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만남 / 2024_0516_목요일
기획 / 수성아트피아 전시감독 / 서영옥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수성아트피아 SUSEONG ARTPIA 대구 수성구 무학로 180 1,2전시실 Tel. +82.(0)53.668.1840 www.ssartpia.kr @ssartpia_official
'연주필즙(硯舟筆楫) - 붓, 노를 삼다' 전을 기획하며 ● 벼루 씻은 연못이 검어지도록 글씨 연습을 했다는 말이 있다. 시(詩),서(書),화(畵),각(刻)을 각각 10년씩, 40년을 거쳐야 서화(書畵)의 맛을 조금 안다는 말도 있다. 글씨 공부를 해서 닳은 붓이 산을 이루었다는 미담도 전해져 내려온다. 예주학해(藝舟學海) 연주필즙(硯舟筆楫)도 같은 맥락이다. 벼루로 배를 삼고 붓으로 노를 저어온 세월이 50~60년이다. 혜정(蕙汀) 류영희 작가와 문강(文岡) 류재학 작가의 50~60년 예술 행보에 비춘 표현이다. ● 국어사전은 글씨를 붓으로 쓰는 예술을 서예(書藝)라고 한다. 우리(한국)말로는 '붓글씨'라 한다. 서예는 동아시아 고유의 예술이다. 입어유법(入於有法) 출어무법(出於無法)이라 하듯이 서예에는 엄격한 수련 과정이 전제된다. 붓을 잡을 줄 알아야 글씨를 쓸 수 있고(執筆), 붓을 움직일 줄 알아야 글씨가 탄생한다(運筆). 붓의 움직임이 글자를 이루고(結構), 그 글자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이 되는(章法) 종합 결과물인 셈이다. 서예는 특히 임서(臨書)에서 형임(形臨)을 거쳐 의임(意臨)의 단계로 들어가 문기(文氣)와 필세(筆勢), 묵운(墨韻)을 고루 갖추어야 한다.
중국에서는 법도를 중시하여 서법(書法)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정신을 중시하여 서도(書道)라 한다. 법(法)을 지키고 도(道)를 닦고 예(藝)를 표현하며 문장을 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서예가들이 오랜 세월 '연주필즙'하며 수련하는 이유일 것이다. 공통점은 서예술(書藝術)이 학문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이다. 지(紙)·필(筆)·묵(墨)이 필기구였던 때에 식자층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붓글씨를 썼다. 글씨는 문장을 이루고 문장에는 정신이 스며 있다. 정신은 곧 그 민족의 얼이자 혼이다. ● 한국에서 서예는 조선시대 유교문화 아래서 크게 성장하였다. 한국 정신문화의 근간을 지켜오는 대구·경북지역은 영남문화의 심장부라 할 만큼 탁월한 기량의 예인과 학자들이 많다. 이러한 탄탄한 역사적 인적 인프라는 대구지역의 자부심이자 정신이다. 혜정(蕙汀) 류영희 작가와 문강(文岡) 류재학 작가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서예는 디지털 문화의 가속화에 밀리거나 서구 현대미술에 가려지는 추세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서예만의 고유한 가치에 한발 가까이 다가가 볼만하다. 향후 서예가 나아갈 방향성도 함께 모색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시점이다. '붓, 노를 삼다'전을 기획한 이유이다.
