지막 날을 덮어 버리고 가장 새로운 날을 얹는 순간 지난 모든 날들은 망각되어 버린다지만, 이를 거부하는 몸부림 또한 현연하다. 몸짓을 지닌 과거의 날들이 현 재의 뒤로 밀려난 (혹은 닦인) 붓과 물감의 흔적과도 같이 슬며시 드리우는 순간 이에 반(反)하는 시간과 공간의 단 위를 포섭하며 분투하는, 어딘가 빗겨난 새해를 맞이한다.
모든 빗줄기가 예측 가능한 방식과 방향으로 내려칠 때 이에 반발하듯 사선으로 달려 나가는 우발적 개체는 반드시 마주침을 야기한다. 이러한 마주침이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으로서의 장소, 다시 말해 선, 면, 그리고 막이 서로 마주쳐 뒤엉키며 '응고'하는, 돌발하는 클리나멘 1) 의 장소는 캔버스이자 무한히 되풀이되는 새해이다. 마지막 레이어와 최신의 레이어가 경쟁하듯 순환하는 세계, 되돌아오는 장소와 본능에 맞서, 그럼에도 다시 한 번 분투하는 제스처의 양가성은 보존과 확장이라는 성질과 더불어 몸체가 잘려 나가도 변하지 않거나 무성생식을 통 해 새로운 영토를 세우게 되는, 즉 파편화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조차 스스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그림으로서 존재한다. 역으로 '캔버스 하나'라는 단위를 채우고 있는 요소들 역시 그 자체로 파편일 수 있는데, "말라르메 이후 에 쓰인 거의 모든 현대시들은 '절대시'의 참조이기 때문에 파편적이며, 이 '절대시'의 모습은 완전히 드러날 수 없 고 그것의 부정을 통해서만 현시될 뿐" 2) 이기에 다시금 과거를 밀어내는, 트라우마와 같이 드러나는 밑면을 힘껏 부 정하는 표면을 담지하게 된다.
물질이, 혹은 시간이, 의식이, 아우라가... 집적된 영토에서 밑면을 꿰뚫어 보려는 일은 절단면을 상상하며 수백수 천 개의 지층과 단층을 굳이 세어내는 일처럼 무력한 것일 터이다. 존재하지 않는 절대시를 상정하여 비현실에 저 항한다 한들 할퀴거나 긁어내는 행위의 비가시적 은유로서 작동하는 것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 럼에도 붓질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마음은, 달라지고 싶은, 어제의 스스로에 반(反)하는, 유령에 맞서 싸우는, 동물적인 습성을 체화하여 싸우는 모든 행위로 치환되어 12월 31일을 넘기고, 서로를 가로지르며 흘러내리는 빗줄기와 같은 스트로크와 여기저기 충돌하는 감각들이 하나의 인과로 묶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각자의 소명을 지닌채 다시 한번, 여느 때처럼 담대하게 새해를 맞이한다. ■ 한지원
* 각주 1) 고대 그리스 철학자 루크레티우스가 도입한 용어로 '원자의 예측할 수 없는 이탈'이라는 뜻의 라틴명이다. 클리나멘은 허공 중에서 한 원자로 하여금 수직으로 낙하하다가 빗나가도록, 그리고 한 점에서 평행 낙하를 극히 미세하게 교란함으로써 가까운 원자와 마 주치도록, 그리고 이 마주침이 또 다른 마주침을 유발하도록 만든다.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클리나멘에 의해 일어나는 우연한 원자적·분자적 마주침이야말로 생명체에게 자유의지를 제공하는 변화의 동력이다. 2) 조르주 아감벤, 『행간』, 윤병언 옮김, 자음과모음(이룸), 2015, 78쪽
매일매일이 새롭다. 새해 같다. 정말로.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걸지도. 새해라는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새해는 환상적 개념이다. 12월 31일과 1월 1일 사이의 차이는 인간이 부여했다. 동물들에게는 그 간밤의 차로 여타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새해, 그것은 크리스마스처럼 기념비로서 거대 상징이자 인간 사회의 유령이 되었다. ● 절망과 불안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매일 밤 내일이면 새로 시작되니까 괜찮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잠으로 도망친다. 아 침이 되면 부랴부랴 새해의 마음가짐으로 집에서 뛰쳐나와 작업실로 향한다. 그렇게 매일매일 그리기를 수행한다. 연속적 이길 바라는 것인지, 분절을 향한 갈망인지 모르겠다. 다만 무와 영원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는 몸짓과는 비슷할 것이다.
캔버스. 하얀 캔버스야말로 내겐 가장 거대한 새해이다. 과거의 그림들, 지난하게 씨름하고 초과되고, 과잉된 시간에서 뛰쳐나와 맞이하는 새해의 경건한 시간. 설령 캔버스가 이미 충분한 물감과 붓질로 축적되어 있을지라도, 새해의 마음가짐으로 임한다. 붓질을 하기에 앞서 나는 완전히 순간에 몰두하고자 한다. 그 순간에 과거의 밑면은 망각되고 순간에 몰두하는 현재의 행위와 선택에 온전히 내맡겨진다. 그 순간에 어여삐 여기던 과거는 없다. 미래에 만들어질 화면을 위한 순간적 판 단만이 존재한다. 유착했던 사랑과 기억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시도와 같다. 지금까지의 붓질의 흐름, 색의 통일감, 구성적 완성도를 독립된 개체로 취급하며 현재의 뒤로 밀어버리고(닦아버리고), 과거에 반(反)하는 시간. 그것이 작업에 임할 때 나의 자세이자, 현재이며, 새해이다.
선을 그리고, 면으로 덮고, 다시 또 그 위를 선으로써 갈퀴고, 또다시 기름이 넘쳐흐르는 막을 형성하는 과정이 나의 주된 방식이다. 1월 1일에 12월 31일과는 달라지고 싶은 마음. 어제의 나에, 어제의 그림에 반(反)하는 시간과 그를 위한 방법론 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또한 형태로부터, 형상으로부터 자유로울 것. 내 판단이, 내 행위와 선택이, 단순한 네모 안에서 의 정지와 완성을 위한 것이 아니기를. 색과 기름과 붓질과 형상은 나와 별개로, 독립적으로 그들끼리 충돌하며 각자의 장 소를 차지한다. 평면 안에는 분명히, 개별체들이 점유하고, 서로의 공간을 횡단하는 구역과 만남의 장소가 있다.
그러나 몇 걸음 물러서서, 일(日)이 아니라 년(年) 단위로 봤을 때, 정말 그들이 반(反)하는 시간들이었는가? 결국 산란기 가 되면 본능적인 감에 이끌려, 강으로 온 힘을 다해 질주하고 태어난 곳에서 알을 낳은 뒤 곧바로 죽는 연어처럼, 그 시간 들은 결국 되돌아가는 순환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새해라는 유령은 과거의 패턴과 트라우마와 분투하도록 나를 조종하 고, 나의 그림은 연어 특유의 감각만큼이나 동물적인 내 습성으로 그에 맞선다. "그것들이 죽는 동시에 탄생하며 이어지는 모습 속에는 끔찍한 아름다움이 담겨있다." * ■ 문유소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민승남 역, (서울: 을유문화사, 2023), 18p
Vol.20240607b | 문유소展 / MOONYOOSO / 文釉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