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우연과 의도 사이

A Trace, intended or by chance

오원배展 / OHWONBAE / 吳元培 / painting   2024_0513 ▶ 2024_0622 / 일,월,공휴일 휴관

오원배_기록, 우연과 의도 사이展_호리아트스페이스_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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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4_0518_토요일_04:00pm

주최,기획 / 호리아트스페이스_아이프미술경영 후원 / 원메딕스인더스트리_재단법인 아이프칠드런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공휴일 휴관

호리아트스페이스 HORI ARTSPACE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80길 26 (청담동 95-4번지) 노아빌딩 3층 Tel. +82.(0)2.353.1216 www.horiartspace.com

아이프라운지 AIF Lounge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80길 26 (청담동 95-4번지) 노아빌딩 4층 Tel. +82.(0)2.518.8026 www.aifnco.com

드로잉 by 오원배 ● "드로잉은 살아있는 생물이며 스스로 증식한다. 드로잉은 상상의 기록이다. 드로잉은 비현실을 현실화하는 일체의 과정을 기록하는 행위이다. 드로잉은 모호함에 대한 확신을 갖게하는 과정이며 상상을 자극하고 구체화한다. 드로잉은 사유와 상상이라는 살을 뼈에 바르는 행위이다." - 오원배

1) 드로잉도 과학이다. ● 나이 칠십을 넘긴 화가 오원배는 지금도 몸에 밴 습관처럼 드로잉을 한다. 화가가 드로잉을 한다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으나 그것도 한 60년 하다 보니 작가 나름대로의 철학도 생기고, 드로잉 "스스로 증식할" 정도의 방대한 분량으로 늘어난 것 또한 사실이다. 이것이 드로잉에 대한 작가의 열정과 성실함의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으나, 필자는 이 긴 세월의 방대한 작업을 '빅데이터(big data)' 다루듯 과학적으로 분석할만한 독자적인 장르로 다룰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으로써 보다 정확하게 작가의 전체 작품 스타일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자가 앞으로 이야기할 '과학적'이란 뜻에는 화가의 드로잉을 내용(context)보다는 형식(form)에 치중하여 분석해보겠다는 태도로 '침대도 과학'이라는데 드로잉이라고 못할까? 하는 의구심에서부터 비롯되었다. ● 이번 기획전시의 컨셉(concept)은 "우연과 의도 사이"에서 자라난 혹은 탄생하여 "생물"처럼 살아 숨 쉬는 오원배의 드로잉을 느끼며 깊게 인식해보자는 취지인 것 같다. 오원배의 드로잉에는 화가를 지향하며 그가 성장하며 느끼고 배워 온, 방법상의 온갖 '테크닉(technique)'이 다 들어가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재현의 핵심인 선(line)의 다양한 운용을 비롯하여 '우연'이 발생한 추상적 질감과 번짐의 효과, 심지어 여백으로 남긴 공간까지도 필자는 '우연과 의도 사이'에서 벌어진 형식의 테크닉으로 간주한다. 오원배의 말처럼 "사유와 상상의 살을 뼈에 바르는 행위"가 드로잉이라면 그 '살'과 '뼈'에 해당하는 것을 형식과 테크닉의 관점에서 살펴보자는 것이다. ● 오원배의 드로잉은 필자가 기대한 것 이상의 넓은 스팩트럼을 가졌다. 그만큼 다양하다는 이야기다. 그가 말하는 '생물'로서의 '증식' 또는 '사유와 상상'의 '살과 뼈'와 같은 어휘의 선택도 그만큼 자신의 드로잉이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걸 표현한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변화하고 성장한 작가 나름대로의 스타일은 존재한다. ● 오원배의 학창시절(1960년대 후반~1970년대) 드로잉은 다양한 일상의 이미지들을 잡지삽화의 컷이나 고우영의 만화처럼 그려내는 재현적인 선의 운용에 관심을 가졌었다. 