현대미술이 범람하는 시대에 서예는 비주류 예술이 되었다. 이번 전시에 두 작가의 대표작을 AI 기술로 변환한 영상작품을 선보이는 이유이다. 매스컬쳐(mass culture)가 다수의 이목을 집중시킨다는 것에서 착안한 형식적 콜라보다. 디지털 문화에 빠른 적응력을 보이는 MZ세대에게 서예가 조금 더 새롭게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포퓰러컬쳐(popular culture)의 표현방식만이 해결책은 아니지만 예술의 수용과 소비라는 측면에서 전자매체를 이용한 전시방식이 시장성을 확보하고 서예술 감상 활성화에도 동력이 되었으면 한다. ● 긴 세월 영남서단을 지켜오고 있는 혜정(蕙汀) 류영희 작가와 문강(文岡) 류재학 작가는 문화류씨 곤산군(崑山君)파 38대손 남매 서예가이다. 어린 시절 제사가 많은 종가집에서 태어나 지방(紙榜)을 쓰고 남은 먹물로 붓글씨를 즐겨 썼다는 류영희 작가는 60년간 대구에서 한글서예의 지평을 넓혀온 서예 명인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누이를 따라 한글서예를 익혔다는 류재학 작가는 한문서예는 물론, 전각에서부터 서각, 판화, 동양화, 미술사 이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고루 섭렵한 보기 드문 학자이자 작가이다. 두 작가는 혈연(血緣)관계이지만 예술의 행보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류영희 작가가 우리다움을 충족시키는 한글서예의 전통과 저변확대에 심혈을 기울였다면, 류재학 작가는 전통서예와 현대서예의 양단을 아우르면서도 전통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전통서예는 문자(한자) 쓰기에 주력한다. 특히 예술로서의 전통서예는 고전의 철저한 미적 규범 준수를 전제로 한다. 점획과 결구, 장법 등을 통해 법첩 고유의 심미성을 충분히 습득한 후 그 미적 규범을 토대로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전통 서예의 특징이다. 한문의 모체인 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임서(臨書)는 기본이다. 한글도 다르지 않다. 전서와 예서에 바탕을 둔 판본체와 해서, 행서, 초서에 바탕을 둔 궁체를 임서(臨書)한다. 반면 현대 서예는 전통 서예의 기준과 법칙을 엄격하게 준수하면서도 그 틀에 갇혀 있지 않으려는 다양한 시도를 한다. 류재학 작가의 행보가 대표적이라 하겠다. ● 류재학 작가의 혁신적인 행보는 1982년부터 나타나는데, 대학을 졸업하던 때인 28세에 첫 개인전을 열면서부터다. 공모전으로 작가 대열에 들어서던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오로지 작품으로 승부하겠다는 패기를 보여주었다. 류재학 작가는 서(書·)화(畵)·각(刻)을 아우르면서 작품 재료는 지(紙)·필(筆)·묵(墨)과 인재(印材)를 넘어 나무, 돌, 흙, 석고, 도자, 금속, 알루미늄 등으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다양한 재료로써 서예의 영역을 확장할 뿐만 아니라 제목과 내용, 문자와 숫자, 한자와 한글과 영어, 대자(大字)와 소자(小字), 먹과 색채를 넘나들며 순수와 실용을 융합하는 작업에 자신감이 넘친다. 그 바탕에는 서화동원(書畫同源)과 시서화일률(詩書畵一律)이라는 동아시아의 문화적 유전자가 내재한다. 서구에 없는 문자예술인 서예를 어떻게 현대미술과 병치시킬 것인가라는 문제에 과감하게 도전한 것이다. 개인전 28회를 열며 한국현대서예가 1.5세대로써 류재학 작가가 기울인 일련의 노력은 소외가 아닌 소통하는 서예를 위한 헌신에 가깝다.
