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 / 충남도서관 후원 / 충남문화관광재단 기획 / 이진
관람시간 / 09:00am~10:00pm / 월요일 휴관
충남도서관 Chungnam Library 충남 홍성군 홍북읍 도청대로 577 2층 기획전시실 Tel. +82.(0)41.635.8000 library.chungnam.go.kr
바닥 위에 떠 있는 큰 세계 ● 그리스 신화에서 시지프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죽어서 자신의 몸보다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손으로 굴려 올리는 형벌을 받았다. 뾰족한 산꼭대기에 바위를 올려 놓으면 반대편 골짜기로 바위는 굴러 떨어지고, 시지프는 다시 산 아래에서부터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무한반복의 형벌이었다. 시지프의 형벌이 괴로운 이유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벌이면서, 어떤 의미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시지프를 통해 삶은 그 자체만으로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지, 만약 없다면 자살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질문을 묻고 있다. 이에 대한 카뮈의 답은 "없다"와 "아니다"이다. 에세이의 마지막을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 1) 고 끝맺으면서, 카뮈는 끝이 없는 형벌을 수행하는 시지프가 신에게 유일하게 반항할 수 있는 것은 형벌의 무의미함에 대한 의식을 없애고 무한한 반복을 즐기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고 한다. 세상의 부조리를 깨달은 사람이 신에게 의지할 것이냐, 자살을 선택할 것이냐라는 이분법적인 선택을 넘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외부적인 요인에서 찾지 말고 삶 그 자체를 받아들이라는 의미이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와 희망과 죽음이 서로 응수하며 벌이는 비인간적 유희" 2) 를 묘사하고 있다.
작가 이진은 "그림 그리는 게 고통스럽다"고 한다. 최선을 다해 참고 있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그림을 그린다. 마치 해녀들이 물 속에서 최대한 오래 숨을 참은 뒤 수면 위로 올라와 가쁘게 숨을 내쉬 듯 그린다. 하지만 그에게 그림이란 지극한 고통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행할 수 밖에 없는, 행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행복이자 유희이기도 하다. 작가 이진에게 그림 그리기는 시지프의 형벌이자 숨비소리이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불합리를 발견하고, 사회의 모순 속에서 인간의 모순을 발견한" 그는 스스로를 허무주의자로 칭한다. 우울을 기본적인 정서로 깔고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럴 바에야 즐기면서 살아야겠다"는 자각을 통해 쾌락주의자로의 변신을 꾀하였다. 여전히 허무와 쾌락이 양립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카뮈의 인물처럼 스스로 그 자체를 수용함으로써 자신만의 믿음을 만들어 가고 있다.
작가 이진에게 믿음은 '이해의 형상화'이다. 그에게 그림 그리기는 '이해의 형상화' 과정이며, 이진의 회화는 '이해의 모습'을 향해 있다. 2011년 개인전 이후 몇 년 간 선보였던 인간의 '귀'를 마치 뒤틀린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들은 그가 세상을 향해 이해를 구하기 위한 첫 출발로 보인다. "초기 작업에서 '신체성'을 통해 이해의 모습을 구축"했다면 그 이후에는 몸통이 절단된 고래, 머리 없는 홍학, 해골, 머리뼈, 가슴이 뚫린 머리 없는 인체, 가시 면류관, 잎이 없는 가시 나무, 나열된 삼각뿔, 다이아몬드형 도형 등 구상과 추상이 섞이면서 화면 위에 나열되는 작업들이 주를 이룬다. 초창기 작업이 대형 화면에 신체의 일부분을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배치되었다면, 점차 "내부적인 변화를 통해 다양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보다 넓은 이해의 형상화"를 꾀하고 있다.
한편 이진의 회화에서 변하지 않게 고수되고 있는 채도 높은 바탕색과 강렬한 보색 대비는 마치 "검정은 색이 아니다"를 외치고 있는 듯 하다. 검정은 전통적으로 죽음에 대한 애도, 슬픔, 좌절, 두려움, 공포, 쇠퇴 등의 부정적인 의미를 상징한다. 그는 이러한 상징들은 색채를 통해서는 부정되지만, 그 위에 그려진 여러 형상들을 통해 드러낸다. 이를 통해 작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순을 인정하고, 자신의 부정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의 흔적을 보여준다. 3)
이진의 '이해의 모습'은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외부에서 향해 있다. 개인사에서 시작한 과거의 기억과 그것으로부터 일어나는 감정과 생각을 내적으로 발전시키고 그것들을 외부로 표출하는 과정이 그의 작업 방식의 한 축이다. 또 한 축으로는 전쟁, 빈곤, 환경 파괴와 같은 인류세에서 모두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응시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실천의 방식으로 이해를 구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지금 시대는 나날이 기술의 발전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로 인해 이동과 교류는 용이해 졌으며, 마치 하나의 세계 안에 우리는 존재하고 서로 간에 영향을 미친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세계의 형태를 니콜라 부리오는 '주름'이라고 칭하였다. 이진의 회화에서 '주름'은 작가가 만든 상징과 기호가 선형 혹은 원형으로 나열되어 있는 비현실적인 사막과도 같은 공간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가 나열한 오브제들은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허물어 탈중심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떠 있는 오브제들로 인해 무중력 상태를 상상하게 하는 공간들은 어떤 중심이 존재하지 않은 ""바닥 위에 떠 있는 큰 세계" 4) 를 연상시킨다.
그는 이 공간이 실은 지구의 아주 작은 일부분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며, 언젠가 지구의 온전한 형상을 연속된 회화를 통해 구현하겠다고 밝혔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에서 시작한 세상을 향한 대화는 인류와 자연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하면서 평평한 세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 세계의 '주름'이 접혀졌을 때 작가가 구축하고자 한 '이해의 모습'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다만 그 미래의 날에도 이진에게 중요한 건 멋진 귀결이 아니라 끝나지 않는 대화, 이해의 구애일 것이다. ■ 박미연
* 각주 1) 알베르 카뮈(김화영 옮김), 「시지프 신화」, 민음사(2016), p. 185. 2) 위의 책, p. 25. 3) 김영찬, 「상징과 기호로 보는 다양한 관계들의 이해」, 홍성신문, 2024.4.15. 4) 질 들뢰즈(이찬웅 옮김),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문학과 지성사(2004), p. 226.
Vol.20240416g | 이진展 / LEEJIN / 李振 / painting