다소 그래픽(graphic)적인 선의 운용이었지만 이것 역시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 자연스러운 영향이었을 것이다. '전위(前衛)' 양식으로의 형상성이 배제된 추상미술, '앙포르멜'과 '미니멀리즘'이 횡횡하던 시기였지만 화가의 유일한 용돈벌이가 신문과 잡지의 컷을 그리거나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어 파는 것이었으니 기성 화가나 미술학도나 다 같이 가난한 시절을 살아내는 현실적인 방편이었을 것이다. ● 오 학도의 이 시기 드로잉 중 하나를 좀 더 깊게 들여다보자. 당시 아방가르드의 경향을 반영하듯 흩뿌린 폴락(Pollack) 식의 추상 이미지도 있지만, 그 배경으로 깔린 문자 추상이야말로 압권이다. 영어와 한글의 낙서처럼, 벌레처럼 꿈틀대는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의 '팝송', '영화' 제목 등 별것들이 다 등장한다. 거기에 건축물과 숫자도 등장하는데,1) 이후 지금껏 이미지를 조합하는 오원배의 조형 방식은 이미 이 당시부터 구축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재현적인 이미지들의 조합, 또는 '구상'과 다양한 '추상' 이미지들의 배치 등 드로잉과 마찬가지로 오원배 작품의 기본 형식은 역시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미지의 '조합과 배치', '조합과 배치에 의한 서사' 즉, '파편적인 서술(narrative)'로 작품의 내용을 연상하게끔 이끌거나, 아니면 아예 낯설게 만들어 관람자를 '사유와 상상'의 다른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끔 유혹(?)한다. 관람자는 일단 시지각적으로 불편하나 궁금하다. 대부분 이러한 조합은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의 테크닉으로 초현실주의 이후 흔히 어디서나 그 영향을 볼 수 있지만, 그 영향의 단초가 될 수 있다 싶은 오원배의 초기 드로잉은 드로잉이라 하더라도 매우 독창적이며 흥미롭다. ● 1970년대의 미술학도들에게 데페이즈망을 비롯해 데깔꼬마니(décalcomanie), 프로타주(frottage), 꼴라주(collage),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 등의 고전적(?) 테크닉 이외에도 '앙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의 영향과 함께 개발된 여러 독자적인 표면 처리들도 관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형식은 형식일 뿐, 오원배의 관심은 추상의 단순한 표면적 효과보다는 그로하여금 '사유와 상상'으로의 내용과 의미를 추출해줄 수 있는 기자재와 같은 역할로서의 추상적인 이미지들에 더욱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이 중에서도 프랑스 유학 시기(1982~85년)를 대표할 만한 드로잉, 특히 꼴라주를 나름대로 변형하여 개발한 오원배의 기법은 우리 현대미술사에 기록할 정도의 탁월한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 아마도 1970년대 후반쯤으로 사료된다. 오원배의 드로잉은 점차 강렬한 왜곡된 인간의 표현주의적 이미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프랑스에서의 인체 드로잉은 더욱 발전하여 표현의 강도가 치밀하고 강렬하면서도 그 내용과 형식이 서로 어울리며 한 목소리를 낸다. 1982년 이후 우선 기법적으로 오원배는 아예 책 안의 페이지마다 그림을 그렸다.2) 꼴라주의 역설이랄까? 드로잉을 하고 거기에 활자화된 페이지를 찢어 붙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책 안에 드로잉을 함으로써 꼴라주의 목적을 달성했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 책 안의 꼬부랑 글씨들이 낙서같고, 짐승같은 인체의 표현과 절묘하게 부합한다. 특히 인체의 형상성을 잡아내는 '음영(chiaroscuro)'의 영역을 스타카토 식의 짧은 선으로 낙서처럼 하찮게 그림으로써 오히려 꼬부랑 글씨들과 맞아떨어지는 효과를 발휘한다. ● 전두환 정권의 출범이 영향을 끼쳤을 정치적 함의가 있겠으나 그 논의는 여기의 주제가 아니므로 다루지 않겠지만, 적어도 파리국립미술학교 유학시절 지도교수였던 얀켈(Jacques Yankel, 1920~2020)의 주목을 끌 정도의 내용과 형식의 독창성을 인정받았을 것이다. 1985년 파리 화랑에서의 전시, 『얀켈과 그의 아틀리에』 포스터에 이런 꼴라주의 오원배 작품을 사용했으니 이를 입증한 셈이다.