반면 스승 조수호 선생과 소헌 김만호 선생(1962년부터 30년간 한문 서예를 지도받음)에게 받은 심정필정(心正筆正)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는 류영희 작가는 1965년 제15회 국전에 입선했다. 당시 류영희 작가의 나이는 24세, 영남지방에서는 최초의 한글 수상 경력이다. 그 밖에도 다양한 수상 경력이 지면을 가득 채운다. 작가로 성장한 후에는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한글서예 대표작가초대전(2003) 등, 수많은 초대전과 교류전에 출품한 경력이 눈부시다. 초등학교 교직생활 12년(1961-1973)을 접은 후에는 대학교에서 후학을 지도하거나 서예연구실을 개설해 문하생을 양성하며 서예의 저변을 확대했다. 류영희 작가는 80대인 지금까지도 봉강서도회를 비롯한 전국 단위의 각종 서예단체에 가입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 무엇보다 혜정 류영희 작가에게 '명언'은 놓칠 수 없는 스크랩 대상이었다. 평생 모아둔 메모 노트에는 철학과 문학, 역사가 담겨 있다. 메모한 글귀는 곧 삶의 지혜가 되었고 서예술로 승화되었다. 교단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도 40년간 시부모를 모신(10년 병수발) 류영희 작가는 두 자녀의 어머니와 아내 역할에도 충실하였다. 삶의 과정이 지난해도 특유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한글 서체 혜정체를 창안했다. 한류(韓流-K culture)열풍에 한글이 다시금 주목되는 요즘 꾸준히 서예로 한글을 지켜온 류영희 작가에게 남다른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마침내 작가로 우뚝 서서 남긴 류영희 작가의 다양한 업적은 한국 여성으로서는 귀하고 드문 이력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작품은 수성혜정체이다. 엄격하면서도 자애롭고 단단한 어머니의 느낌이 우러나는 수성혜정체는 현재 수성구 전용 폰트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붓, 노를 삼다' 전은 가족이라는 뿌리에서 가지를 뻗어 50~60년간 자신만의 서품(書品)과 서격(書格)을 일구어 온 두 남매 작가의 작품을 한 공간에 펼치는 이례적인 자리이다. 두 작가는 절차탁마(切磋琢磨)로 일군 예술적 성취를 학교와 서실, 유튜브를 통해서 대중(또는 후진)과 나눈다. 무엇보다 대구 서예계 후배들의 응원이 훈훈하다. 서예가 율산 리홍재는 개막식 퍼포먼스를, 서예가 삼도헌 정태수는 평론을, 두 작가와 오랜 인연인 화가 학강 김진혁은 소회문을, 대구경북서예가협회 이사장 초람 박세호는 축사를 약속했다. 하나 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가족애다. ● 류재학 작가의 외아들이 전시 준비에 동참했다. 80대 고모(류영희)와 70대 아버지(류재학)의 작품세계를 영상으로 제작하겠다며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인터뷰 영상 촬영을 위해 아들의 서울 스튜디오로 향한 것은 양 가족이 수년 만에 함께 나선 가족 소풍이 되었다. 자욱한 먼지를 털며 작품을 선별하던 누이와 남동생이 아련한 추억을 들추다가 눈시울을 붉힌다. 서실에 켜켜이 쌓인 자료 정리에는 류영희 작가의 남편이 동참했다. 60년을 함께한 부부애야말로 지난한 세월을 이기며 일궈낼 수 있었던 창작의 원천이었다. 누이와 남동생, 아들과 아버지, 남편과 아내가 50~60년간 다져온 삶의 훈기가 예술로 승화되었다.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 등, 안팎으로 가치 있는 삶을 녹여낸 작가의 행보가 붓글씨로 남은 것이다.
1인 가정이 늘어나는 시대에 핵가족과 대가족을 옳고 그름이나 경·중의 가치로 저울질할 순 없다. 다만 우리의 현재를 예술가의 길에 비추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5월 가정의 달에 '붓, 노를 삼다'전을 개최하는 이유이다. 이번 기획전은 남매 작가의 서로 다른 묵향(墨香)이 어떻게 조화(또는 다름)를 이루는지 한 자리에서 비교·감상해 볼 수 있는 기회로써도 의미 있다. 이 작은 행보가 서예계와 미술계의 작은 소득이 되었으면 한다. 끝으로 서예의 진정성을 공유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준 수성아트피아(수성구청, 수성문화재단)에 감사를 드린다. (2024. 4.) ■ 서영옥
Vol.20240512b | 연주필즙(硯舟筆楫)_붓, 노를 삼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