오원배_Untitled_캔버스에 혼합재료_120×230cm_2024
오원배_Untitled_캔버스에 혼합재료_120×230cm_2024

2) 손은 지성을 따른다(Hands obey Intellect) ● 그림이란 "존재가 되어 가는 과정...무언가 존재를 감싸는 원형질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거야...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돼. 보이지 않는 것들의 복원에 대해서..." - 존 버거3) ● 개념적으로 드로잉이라는 행위도 결국엔 우리가 읽으려는 텍스트를 형태(shape)로 만들어내는 문학에 버금가는 지적(知的) 노동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드로잉은 "알려지지 않은 언어, 말이 없는 언어로 쓰인 텍스트"인 셈이다.4) '텍스트'의 측면에서 화가는 '형태'와 '언어' 사이의 통역자라 할 수 있다.5) '통역자'라는 관점에서 '통역'의 관건은 '형태'와 '언어'의 한계와 차이 또는 사이에서 발생하는 '메타포(metaphor)'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가 관건일 것이다. ● 예를 들어, 오원배가 그린 이미지들은 재현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 종류가 다양하다. 실제(實際)에 근간한 사실적인 드로잉이 있는가 하면 '오브제'화 한 이미지를 기호처럼 사용하기도 한다. 기호화된 이미지는 온전한 형태로서의 재현적인 해석을 내리기도 곤란하고, 그 이미지를 배치한 공간의 성격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언어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필자가 주목하는 형태와 언어 사이에서의 한계와 차이란 이런 것인데, 그런데 이때에 발생하는 추상적인 모호함이 '메타포'가 되어 '상징'을 낳고, 우리를 현실과 상상 사이의 영역을 왔다 갔다 하게 만든다. 드로잉은 이런 측면에서 언어에 대한 도전이자, 언어로 해낼 수 없는 지성적인 행위인 셈이다. ● 그렇다면 드로잉의 행위에 대한 '메카니즘(mechanism)'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이 메카니즘의 첫 단추는 '재현(representation)'의 근원을 추적하는 과정에서부터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이 '재현'의 어원 속에는 '손이(at hand)' 현전하는 장소와 대상의 무엇을 '끄집어내는(in sight of)' 것이라 할 때에, 여기에는 이미 드로잉의 행위가 단순한 묘사를 넘어 인간의 어떤 지성적 활동임을 말해준다.6) 즉, 무엇을 '그린다는 것(to draw)'은 '글쓰기의 행위(writing)'와 다를 바 없는 지극히 당연한 인간의 지성적인 활동이다. 필자가 주장하는 '손은 지성을 따른다(hands obey intellect)'는 드로잉의 명제는 이런 관점에서 "구상, 형상, 추상 하다못해 낙서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드로잉의 행위는 지성적인 활동"이라 정의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 어떤 무엇과의 '유사성'과 '관계'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인간의 '감각'과 '기억'에 의존하며, 그 둘의 유사성(similarity)과 관계(relation)를 통해 인간은 '상상'한다.- '유사성'과 '관계'를 인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시지각 단위는 '형태(shape)'이다. 그런데 형태는 항상 암시적이다. 특히 형태는 윤곽선(contour)에 의해 선이 둘러싼(outline) 내용과 대상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또한 형태는 속성상 뚜렷하고 한정적이나, 반면에 매우 자유롭기도 하다. 때문에 형태는 스스로를 정의하기보다는 무언가의 정의를 암시해주는 수단으로서의 시지각 단위인 셈이다.

오원배_Untitled_종이에 안료_각 64.5×48cm_2024

한편, 드로잉이 벌어지는 2차원의 평면은 개념상 매우 명확하고 한정적이다. 그러나 그 안에 그려지는 '형태'들의 윤곽선은 태생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추상(abstract)'적이다. 따라서 무엇을 '그린다(to draw, to give form)'는 것은 이미 그 안에 '자유'와 '추상'이 내재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무엇을 '그린다'거나 '묘사한다(to describe)'는 것은 그 무엇과의 '유사함'을 '잡아내는' 것이므로, 그 '잡아냄'의 과정에는 이미 '형태'에 깃든 '지각(知覺)'과 '개념(槪念)'을 '끄집어내는' 것을 스스로 내포하고 있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재현'한다는 것은 재현하는 대상의 '본질'과 '핵심'을 '형태'에 담겠다는 의지를 포함한 행위이다. 그러므로 드로잉은 무언가 활동적인 현전의 상태로서 그 행위나 그 행위의 결과보다 훨씬 더 많은 '활성도'를 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현전의 상태는 항상 실제의 시간과 실제의 공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7)

오원배_Untitled_종이에 안료_각 64.5×48cm_2024

3) 기록과 상상 사이 ● "회화란 보이게 만들어진 촉감...붓은 팔과 손의 연장이에요...쓰는 데 익숙해지면 붓털과 캔버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극도로 정밀하게 느낄 수 있지요. 어떤 붓을 골라서 써야 하는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캔버스를 어떻게 만지고 싶은가에 달렸어요. 어떤 종류의 손길을 원하는가의 문제죠. 손은 그려요. 눈은 고치고요. 손이 눈의 결정에 복종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손은 자유로워요. 회화의 기술이 손의 자유에 달렸기 때문에 손이 자유로운거죠...석도는 그림과 서예의 기원이 천상에 있되 그 성취는 인간의 것이라 했어요. 어쩌면 '천상'과 '시각'의 관계가 '인간'과 '촉각'의 관계와 같지 않을까요?" - 이브 버거8) ● 오원배는 드로잉을 '비현실을 현실화 하는 일체의 과정을 기록하는 행위'라 정의한다. 때문에 바꾸어 말하면 여기에 '상상'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실제든 상상이든 어쨌든 본 것을 기록한다는 측면에서 먼저 앞서는 것은 선(line, an area of tone)의 운용이다. 그런데 즉각적인 인식의 반향에선 선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 그 선이 무언가 운용자가 보고자 하는 의지의 방향으로 운용자를 이끌고 갈 것이기 때문에 선이 중요한 것이다. 그 의지의 방향이 운용자가 그리고자 하는 대상에의 정확성과 일치하거나 만족하느냐의 문제에서 당사자로서의 작가(오원배)는 매 순간 어떤 확신감을 갖거나, 아니면 자신의 의도와 어긋나 마음에 차지 않을 수도 있다. 매우 '형이상학적'이긴 해도 이 연속의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작가(오원배)는 비로소 자기가 그려내고자 하는 대상과 주제의 본질(inside)에 도달할 것이다. 필자는 이 과정의 여정을 '손의 확신성(sureness of hand)'이라 일컫는데, 이것을 화가의 '안정된 터치(sureness of tuoch)'정도로 쉽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 "손(hand)의 터치(touch)'라는 물리적 접촉의 관계-즉, 화가의 머리(지성, intellect)에서부터 가슴(감성, passion)을 거쳐, 손이 거머쥔 붓대를 타고 붓털의 끝에서 이루어지는 터치야말로 매우 '촉각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드로잉은 '완성(finished)'을 지향하는 캔버스의 회화(painting)와 비교하여 보다 즉자적인(instantaneous) 감각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촉각적'인 퀄리티(quality)가 스며들 수밖에 없다. 한 예로 세잔의 수채화를 생각하면 쉽게 와 닿을 것이다. ● "드로잉은 화가가 발견한 어떤 사건-그것을 보았거나, 아니면 기억과 상상을 통해서-의 자전적 기록이기도 하다"는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은 오원배와 일맥상통한다.9) 여기에 덧붙여 필자는 드로잉을 '촉각적인 자전적 기록'이라 부르기를 원한다. 이런 측면에서 드로잉은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가지지 않는 화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할 것이다. 보편적으로 '완성된(finished)' 상태로서의 캔버스 작품이 공공성과 시장성을 띤 유통의, 보다 적극적인 소통의 대상인 반면에 드로잉은 판매가 아닌 화가의 개인적인 필요나 소통을 위해 제작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드로잉을 화가의 궁극적 작품을 위한 전단계(前段階)의 습작쯤으로 평가절하하여 취급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작가의 태도로서나 관람자의 입장으로서 잘못된 수준이하의 인식이라 아니할 수 없다. ■ 정영목

* 각주 1) 이 드로잉은 '4304년 12월 2일' 그렸다. 이 시기 즉 1971년 전후 오원배는 서기력(西紀曆)보다는 단기(檀紀)로 표기함으로써 민족적 전통의식을 염두에 두었던 듯 싶다. 2) 프랑스 원본의 책어떤 그림 (존 버거와 이브 버거의 편지)의 제목은 『Exercices Spirituels』로 우리 말로는 『영적 훈련서(?)』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는데, 드로잉할 책의 내용도 신경써서 고른 듯. 3) 『어떤 그림, 존 버거와 이브 버거의 편지』, 열화당, 2021, p. 64. 4) Eve Berger, p. 66. 5) Ibid. 6) 이 문자의 조합은 "re + present('praesens' ='before' + 'to be' =現前)"로 means 'in sight of', 'at hand', here, now it is something that is 'before' in the sense of 'being prior to'." 7) We consider 'conditions of presentation' before representation. hence, has to consider 'time(real time) and space(real space)'. 8) 앞의 책, p. 75. 9) Geoff Dyer, ed., 『John Berger, Selected Essays』, New York: Pantheon Books, 2001, p. 10: "A drawing is an autobiographical record of one's discovery of an event-seen, remembered or imagined."

Vol.20240513d | 오원배展 / OHWONBAE / 吳元培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